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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4 2016-02-15 22:06:34 0
고려 태조의 북방개척 - 1 [새창]
2016/02/15 21:09:34
여진 자체가 갈족, 말갈족, 선비족이 융합된 족속이라, 말갈이라 부르던 여진이라 부르던 큰 차이는 없을것 같습니다.
433 2016-02-15 22:04:5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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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신걸 "삼한일통"의식이라고 하는데 실제 그런게 존재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게 존재했다면 신라하대이후 후삼국이 등장할수 없었을 것입니다.
삼한일통의식이 일반적이었다면 나라가 멸망한지 250년이 지나서 백제와 고구려가 다시 등장할수 없죠.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87604.html
노 교수는 삼한일통, 곧 ‘삼국 주민이 하나’라는 인식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 백제 유민과 고구려 유민을 융합하기 위해 키워낸 이념일 것이라고 말한다.
7세기 무렵에 격화한 삼국 간 전쟁 과정에서 삼한일통이라는 생각이 일각에서 자라났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것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공통관념으로 확립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10세기부터 14세기 말까지 존속한 고려(918~1392)는 그 국호에서 보듯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다. 태조 왕건은 이를 대내외에 공포했고, 고려 왕실은 고구려 출신임이 강조되었다.

한데 삼국통일이 된 지 250년 만에 등장한 나라가 고구려 계승을 표방했다? 삼국통일전쟁이 남긴 피정복민의 상처와 정복자에 대한 반감은 고구려 유민과 백제 유민의 집단기억 속에 새겨져 신라 말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골품제에 입각한 신라국가의 체제는 피정복민을 권력 중심부에서 배제하는 체제였기에 삼한일통의식이 삼국 유민 의식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신라 정부의 통치력 와해를 계기로 후삼국으로 재분열됨으로써 삼국 유민 의식은 삼한일통 의식을 압도한다.
432 2016-02-15 21:41:55 0
[새창]
연개소문이 무릎을 꿇는다고 해서 고구려의 존립이 보장되는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영류왕 7년기 상황을 보면 이미 고구려 정벌론이 대두된 상황이었고, 이미 연개소문 집권이전에 당은 고구려를 염탐했었고, 고구려도 당에 대항한 축성작업을 계속하는 상황이었습니다.

---
그러나 당 내부에서는 일찍부터 고구려에 대한 臣屬 또는 정벌론이 대두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당 고조 7년(고구려 영류왕 7년 ; 624)에 고조는, 고구려가 수에 稱臣했지만 끝내 수양제를 거역하였으므로 굳이 칭신을 강요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수의 遺臣으로 당시 侍中이었던 裵矩와 中書侍郞 溫彦博이 반론을 폈다. 周代에는 箕子國에 봉해졌었고 漢代에는 玄菟郡이었으며 魏晋 이전까지는 封域에서 가까이 있었으니 고구려가 칭신하지 않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된다고 항변함으로써 고조도 이를 수긍했던 것이다.

결국 당을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를 재편하려는 패권주의의 지향에 있어서는 당도 수와 다를 바 없었으며 이런 주장은 唐帝를 둘러싼 측근세력일수록 강했다고 보인다. 그리고 고구려가 칭신하여 藩禮를 행하지 않으면 四夷를 지배할 수 없기 때문에 정벌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이런 가운데 고구려는 영류왕 23년(640)에 世子 桓權을 入唐시켰다.
이는 당의 평화공세가 영향을 미친 증거인지 모르나 고구려는 평화공존의 뜻을 당에게 충분히 보여준 것이며 외교적 성의를 다했던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은 職方郞中 陳大德을 파견했는데, 그는 고구려의 地勢와 방어체제를 샅샅이 살피고 돌아갔다. 그가 고구려 경내를 순방할 때 가는 곳마다 고구려 관리들을 물화로 매수하여 어디든지 마음대로 볼 수 있어 虛實을 살폈지만 고구려는 이를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고구려 지도에 따른 실사를 마친 셈일 것이다. 더욱이 그가 돌아가 당 태종에게 보고하자, 태종은 수륙양면 작전에 의하여 고구려 정벌의 뜻을 피력하기에 이르렀다.

이같이 당의 평화를 가장한 문화적 기미정책 속에, 고구려도 對唐敵對意識이 높아져 그 대비책이 강구되었을 것이다.
이미 영양왕 말기부터 축조하기 시작했던 千里長城이 16년 만인 영류왕 14년(631)에 완성되어 동북의 扶餘城으로부터 서남의 바다에 이르렀다.

이 장성은 수와의 전쟁을 마치고 착공된 점과 그 축조의 위치로 보아 당의 침입을 방어하여 국가를 수호할 목적이었음이 확실하다.
또한 수와의 전쟁 중 훼손되었던 요동지방의 성벽을 재축조하고 병력과 민호를 충원하여 수비를 강화했을 것은 능히 추측되는 바이다.
431 2016-02-15 21:23:37 0
고려 태조의 북방개척 - 1 [새창]
2016/02/15 21:09:34
아니요. 여진족이 차지하고 있었죠.
430 2016-02-15 21:22:11 0
[새창]
이제는 양국이 서로 상대방의 사신을 위협하고 벌할 만큼 대립이 날카로워지면서 외교적 타협은 결렬되었다.
그 동안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까지도 고구려의 독자성이 유지되는 한 전쟁만은 피하려는 외교적 노력을 하였으나 당이 전쟁을 택한 것이다.

이것이 고구려의 대당외교가 이전의 대수외교와 다른 점이다.
429 2016-02-15 21:21:23 0
[새창]
연개소문의 태도는 단지 명분을 주었을뿐, 연개소문이 집권하기 훨씬전에 이미 당의 대고구려정책이 결정되었습니다.
영류왕7년무렵에 당의 태도가 분명해진 반면에 연개소문의 쿠테타는 영류왕25년에 있었습니다.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nh_005_0040_0020_0010
그런데 문제는 이런 政情이 대당정책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는 점이다.
연개소문이 비록 대외강경파로 알려졌지만, 그도 대당전쟁만은 피해보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즉 이미 앞에서 말한 도교 수입도 그 예이지만 보장왕 3년(644)에는 연개소문이 당에 白金을 보내고 또 관리 50명을 보내어 宿衛케 할 뜻을 전하였다.
그러나 당은 이를 거부하고, 신하로서 임금을 죽였다는 점을 들어 연개소문을 비난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연개소문은 자기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강경한 대외정책이 불가피하였고 당에서는 고구려의 政亂을 침략의 기회로 활용하게 되었다.

당의 대고구려정책은 이미 영류왕 7년(624)에 분명해졌지만,
428 2016-02-15 15:32:16 43
“이거 걔 몸매 아냐!” 설현 대역 모델 페북글 논란 [새창]
2016/02/14 16:41:40
대역모델은 해당 프로젝트가 본인이 한거라고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는 NDA(비밀유지각서)를 씁니다.
계약위반이고 직업윤리가 없는 겁니다.

강동원이나 장동건 액션대역이 누군지 아세요? 그 분들은 바보라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강동원이나 장동건 대역이라고 안올리까요?
427 2016-02-15 15:20:25 1
이완용 관뚜껑의 행방... [새창]
2016/02/15 09:53:41
민족정기고양을 위한 친일매국사학계 정화를 원하신다면 죽은지 30년가까이 되서 해골이 다된 양반을 깔게 아니라,
송호정(홍산문화와 고조선간의 상관관계가 낮다는 얘기를 하는)이나 오영찬(낙랑군 재평양설을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하는)을 까던지
아님 이영훈이나 김낙년(뉴라이트의 기반연구가 나온 낙성대연구소 이사들)을 까던지
그도 아님 죽은지 10년정도 되지만 사실상 그 양반 영향력이 이병도보다 크다고 할수 있는 이기백같은 양반을 까야 뭔가 반향이 옵니다.

맨날 이병도타령만 하니까 사람들이 다 정신X자로 볼밖에요.
426 2016-02-15 13:37:40 0
달착륙 음모론 재현실험(디스커버리 채널) [새창]
2016/02/14 19:32:00
지구를 관통하면 42분간 무중력상태를 만들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무"중력이지 "6분의1"중력은 아니구요.
사실 지구를 관통할 기술이면 달까지 우주여행은 훨씬 쉽죠.
지각하 압력과 열이라는건 우주의 저온과 저압과는 비교도 안되니까요.
425 2016-02-15 13:36:04 0
달착륙 음모론 재현실험(디스커버리 채널) [새창]
2016/02/14 19:32:00
무중력상태는 재현가능해요. 다만 6분의 1중력 재현이 불가능하죠.
그리고 지구상에서 재현되는 무중력상태는 항공기 자유낙하로 만들어지는데 재현시간이 최대 1분이 안됩니다.
달착륙 영상를 보면 분명 1분은 훨씬 넘죠.
http://scienceon.hani.co.kr/268697
424 2016-02-14 23:31:07 7
[N] "정부 믿고 10년 투자해 숙련공 키웠는데..다 잃게 됐다" [새창]
2016/02/14 15:46:25
2013년에 대통령께서 하신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남북합의서를 믿은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죠.
참고로 당시 대통령과 지금 대통령은 같은 분입니다.
http://www.voakorea.com/content/article/1729410.html
남과 북은 통행 제한 및 근로자 철수 등에 의한 개성공단 중단사태가 재발되지 않도록 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정세의 영향을 받음이 없이 남측 인원의 안정적 통행, 북측 근로자의 정상 출근, 기업재산의 보호 등 공단의 정상적 운영을 보장한다.
423 2016-02-14 21:23:21 9
[N] "정부 믿고 10년 투자해 숙련공 키웠는데..다 잃게 됐다" [새창]
2016/02/14 15:46:25
2013년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남북합의서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정세의 영향을 받음이 없이"라고 적어논 남북합의는 그냥 거짓말인가요.
아니면 저 어떠한 경우에는 핵개발은 제외라고 부칙이라도 달았나요.

약속은 약속이고, 나라의 약속은 천금보다 더 무거운 것입니다.
http://www.voakorea.com/content/article/1729410.html
남과 북은 통행 제한 및 근로자 철수 등에 의한 개성공단 중단사태가 재발되지 않도록 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정세의 영향을 받음이 없이 남측 인원의 안정적 통행, 북측 근로자의 정상 출근, 기업재산의 보호 등 공단의 정상적 운영을 보장한다.
422 2016-02-14 20:30:48 9
[N] "정부 믿고 10년 투자해 숙련공 키웠는데..다 잃게 됐다" [새창]
2016/02/14 15:46:25
번거로워서 가입을 안한게 아니라 담보내용때문에 가입안한겁니다.
보험금도 비용인데 보장내용이 빈약한 보험에 들 동기가 입주기업들에 부족한거죠.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2/12/2016021202262.html?related_all
그러나 실상 이 보험은 초기 투자자산만을 보상할 뿐, 영업손실을 보상하지 않아 실효성이 미약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협보험 도입 당시 통일부 용역에 참여했던 신동호 상명대 교수는 “경협보험이 실절적인 도움이 되려면 영업손실 보상 내용이 반드시 포함돼야만 한다. 한정된 기금을 운용하는 정부가 알면서도 손대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경협보험은 가입 당시 회계장부에 적힌 투자 자산만 보상된다.

유형적인 피해의 90%, 최대 70억원이 보상한도다.
영업손실에 대한 보상이 없다보니, 보험금 지급을 위한 대규모의 심사가 필요 없다.
바이어와의 계약파기 등 무형적 손실도 보상대상이 아니다.
420 2016-02-14 19:14:01 0
(스압) 영구채 발행 기업, 액수로 알아보는 영구채, 발행 기업들의 상황 [새창]
2016/02/14 04:03:00
SKT랑 현대오일뱅크(S-Oil)는 좀 의왼데요. 둘다 현금흐름도 좋고 업황도 나쁘지 않은 기업들인데, 왜 영구채를 발행했을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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