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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 2016-02-13 14:10:41 3
최우의 강화도 천도 [새창]
2016/02/13 12:24:13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nh&setId=94429&position=11
전근대사회에서 국왕정권이 정통성이 있고 무신정권은 사익을 추구한다는 구분자체가 큰 의미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2가지 측면에서 이 결정이 여론을 반영한것도 피치자의 안전을 위한것도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상황에서 이 결정이 최우의 사익을 위한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첫번째로 당시 조정과 막부의 다수는 천도를 반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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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추회의에서 공식적으로 논의된 천도문제는 계속된 논의에도 불구하고 결론을 보지 못하고 회의만 거듭되었다.
이처럼 천도논의가 난관에 처하게 된 것은 반대론이 절대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이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최우는 자신의 저택에서 직접 회의를 주관하는 방법을 택하게 되었는데, 이는 집정자 최우가 천도론을 확정하고자 한 명백한 의도에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에서도 여전히 반대론은 제기되고 있다.

당시 상하의 일반적 여론이 전쟁을 전제로 한 천도보다는 개경에서의 계속적인 안착을 바라는 것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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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가 직접 저택에서 회의를 주관하는 위압적인 방법을 썼는데도 불구하고 조정과 막부의 여론은 반대론이 다수였습니다.

유승단의 상소에도 이는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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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단이 홀로 말하기를‘小로써 大를 섬김이 옳은 것인데, 섬김을 禮로써 하고 사귐을 信으로써 하면 저희가 또한 무슨 명목으로 우리를 곤욕케 하리요. 성곽과 宗社를 버리고 섬에 숨어 엎드려 구차히 세일을 보내면서 백성으로 하여금 壯丁은 다 살상당하고 老弱을 포로로 끌려가게 함은 국가를 위하여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高麗史≫권 102, 列傳 15, 兪升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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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로 강화천도의 결정과 함께 대규모의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이는 천도가 기층민중의 안위를 국가가 저버린 행위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강화천도이후 중앙정권이 육상의 백성보호를 위해 한 일이란 사실상 없었습니다.
http://www.imhc.mil.kr/user/imhc/upload/pblictn/PBLICTNEBOOK_201307010541125980.pdf
몽골 전쟁 기간 중에도 하층민의 봉기는 끊이지 않았다 몽골 전쟁 초기에 하층민들은 적극적으로 정부에 협조해 관군과 함께 전쟁에 참여하지만 1232년 고려 조정이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하자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다.

농민이나 천민 입장에서 강화도 천도란 본토 백성에 대한 통치 및 보호를포기하겠다는 것으로 비쳐졌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몽골전쟁 기간중에 무인 정권은 몽골군의 침입과 농민봉기라는 두 개의 난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403 2016-02-13 00:55:30 0
[새창]
박창화 본인은 화랑세기이외에 다른 저작들을 필사했다는 주장을 한적이 전혀 없는데 그걸 본사람들이 필사했을거라고 추측한것일뿐입니다.
402 2016-02-12 23:51:54 1
우리 나라 역사 푸념글 [새창]
2016/02/12 23:19:08
당한역사로 치면 아시아 모든 국가와 중앙/남부 아메리카, 동유럽 상당수 국가(발트삼국을 포함해서 우크라이나,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등) 및 서유럽의 아일랜드, 스코틀랜드도 만만치 않습니다. 오늘날 선진국인 독일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30년전쟁같은 비참했던 역사가 있습니다. 프랑스조차 백년전쟁에서 영국에 처참하게 당했죠.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수십년을 싸웠고 결국 국토남단을 내줬습니다(오늘날 벨기에). 잉글랜드도 초기에 바이킹에 심하게 당했고, 중간에 결국 바이킹왕조에게 나라까지 뺐겼습니다. 아프리카나 중동지역은 말할 필요도 없죠.

결과적으로 미국과 캐나다 정도를 제외하면 다른 나라로부터 침략으로 인해 심각하게 데인 역사가 없는 나라는 사실 없습니다.
역사를 봤을때 한국이 특별히 남들에게 심하게 데인 나라라고는 생각이 안되요.
401 2016-02-12 23:28:54 1
[새창]
월간조선과 했다던 최태영의 인터뷰내용에도 나옵니다.

친일 행적이야 어쨌든 이병도의 업적과 권위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인데 최옹의 주장에 순순히 승복했다는 것이 잘 믿어지지 않는다.
"내가 자료를 갖다주면 이병도가 미심쩍어하면서도 그걸 읽습니다.『환단고기』같은 책이면 거들떠도 안 봤겠지만 대개가 일본에서 나온 자료이고 일본인들이 쓴 글이니까 읽는 겁니다. 그리곤 나랑 토론하자고 졸랐습니다. 3년을 따라다니면서 그렇게 했더니 결국 그의 생각이 돌아서더군요."

최태영도 분명히 말했습니다. "환단고기"같으면 거들떠도 안봤을거라고.
근데 위에 페이지에는 "환단고기"에 따르면이라고 나오네요.
400 2016-02-12 23:25:25 2
[새창]
그리고 이병도는 상고시대(삼국정립이전)라는 말을 쓴적이 없습니다.
이병도는 상대라고 해서 상대 제일기(한사군 설치이전), 제이기(한사군 설치이후), 제삼기(삼국의 정립) 이런표현을 썻죠.

저책의 삼국정립이전을 이병도는 상대 제삼기라고 불렀다는 거죠 ( 저책은 상고시대라고 쓰구요 )
게다가 고조선 열국시대같은 말도 쓴적이 없습니다.

이병도는 평생에 걸쳐 시대구분같은 프레임을 단 한번도 바꾼적이 없습니다.

http://www.dlibrary.go.kr/JavaClient/jsp/wonmun/full2.jsp?v_kw_str=%EA%B3%A0%EB%A0%A4%EC%9B%90&v_db=4&v_doc_no=23438&mode=1
한국상고사입문 목차 ( 여기는 저자에 최태영이 아예 없고 이병도라고 나옵니다 --; )
399 2016-02-12 23:20:36 0
[새창]
위의 수결이 최태영, 아래 수결이 이병도 인듯이 보이긴 하는데, 이것만 봐서 이병도가 사인했다고 단언하긴 어렵죠. 필적감정이라도 해봐야할듯.
아래가 이병도의 한자인데, 위의 수결로 이 한자가 맞는지는 식별이 어렵네요.

398 2016-02-12 22:58:26 0
[새창]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bchung&logNo=50109501291
월간조선 96년 12월 인용이랍니다.

그렇지만 1989년에 고려원에서 낸 『한국상고사입문』이란 책은 분명히 이병도와의 공저였다.
"내가 쓴 책인데 이병도가 책 머리말 하단에 사인만 하고 공저로 낸 거요. 그 사인은 내가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따져서 받아낸 항복문서와 같은 의미가 있소. 그가 방향전환 성명을 낼 때 둘이 동석한 자리에서 하기로 약속해놓고는 하루 앞당겨서 내가 없는 자리에서, 사인도 자기 혼자 해버렸소. 그래서 그 책의 내 사인도 사실은 이병도 글씨요."

이병도가 사인을 했다는 말은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내"가 썼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네요.
397 2016-02-12 22:41:29 0
(허핑턴펌)미국 군사 전문가 '북한에 사드는 무용지물' [새창]
2016/02/12 18:03:09
러시아의 토폴M의 경우 다탄두에 디코이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MD무력화 디자인).
폭발시키면 파편도 생기지만 탄두손상가능성도 있는데, 북한이 파편만 생기면서 탄두는 멀쩡하게 할수 있는 기술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러시아의 사례를 볼때 미사일에 다탄두를 탑재 & 디코이를 뿌리는게 오히려 더 쉬운 방법이 아닌가 합니다.
396 2016-02-12 22:05:44 3
이병도에 대한 세가지 오해 [새창]
2016/02/12 09:42:33
맺는말만 읽어도 이병도 까는 글이 아니네요. 결론을 안 읽으셨거나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고 계신듯 합니다.
매우 쉬운 식별법으로 "환빠"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글의 대부분은 이병도 까는글과 거리가 있습니다.

이병도의 ‘한국 고대사 연구’를 꼼꼼히 읽어본 필자는 이병도가 식민사학자인가 민족사학자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선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환빠들은 앞으로도 이병도를 계속 식민사학의 거두라 매도하며 우리나라 사학계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는 도구로 삼을것이고, 다만 한가지 참고로 알아둘 필요가 있어서 덧붙이는 사항은 오히려 486 지식인중엔 이병도의 역사관이 ‘너무 민족주의적’이라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는것 정도는 알아두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분명한 사실은 현재 우리나라 사학계가 아직도 이병도의 영향권하에 있다는것은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오히려 우리나라 사학계는 이병도보다는 이기백 교수의 영향권하에 보는것이 정확할것이다. 그리고 이병도 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달려온것 또한 지금까지 우리나라 사학계였다는 점도 분명히 알아두었으면 좋겠다
395 2016-02-12 21:56:56 14
우리는 개성공당을 너무 모른다.jpg [새창]
2016/02/12 19:54:51
냉전시대 소련이 뭐에 무너졌는지 기억해야합니다.
미국의 군사력이 소련을 무너뜨린게 아니에요. 헐리우드 컨텐츠와 맥도날드 햄버거, 코카콜라때문에 소련이 무너졌어요.
시장경제와 자유가 북한사람의 마음을 통일로 이끄는거지 남한의 군사력과 경재 재제가 그렇게 하는게 아닙니다.
394 2016-02-12 21:35:22 1
[새창]
이병도가 89년에 사망했고, 그의 마지막 저작이 86년(90살)에 발표됐습니다.
고령임을 감안할때 86년이후 실질적 저작작업이 가능했을거라 보긴 어려운 상황이고, 저작이 나오지도 않았음을 감안할때
89년에 나온책에 "최근 발표한 바에 의하면"이라는 표현은 앞뒤가 안맞죠.
393 2016-02-12 20:51:13 0
[새창]
https://ko.wikipedia.org/wiki/%EC%B5%9C%ED%83%9C%EC%98%81
1989년에는 《한국 상고사 입문》을 출간하였는데, 이 책이 이병도와 공저한 것이라 주장하였으나 정작 해당 책에는 이병도가 저술한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최태영 저작이지 이병도 저작은 아닙니다. 이병도 평생의 어떤 저작에서도 한국상고사입문의 내용을 쓴 사례가 없습니다.
392 2016-02-12 20:26:52 1
[새창]
그리고 이후 삼별초가 폐퇴하면서 웅거하고 있던 섬의(제주도를 비롯한) 백성들이 특별히 그들을 지지했던 증거도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평가할때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주도권을 지키기위해 합법적 지배권을 가진 국왕에 반기를 든 사병집단 이상이 아닙니다.
그리고 난을 일으켜 백성들에게서 강제징발하며 기생했을 뿐 그걸 민족자긍심과 연결시킬 하등의 이유도 없구요.
( 백성의 안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 안위는 환도를 결정한 고려국왕쪽이 더 챙겼습니다 )
391 2016-02-12 20:23:15 1
[새창]
삼별초는 개경환도를 반대하던 집단이었고 기본적으로 최씨무신정권의 사병에서 나왔습니다. 그 출신자체는 그다지 아릅답지 않습니다.

개경으로 환도하려는 왕권파는 개경으로 돌아가 전쟁을 멈춰서 백성들에 대한 살육을 멈추어야 한다는 쪽이었고,
삼별초는 "고려의 자존심"을 위해 끝까지 몽고와 싸우자는 쪽이었죠(백성들이 죽던말던)

미군정기 민족의 자긍심고양이 최우선이었던 상황에서 삼별초의난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건 이해할수 있으나,
민중의 관점에서 본다면 삼별초의 탄생이나 이후의 행동은 아무런 명분도 실익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390 2016-02-12 20:16:06 0
[새창]
그래도 자세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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