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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9 2016-02-12 20:15:1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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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국사교본은 기본적으로 진단학회에서 나온 내용(국사교본)을 이병도가 개정하여 출판한 것입니다.
이병도가 진단학회를 주도했고, 국사교본 집필에도 상당한 기여를 했기때문에 이런 명칭("새" 국사교본)이 가능했죠.
388 2016-02-12 20:12:4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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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 아닙니다. 전문을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50P, "亂"이란 표현은 그저 어지러운 상황을 나타낼 뿐입니다. 멸칭도 존칭도 아닙니다.

①『국사 교본』- 진단학회
삼별초가 대 몽고전의 중심이었음을 밝히고 삼별초의 항전이 어떤 양상으로 진행되었는지를 자세히 밝히고 있다. 특히 삼별초의 항전을 강대한 세력(몽고)와 끝까지 싸운 고려무사의 전통적 정신을 발휘한 것이라 고 평가하여 삼별초의 항전을 높이 서술하고 있다.

前부터 抗夢戰線의 中心이 되어온 三別抄는 裵仲孫의 指揮밑에서 動亂을 일으켜 松京政府와 因緣을 끊고 새로히 政府를 만들어 끝까지 蒙古와 싸우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承化侯를(이름은 溫이니 王族임) 王으로 세우고 珍島로 내려가 그곳을 根據로 얼마동안 抗戰을 계속하다가 松京과 蒙古의 聯合軍에게 敗하였다. 그들은 다시 濟州로 들어가 抵抗하더니 마침내 衆寡가 不適으로 敗亡되고 말았다. 이 三別抄의 亂은 前後 四年에 걸쳐 끝까지 結束을 굳게하여 强大한 勢力과 싸운것이니 이는 高麗武士의 傳統的 精神을 十分 發揮한것이다.

②『새 국사 교본』- 이병도
『새 국사 교본』에서는 삼별초의 대몽항쟁에 대하여 개경환도에 반대의견을 가진 무리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서술하고 있어서 국사교본에서의 민족적 색채가 보이지 않는다.

元宗 11년에 이르러 드디어 舊都 개경으로 환도를 결행하였다. 그런데 이때 강도안에서는 몽고에 대하여 어디까지 抵抗하려는 一派가 있어 개경환도에 反意를 품고 이곳을 근거로 하여 난을 일으켰으니 이른바 三別抄의 亂이 이것이다. 3別抄(左 右별초와 신의 별초)란 것은 원래 최씨 집권시대에 양성하여 오던 특별군대이었는데 이때 그들을 통솔하고 있던 裵仲孫이 그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들은 일시 기세가 대단하였으나 官軍의 토벌로 말미암아 강도에서 서남해쪽으로 옮기어 마침내 제주도로 들어가 수년간 버티다가 官夢軍에게 敗滅을 당하고 말았다

79P, 국사교본과 새국사교본, 두 교과서가 "다른 교과서들에 비해" 삼별초의 항전을 높이 평가한다는 말이고, 정확히 말하면 다른 교과서에는 삼별초난에 대한 기술이 없기 때문에 이런 표현이 등장했습니다.

몽고의 침입에 대한 고려의 대응은 고려가 몽고의 지배를 받게 된 것뿐만 아니라 몽고에 대한 고려의 항쟁을 주로 서술하여 민족 주체적 입장을 잃지 않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삼별초의 대몽 항쟁에 대해서도『국사교본』과 『새국사교본』의 경우 자세히 소개하면서 삼별초의 항전을 높게 평가하고 있으나 다른 교과서들의 경우 내용이 빠져 있거나 특별히 서술하지 않고 있다.
387 2016-02-12 19:26:37 0
신석호라는 양반이 누군가 했더니... [새창]
2016/02/12 14:02:35
진보적인 사학자로 유명한 강만길교수(노무현정권시절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가 신석호의 애제자였습니다.
본인 자서전에서 신석호가 강만길을 각별히 챙겨준걸 언급하더군요 ( 4학년때 아시아문제연구소 조교로 채용 )
386 2016-02-11 22:52:35 5
실증적인 이병도의 식민사관 서술 ( 48년 새국사교본 ) [새창]
2016/02/11 17:41:46
그리고 "비교적 충실하게 원 사료를 옮겨 정리했지만" 의도적인 삭제와 축약도 많이 보인다 이 부분은 왜 빼십니까?
385 2016-02-11 22:51:56 5
실증적인 이병도의 식민사관 서술 ( 48년 새국사교본 ) [새창]
2016/02/11 17:41:46
이병도가 수사관보라는 거 말고 어느부분을 서술했는지 알수 있는 증거가 있나요? 알수 없는걸 알수 없다 했을뿐입니다.
조선사 전체를 이병도가 저술했습니까?
384 2016-02-11 22:49:31 3
실증적인 이병도의 식민사관 서술 ( 48년 새국사교본 ) [새창]
2016/02/11 17:41:46
식민사관으로 한민족역사를 더럽히려면 해방후 교과서가 됐던 본인 저술이 되었든 식민사관이 반영되어야 그게 후세에 전해지는거 아닌가요?
조선사에만 있으면 그게 대체 어떻게 후대에 영향을 미칩니까?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는 해방후 국내 사학계에서 인용된바가 거의 없습니다.
383 2016-02-11 22:48:04 4
실증적인 이병도의 식민사관 서술 ( 48년 새국사교본 ) [새창]
2016/02/11 17:41:46
식민사관 기술이 어디에 있나요? 그의 이른바 식민사관을 쓴 기록이 어디에 있냐고 묻는겁니다.
382 2016-02-11 22:46:57 4
실증적인 이병도의 식민사관 서술 ( 48년 새국사교본 ) [새창]
2016/02/11 17:41:46
http://210.101.116.28/W_files/kiss10/78200588_pv.pdf / 조선사 (조선사편수회 편) 제2편(신라 통일 시대의 편찬 방식 성격
고려대 박찬흥교수의 논문입니다.

조선사 제2편과 삼국사기 신라본기 의 기사를 대조하여 검토한 결과, 비교적 충실하게 원 사료를 옮겨 정리했지만 의도적인 삭제와 축약도 많이 보인다

조선사 제2편(신라통일시대)은 제3~6편과 같이 사료의 개요를 기재하여 편찬하는 것 보다는, 제1편과 마찬가지로 원 사료를 그대로 게재하는 것이 사료집으로서의 가치도 높고 이용하기에도 더 편리했을 것이다. 고려나 조선에 비해 사료가 적은 시기이기 때문에 원 사료를 보여주는 것이 더 좋았다. 일본인 편수자의 관점에 의해 요약 삭제 발췌되었다는 점에서, 일제의 식민지배에 기여하는 역사관이 투영된 사료집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조선사편수회의 어느 부분에서 이병도가 뭘 했는지 알길이 없으니 얼마나 왜곡을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사료집인데 말입니다.
다만 이병도를 비난하는 분들의 일치하는 주장은 "이병도가 식민사관으로 한민족 역사을 더럽혔다"입니다.

해방직후 증등역사교과서에 그의 기술은 이 비난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해방후 역사교과서가 민족주의적으로 기술되어있는데 대체 어떻게 한민족역사를 왜곡했단 말입니까? 조선사 편수회의 조선사는 해방이후 국내 사학계의 논문에서 인용된 바도 거의 없습니다.
381 2016-02-11 22:40:10 4
실증적인 이병도의 식민사관 서술 ( 48년 새국사교본 ) [새창]
2016/02/11 17:41:46
무엇이 가당치 않다는 말인가요?
이 글에 이병도가 친일파가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까?
380 2016-02-11 22:36:00 6
실증적인 이병도의 식민사관 서술 ( 48년 새국사교본 ) [새창]
2016/02/11 17:41:46
친일파인것과 역사기술이 식민사관에 입각한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베르너 폰 브라운이 나치장교였다고 해서 아폴로 프로그램이 나치의 것은 아닙니다.
376 2016-02-11 22:13: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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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외교는 눈치도 중요하지만 대화가 제일 중요합니다.
한국이 THADD배치문제로 주변국인 중국이나 러시아와 진지하게 대화를 한적이 있었나요?

진지한 설득과정 하나 없이 논리적으로 우리가 맞으니 입다물라고 말하는건 외교가 아닙니다.
미국같은 강대국 조차 중요한 아젠다를 실행할땐 국무부를 동원해서 설득작업을 반드시 합니다.
375 2016-02-11 22:11:0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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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자료가 2012년이고 작년에 전체 수출의 25.3%를 중국이 흡수했습니다.
냉정하게 말해서 중국의 뜻을 거스르는건 불가능합니다. 쪽박차고 거지같이 사는걸 받아들이시겠다면 모르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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