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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01 08: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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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은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에 제한이 가해 질 수 있습니다. 오히려 완전한 자유와 존엄성을 갖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봐야죠.
프랑스 실존주의에서는 인간의 자유를 긍정하면서 인간에게는 본질이 없으며, 언제나 자유로운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사르트르의 주저 중 하나인 존재와 무에서 웨이터를 예를 들며 웨이터는 웨이터로서의 역할을 연기할 뿐이지 그 웨이터에게 웨이터의 본질이 있어서 웨이터가 된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언제든 앞치마를 던지고 새로운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본질은 무 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구조주의 철학자 알튀세르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 웨이터가 정말 아무때나 원할 때 자유롭게 웨이터를 그만 할 수 있을까요? 인간의 생존을 위해 일을 해야하는 사회 구조의 노예는 아닐까요? 인간은 이데올로기의 노예는 아닐까요? 주변 사람으로 부터 열녀라고 불리며, 부모를 극진히 모시고, 가족들을 위해 희생하는 여자는 스스로 자유롭게 그러한 삶을 살고 있다고해도 결국 사회 구조의 가치에 세뇌되어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그런 삶이라고 정신승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실존주의에서 존재의 자유와 존엄성에 대한 무한한 긍정을 했던 것이 구조주의로 넘어가서 인간의 한계를 마주하고 후기 구조주의로 넘어가서 한계적인 상황에서의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꿈꾸게 됩니다.
결국 인간의 존엄성 역시 절대적인 가치가 있어서 존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상호 합의가 내재되어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애초에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는 것이 더 맞는 말일 수도 있죠.
인간이 만든 도구가 인간을 노예화 한 것은 없던 일이 아닙니다. 국가라는 것도 민족이라는 개념도 인간이 만든 허상입니다. 하지만 국가는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고, 억압하는 수단입니다. 화폐도 마찬가지죠. 인간이 편의를 위해 만든 화폐의 노예로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요? 인간의 과학기술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결국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 스스로 만들어가면서 인간이 만든 도구에 대한 철저한 성찰이 필요한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