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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9 2016-02-18 22:06:10 3
동양의 초상화들은 동 시대라도 기법이나 퀄리티가 너무 차이나는것 같아요 [새창]
2016/02/18 21:04:40
옹정제 그림은 어진이 아니고, 숭정제 그림도 명마지막 황제인 관계로 어진이 안남아 있습니다 ( 현대재현 )
어진(임금의 공식초상화)는 정해진 양식이 있습니다. 옹정제와 숭정제, 척계광을 제외하면 거의 유사한 양식이라고 느껴지실겁니다.

그리고 청대 강희, 옹정, 건륭 3황제는 어진을 서양화가를 고용하여 전통 동양화 기법(원근법이 배제된)이 아닌 서양화기법(사실주의)으로 그리게 했습니다.
그게 이전 명황제 어진과 청황제 어진이 확연히 다르게 보이는 이유입니다.
448 2016-02-18 20:52:12 1
북한 기갑부대, 일주일이면 부산까지 진격한다고? [새창]
2016/02/18 19:49:07
전력문제를 다 떠나서 북한군 기갑부대 훈련시간이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 1년에 3시간 남짓 )
아무리 전차가 좋으면 뭐합니까. 기동훈련도 안해보고 실탄사격도 안해본 기갑부대는 고철이나 다름 없습니다.
http://blog.donga.com/nambukstory/archives/54580
북한군 탱크병들이 탱크를 가지고 훈련한 것은 1년에 10시간도 채 안 될 것이다. 이마저도 탱크의 정비가 끝난 뒤에 문제가 없는지 잠깐 발동(시동) 걸어보는 시간까지 포함시킨 것이다.

순수하게 발동을 걸고 움직이는 시간만 계산한다면 3시간 정도 밖에 안 될 것이다. 외부에 나가서 기동훈련 하는 것은 아무리 길어봤자 4km 정도다.

또한 군복무 10~12년 동안 기동훈련에 한 번도 참가하지 못 하는 운전수가 수두룩한 실정이다.

장거리 기동훈련을 할 때는 여단 탱크가 모두 동원되는데, 운전 경험이 너무 없다 보니까 사고가 많이 발생한다. 예를 들면 다리를 건너가다 전복되어 운전병들이 죽는다던지, 길을 가다가 차와 충돌한다든지 하는 일들이다. 탱크는 멀쩡하지만 차가 만신창이 되고 차운전수가 죽는 등 그런 일들이 많다.

북한군 탱크부대에서 웬만해서 포탄 실탄사격은 하지 않는다. 기동훈련 때 조차도 포탄 실탄사격은 하지 않는다. 105탱크여단도 김정일 또는 김정은이 왔을 때만 어쩌다 한 번 쏴보는 정도였다. 때문에 군복무 10년 동안 한 번도 포탄사격을 해보지 못하고 제대하는 병사들도 있다.

북한군 훈련시간이 적은건 이미 미군도 공식적으로 확인해준바 있습니다.
http://nk.joins.com/news/view.asp?aid=2539272

447 2016-02-17 13:32:43 0
법게에도 올렸는데..역게에도 질문드립니다. [새창]
2016/02/17 12:55:17
http://www2.assemblee-nationale.fr/langues/welcome-to-the-english-website-of-the-french-national-assembly
58년에 마지막으로 수정된 프랑스 헌법 전문입니다. 만약 특정가문출신의 사람이 대통령에 오를수 없는 조항이 있다면 이는 헌법 1조 위헌입니다.
한국의 경우도 헌법이나 법률에 특정인을 지정해 공무담임권을 막는다고 하면 이 역시 명백한 위헌이 됩니다.
헌법수정하기전에 불가능한 얘기입니다.

Article 1.

France shall be an indivisible, secular, democratic and social Republic. It shall ensure the equality of all citizens before the law, without distinction of origin, race or religion. It shall respect all beliefs. It shall be organised on a decentralised basis.
프랑스는 단일하고 세속적이며 민주적인 사회공화국이다.
프랑스는 법 앞에 모든 시민의 평등을 보장한다, 종족이나 종교, "출신에 따른 차별"없이
프랑스는 모든 믿음(종교)를 존중한다.
프랑스는 지방자치적 기반에 따라 조직되어진다.
446 2016-02-16 23:33:40 0
조선사편수회 조선사가 사료집이라는 이유 [새창]
2016/02/16 18:48:29
조선사 편수회 조선사가 사료모음집이상이라는 것을 안다고 말씀하셨으니 주장에 대한 근거를 보고 싶습니다.
내용을 아신다고 하시니 원문 이미지도 모두 공개되어있는데 충분한 근거 제시가 가능하시리라 봅니다.

저도 사료모음집 이상이라는 주장을 믿고 싶습니다.
445 2016-02-16 23:32:09 0
조선사편수회 조선사가 사료집이라는 이유 [새창]
2016/02/16 18:48:29
고려사는 이런식으로 집필이 되었으니까요. 2~3줄마 간격으로 원사료 인용처를 밝힌 역사서가 아닙니다.

444 2016-02-16 22:51:34 1
백제의 첫수도가 천안시 직산이라는 내용의 다큐 [새창]
2016/02/16 22:25:34
안성천 사진입니다.

443 2016-02-16 22:51:12 0
백제의 첫수도가 천안시 직산이라는 내용의 다큐 [새창]
2016/02/16 22:25:34
천안시의 위례산성 연대조사결과를 뒤짚을수 있는게 있다면 다시 검토할 만한 학설입니다만.
안성천을 한수로 비정하는 것도 사실 납득은 어렵구요. 안성천은 큰물이 될만한 커다란 하천이 아니거든요 --;
442 2016-02-16 22:45:41 2
백제의 첫수도가 천안시 직산이라는 내용의 다큐 [새창]
2016/02/16 22:25:34
삼국유사,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함,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그런 기록이 나오긴 합니디만, 2가지 쟁점이 있습니다.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4&cp_code=rp0703&index_id=rp07031578&content_id=rp070315780001&print=Y
『삼국유사』 왕력에는 백제가 처음 도읍한 위례성을 지금(고려)의 직산이라 하였고, 『삼국유사』 권2 기이2 남부여전백제(南扶餘前百濟)조의 부여군(扶餘郡)에 대한 세주(細註)에도 “위례는 지금의 직산이다(慰禮 今稷山)”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高麗史)』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그리고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에도 직산이 본래 위례성이며 백제 시조(始祖) 온조왕(溫祚王)이 나라를 열고 도읍을 세웠던 곳이라고 하여, 『삼국유사』와 같은 전승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는 한강유역과 가깝다는 삼국사기의 기록때문인데, 현재 주류설은 과거 한수의 위치를 현재 한강으로 비정하기 때문에 위례-직산설이 부정되고 있습니다. 반면 천안 향토사학자분들은 한수가 고대어 큰물의 음차로 한강이 아니라 안성천이 될수도 있다고 주장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백제의 첫 도읍지인 위례성은 직산 지역이 아니라 한강유역에 있었던 것이라 이해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삼국사기』에는 그러한 기록이 보이지 않고 “위례성”의 명칭을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은 「강역고(疆域考)」에서 『삼국사기』의 위례성 관련 기록과 직산의 위치를 비교하여 위례성이 직산이 될 수 없음을 논증한 바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위례성은 한수(漢水) 즉 한강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직산은 이곳과 너무 멀다는 것이 그 대표적인 이유이다.

그리하여 현재는 백제의 첫 도읍지 위례성이 직산에 있었다는 설을 따르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위례성은 한강 유역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둘째는 천안시에 남아있는 위례산성의 연대조사결과 4세기 이상으로 올라갈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위례성은 기원전 18년부터 기원후 475년사이에 백제수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말입니다. 아직 천안 향토사학계에서는 이 연대조사결과를 부정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 충남 천안시 북면 운룡리에 남아 있는 위례산성에 대해서는 1989년부터 4차례 시굴 및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바 있다. 이에 따르면 위례산성 초축(初築) 연대의 상한은 4세기 이전으로 올라갈 수 없다고 한다.(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소, 1997)
441 2016-02-16 19:05:34 1
kbs역사스페셜-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라 [새창]
2016/02/16 12:02:39
1. 고조선 시조인 단군을 역사적 인물로 인정하느냐 : 역사적 사료와 유물의 부족으로 인해 역사로 인정안함
2. 임나일본부의 실체주장
3. 조선 당쟁의 당파성 강조
한사군 재평양설때문에 왜곡이라고 주장하는 분들도 계신데 이 문제는 유물과 유적때문에 정리가 끝난문제로 왜곡이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임나일본부를 주장한 것과 조선당쟁을 민족적기질에 의한 것이라고 기술하는 정도를 제외하면 없습니다.
440 2016-02-15 23:57:08 0
고려 태조의 북방개척 - 1 [새창]
2016/02/15 21:09:34
신라 현덕왕대 대동강 남쪽 지역에 설치한 3개 군현이 북방진출 한계선이었습니다.
하대에 가장먼저 지방호족으로 분화한곳이 패강진 인근세력이었던 만큼, 그 너머는 말할필요도 없죠.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nh_011_0030_0020_0020
패강진은 이전의 북변 수비의 중심이었던 大谷城을 승격시키면서 民戶를 이주시켜 군진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한 것이다. 신라가 당으로부터 대동강 이남의 땅에 대한 영유권을 정식으로 인정받은 것은 聖德王 34년(735)이었다. 이후 예성강 이북으로부터 대동강 이남의 지역, 즉 패서지역의 개척이 시작되었다. 景德王 7년(748)에 예성강 일대에 4개 군현을 설치하고, 이어 경덕왕 21년에 그 북쪽 지방에 6개 군현을 증설하였다. 헌덕왕대에 다시 북방으로 진출하여 대동강의 남쪽 지역에 3개 군현을 설치하였다.

 이와 같이 浿西地域의 개척이 상당히 진행된 이후에 패강진이 설치되었다. 패강진은 예성강 이북으로 진출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북변 방어의 관문인 平山에 위치하였다. 이러한 패강진은 예성강 이북 대동강 이남의 광범위한 지역의 군사적 임무를 담당하였다. 패강진은 신라의 서북 변경지대의 방어를 담당하는 국경 수비의 本營이었다.

신라 하대에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었을 때 패강진 지역은 경주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변경지역이었으므로 맨먼저 중앙정부의 지배나 통제로부터 벗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 만큼 이 지역에서는 중앙정부의 수탈이 비교적 적었을 것이다. 이에 당시의 많은 유민들이 이 곳으로 들어와 둔전병적 개척농민이 되어 농지를 개간하였을 것이다. 또한 패강진 지역은 당시 해상무역의 중요 거점인 예성강 하구 지대와 인접되어 있었으므로 해상세력과도 연결될 수 있는 곳이었다. 요컨대 이 지역은 경제적 활력이 넘치고, 신흥 지방세력이 대두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흥덕왕대의 일련의 개혁이 실패하고, 이어 왕위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어가자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에 따라 9세기 후반에는 지방에서 호족세력이 활발하게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패강진 지역에서 등장한 호족들은 대체로 패강진의 군사적 조직을 통하여 성장한 세력이었다고 추측된다.
439 2016-02-15 23:40:38 0
고려 태조의 북방개척 - 1 [새창]
2016/02/15 21:09:34
신라하대이후 조정의 지역장악력이 현저히 떨어지면서 이루어졌던 지방토호의 한 부류라고 봅니다.
폐허가 되었다고 해도 평양이라는 지명이 가지는 상징성이 있으니, 평양성주를 칭하는건 의미가 있으리라 봅니다.
http://db.history.go.kr/KOREA/item/level.do?itemId=kr&bookId=%E4%B8%96%E5%AE%B6&types=r#detail/kr_001r_0020_0040_0060
고려사 권1, 세가 권제1, 태조 원년 9월의 기사입니다.

백성들을 평양으로 이주시키도록 지시하다
병신 여러 신하들에게 유시(諭示)하기를, “평양(平壤)은 옛 도읍으로 황폐한 지 비록 오래지만 터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가시덤불이 무성해 번인(蕃人)이 그 사이를 사냥하느라 옮겨 다니고 이로 인하여 변경 고을을 침략하니 그 피해가 매우 크다. 마땅히 백성을 이주시켜 그곳을 실하게 하여 변방을 튼튼하게 함으로써 백세(百世)의 이익이 되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평양을〉 대도호(大都護)로 삼고 사촌 동생[堂弟] 왕식렴(王式廉)과 광평시랑(廣評侍郞) 열평(列評)을 보내어 수비하게 하였다.
438 2016-02-15 23:35:24 0
고려 태조의 북방개척 - 1 [새창]
2016/02/15 21:09:34
계통상 관점(말갈의 경우 여진/만주족으로 이어지기때문에)으로 그렇게 부르는 것이고 시대구분을 명확히 원하신다면 구분의 의미가 있겠죠.
437 2016-02-15 23:28:52 0
조선의 관리에 관한 의문. [새창]
2016/02/15 23:17:50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nh_023_0020_0020_0010
양반이 차지하는 관직의 인원수도 정해져 있었다. 양반의 實職 총수는 5,605窠였다.
그 중 문반이 1,779과인데 京官職이 741과, 外官職이 1,038과이고, 무반직이 3,826과로서 경관직 3,324과, 외관직 502과이다.

그러나 5,605과 중에는 遞兒職 3,110과와 無祿官 95과가 포함되어 있어서 실제로 순수한 양반의 正職은 2,400과가 된다.
즉 문무 양반의 실질적인 정직수가 2,400과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2,400과 중에는 문반의 비율이 어떤가를≪경국대전≫에 근거하여 조사해 볼 때, 문반이 1,579과이고 무반이 821과로 나타나고 있다.

이를 경·외관별로 구분하면 경관직이 860과(문반 541과·무반 319과)이고 외관직이 1,540과(문반 1,038과·무반 502과)이다. 결국 당시에 선망이 되던 관직은 경관직 860과가 될 수 있다. 860과 중에는 132과의 兼官職이 포함되어 있어 이를 제외하면 순수한 경관 정직수는 728과(문반 466과·무반 262과)가 되며, 그 중에서도 문반직 466과가 모든 문반들이 가장 선망하는 자리가 되었던 것이다.
436 2016-02-15 23:06:35 1
[새창]
노명호 교수의 논지는 그것과 반대입니다. 민족주의적 관점의 ( 현대 한국인들이 바라보는 ) 삼한일통의식은 삼국시대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http://kyujanggak.snu.ac.kr/home/index.do?idx=04&siteCd=KYU&topMenuId=204&selectedId=258&targetId=490
다른 하나는 근대로 들어오면서 성립된 민족의식과 민족국가에 대한 개념을 고려시대를 이해하는 데 무의식중에 소급시키는 데 따른 부작용이다.
이 점은 국내의 연구자들만이 아니라 국외의 연구자들에서도 발견되는 문제이다.

후대의 관점에 편중되면 조선시대나 근현대와 근본적으로 다른 고려시대의 집단의식과 관련된 실상들이 捨象되기 쉽고 일부 포착된 사실들도 그 의미를 발견하기 어렵다.

조선시대의 시각, 근대의 시각에서의 검토도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인들의 관점과 시각에서도 문제를 찾고 검토하는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이 연구에서는 그러한 점에서 당시인들의 관점과 시각을 그 시대의 문제 속에서 찾고 그를 통해 당시 고려시대의 집단의식을 조망하려 하였다.
435 2016-02-15 22:53:41 14
오늘의 JTBC 팩트체크.jpg [새창]
2016/02/15 22:27:49
저 사람들이 생각이 없고 바보라서 핵무장론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실제 핵무장을 원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겁니다.
저런 얼토당토 않은 말을 하는 국회의원들 탓하기 전에 핵무장이 대한민국안보에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들 부터 생각을 재고해야 되요.
생각이 진짜 없는건 그분들이에요 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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