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2
2021-05-10 08:25:08
0
일단 플라톤이 지향하던 사회라는 뜻에서 유토피아를 쓰긴 했겠지만 유토피아는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죠.
2500년 전 플라톤의 철학만을 두고 철학이 보수적이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크죠. 전혀 말도 안되는 의견이라 어디서 부터 시작을 해야할지 엄두도 안나는 상황입니다만, 일단 되는대로 짚어보면요.
20세기 전의 에피쿠로스, 몽테뉴, 스피노자, 니체, 프루동 같은 철학자, 20세기의 실존주의, 구조주의, 후기구조주의의 셀수 없이 많은 철학자(푸코, 사르트르, 카뮈, 화이트헤드, 들뢰즈, 바디우 등등)의 사상은 시대를 초월하여 진보적인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종류의 권력, 실체, 허상에 대한 집요한 공격을 하여 궁극적인 자유를 탐구하고 인간이 자유롭기를 바라는 철학을 하였습니다. 인간의 자유를 꿈꾸고 실천하는 것 만큼 진보적인 사상이 있을까요?
뿐만아니라 스토아학파, 데카르트, 애덤 스미스, 루소, 흄, 칸트, 헤겔, 마르크스 등 거의 이름이 알려진 철학자들 모두 현재의 시대정신에 비하면 비교적 보수적인 냄새가 날지라도,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고찰을 하여 당시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진보적이었던 철학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보수적이라고 알려져 있는 플라톤, 유학, 스콜라철학 등도 우리가 생각한 것 만큼 보수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보수적인 철학이긴 합니다만 그렇게 생각처럼 보수적인 것 만은 아닌 것이죠. 기독교 철학의 정점이었던 신부 출신의 오컴이나 둔스 스코투스의 사상은 해방신학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자손이고 피조물이라면 더 약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이 신의 뜻이라는 철학을 결코 보수적이라고 낙인 찍어서는 안되겠죠. 유학도 기존의 계급사회를 공고히하는 보수적인 사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가장 보수적이라는 유학자 순자, 혹은 그의 제자인 법가 사상가 한비자, 그리고 수많은 법가 사상가들도 보수적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순자나 한비자 같은 사상가는 강력한 황제의 통치를 주장하긴 했지만 그 한계를 명확히 하는 면이 있었습니다. 군주의 변덕이나 욕망에 따른 정치가 아닌 법에 의거하여 법의 통제를 받아 사민하고, 애인의 정치를 하라고 지적한 것이죠. 물론 겸애를 주장한 묵가나 국가의 권력 자체를 부정한 양주에 비하면 보수적이라고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겸애를 주장한 묵가의 사상이 나아가서는 오히려 국가의 권력을 긍정하는 보수적인 면이 있다고도 본다면 사상은 한가지 보이는 면으로만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으셨던 플라톤 역시 본질의 철학을 추구하여 백성을 백성의 역할에 포획한 면이 있지만 반대로 군주도 군주의 역할 안으로 포획해버린 면은 결코 보수적인 철학자의 모습이라고 단정짓기 힘들게 합니다.
존재의 무한한 자유와 고통으로부터의 치유를 추구했던 불교철학은 말할 것도 없죠.
철학을 그냥 보수적이라고 퉁쳐버린 의견에 반박글을 올리는 것은 그만한 가치라 있나 싶을 정도로 의미가 있는 의견이라고 보긴 힘듭니다. 하지만 이런 오해가 쌓이고 싸여 정말 철학이 보수적이구나라는 의견이 생길까봐 댓글을 달아봅니다. 우리가 현대에 이르러 진보적이라고 하는 모든 정치, 법, 사상적 기반은 모두 철학입니다. 모든 철학을 진보적이라고 하기 어려운 만큼 모든 철학을 보수적이라고 하기도 어렵겠죠. 철학의 역사는 그 어떤 학문의 역사보다 길고 치열했습니다. 그 길고 긴 역사를 한마디로 퉁쳐버리는 것 만큼 어리석은 일이 있겠습니까?
정확성 얘기도 하셨지만 그것은 학문의 특수성과 관련을 지어야겠죠. 우리가 모르던 영역에 대한 설명을 해주던 것이 철학이었습니다. 심지어 지금도 빅뱅 이전의 우주, 양자의 미시세계 우리의 인식의 영역을 벗어난 학문의 영역은 철학적인 사변적으로 추측을 할 뿐입니다. 한마디로 천문학이나 물리학의 끝판에서는 혹은 생물학의 끝판에서는 철학적 사유가 학문의 첨병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