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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2016-02-14 19:05:27 47
“이거 걔 몸매 아냐!” 설현 대역 모델 페북글 논란 [새창]
2016/02/14 16:41:40
계약위반일뿐만 아니라 그쪽 업계에서 다시는 일 못하죠.
대역모델을 알바정도로 생각하는 분이나 할수 있는 짓이죠.
418 2016-02-14 18:46:12 203
“이거 걔 몸매 아냐!” 설현 대역 모델 페북글 논란 [새창]
2016/02/14 16:41:40
직업윤리가 전혀 없는 분이네요.
그게 억울하면 유명배우 스턴트맨들은 어떻게 산대요.
416 2016-02-14 17:20:59 3
우리나라는 조선시대때 왜이렇게 맥없이 무너졌을까요? [새창]
2016/02/14 09:12:19
수도가 함락당해서 나라가 존망의 위기까지 갔던게 과거부터 여러차례 있습니다.
고구려도 그랬고, 고려도 그랬습니다.
사실 신라도 백제에게 수도방어관문인 대야성을 뺏기면서 존망위기에 처했었습니다.

중원역시 별반 안다릅니다. 이민족이 중원을 통째로 들어먹은 횟수가 대체 얼마던가요 ( 5 호 16국, 금나라, 요나라, 원나라, 청나라 )
비교사 관점에서 보면 조선이 특별히 멍청하거나 약했다고 말을 못하겠습니다.
415 2016-02-14 17:02:50 2
막스 베버의 자본주의론은 어디까지 의미가 있을가요? [새창]
2016/02/14 11:11:42
교회가 엄청난 헌금을 받아 그걸 가난한 사람들에게 쓰지 않는다고 하면 교회를 비난하면 될일이지 그 종교의 시초인 예수를 비난할 일은 아닌것과 같죠.
분명히 시초가 되시는 분은 그렇게 하지말라고 했고 그렇지 않게 살았으니까요.

칼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이 한 말과 행동은 한국의 주류 칼뱅주의를 해석자들의 말과는 매우 다릅니다.
언급을 보시면 알겠지만, 돈많은게 선이다같은 주장을 암시할수 있는 그 어떤 말도 행동도 한바 없습니다.
414 2016-02-14 16:57:33 2
막스 베버의 자본주의론은 어디까지 의미가 있을가요? [새창]
2016/02/14 11:11:42
교리논쟁이 필요한 부분은 아닙니다. 칼뱅주의 골자인 예정설과 절대자 만사개입을 부정하는것도 아니구요.

다만 칼뱅본인이 경제적정의나 노동에 대해 직접 한말과 행동이 있으니까요. 칼뱅은 제네바 종합구빈원 설치에도 주도적으로 깊이 관여했습니다.
예정설과 절대자 만사개입을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던 그건 개별인의 자유이나, 칼뱅 본인의 말과 행동을 부정할순 없죠.
아래 언급은 모두 논문작성자의 해석이 아닌 칼뱅이 직접 한말입니다.
http://www.kirs.kr/data/calvin/calvin_h28.pdf
1. 부자의 의무에 대한 언급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 그의 필요이상으로 주실 때에는 하나님께서는 그를 거기에서 하나님의 사람인 것처럼 세우셨다.그리고 “선을 행하는 것은 나의
특별한 성품이다.

왜냐하면 모든 선한 것들이 나로부터 나가기 때문이다. 나는 이땅을 풍성하게 창조하였다. 그 과실을 맺도록 창조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에게 그의 직분을 주실 때 하나님은 나를 그의 대행자인 것처럼 세우신다. 그리고 그 영예의 본질은 무엇인가?모든 부자들은 선을 행할 것이 있을 때에 그들은 거기에서 하나님의 대행자로 있는 것이며 그리고 그들의 성품이 그러한 것처럼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수행하는데 그들의 이웃들이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2. 임금착취에 대한 언급
그들은 그들에게 대가를 주지 않고 노동을 요구하고 강탈함으로서 그들의 이웃에게 사악한 일을 행한다.
여기에서 참으로 선지자는 한 종류의 불의를 언급한다.
그러나 권력자들이 얼마나 불의하고 사악하게 다스렸는지 그것은 쉽게 결론 내려진다.
왜냐하면 그들은 집과 궁궐을 짓는데 그들의 이웃을 마치 노예처럼 고용하며,또한 그들의 임금을 지불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으로부터 생계를 유지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노동의 열매를 빼앗는 것보다 더 잔인한 것은 없다.
참으로,율법에 명한바 된 것처럼,노동자의 임금은 체불되어서는 안되는데(레위기 19:13)
왜냐하면 그것은 그를 죽이는 것과도 같기 때문이다.
강도가 사람을 죽일 때에 그가 노리는 것은 노략물이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의 노동을 착취하는 사람은 말하자면 그의 피를 팔아 마시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를 벌거벗고 궁핍하게 내어버린다.
바로 이것이 그를 죽이는 폭력보다 더 흉악한 것이다

3. 채무자에 대한 보호
채권자는 자신의 기쁨을 위한 담보를 잡기 위해 생활용기들 중에서 골라잡거나 집을 샅샅이 뒤져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만약 이 방법이 탐욕스런 부자들에게 주어진다면,그들은 인정사정보지 않을 것이며,모든 것을 취할 것이고,특히 가장 좋은 것을 취할 것인데,가난한 자들의 가장 내부까지 공격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혹은 달리해서 이것저것들을 경멸적으로 거절함으로써 그들은 그들에 게 도움을 청하러 온 사람들을 수치로 채울 것이다
413 2016-02-14 16:13:50 3
우리나라는 조선시대때 왜이렇게 맥없이 무너졌을까요? [새창]
2016/02/14 09:12:19
그 홍건적과 왜구, 원나라군벌(나하추)의 군사력이 그리 작지도 약하지도 않았습니다.

1. 홍건적, 1차 침공때 4만, 2차 침공때 10만, 2차침공때 동원된 고려군이 20만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nh&setId=196310&position=1
그러나 반원정책의 천명과 더불어 힘차게 출발한 중흥정책은 동왕 8년 12월과 10년 10월 紅頭賊의 두 차례에 걸친 침공으로 인해 송두리채 무너지고 말았다. 제1차의 침구는 平章 毛居敬이 4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옴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들은 서경을 함락시키는 등 한때 세력을 크게 떨쳤으나 안우·이방실 등이 咸從에서 싸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적병 2만 급을 참하고 僞元帥 沈刺·黃志善을 포로로 잡게 되자 그들은 압록강을 건너 도주하고 말았다.

 이렇듯 1차 침공 때에는 적이 서북면을 넘지 못하고 우리 장수들의 전공으로 다행히 물리칠 수 있었으나, 2차 침공 때에는 僞平章 潘城·沙劉·關先生·朱元帥 등이 10여 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왔다. 그리하여 이 해 11월 하순 결국 개경이 함락되고 말았다. 공민왕은 할 수 없이 福州(安東)로 피난하였으나 홍건족이 개경에 머물고 있던 50여 일간의 잔학행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참혹하였다.

 개경에서 뿐 아니라 그들이 지나온 개경 이북의 성읍과 전야의 피해도 대단히 심각하였는데, 이에 고려에서는 군대를 다시 정비하여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삼고 안우·이방실·최영 등의 여러 장수로 하여금 20만 군을 인솔하게 하여 다음해 정월 4면으로 개경에 진격하여 적을 대파하고 관선생·사유 등을 잡아 죽였다. 그러자 적세는 크게 꺾여 破頭潘은 나머지 무리를 거느리고 허겁지겁 압록강을 넘어 달아나 버렸다

2. 왜구, 공민왕/우왕기에 200~400여척규모의 침입만 5차례 ( 병력으로 치면 6천~1만 2천규모 ). 단순한 도적때로 간주하기는 어려움.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nh_020_0030_0040_0020_0010
침입한 왜구의 인원수에 대하여 살펴보면 공민왕 13년(1387) 5월에 왜적 3,000을 진해현에서 대파한 기록이 보이며 우왕 5년(1379) 5월에는 騎 700·步 2,000의 침구가 있었고, 도적이 많으면 千百으로 떼를 짓고, 적으면 什伍로 隊를 지어 다닌다고 하였다.

이러한 규모로 미루어 볼 때 왜구는 단순한 해적의 오합지졸이 아니고 배후에는 유력한 土豪가 있어 직접 조종하였다고 할 수 있다. 즉 대표적인 조종자는 대마도주 宗氏와 壹岐島主 志佐氏·西部日本의 巨酋 周防의 大內氏·九州豊後 大友氏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시기 왜구는 숫자로만 판단할수 없습니다. 명나라가 입을 피해를 보면 알수 있죠.
그래서 진법까지 새로개발했지. 단지 "도적때"를 잡기위해서 말입니다.
http://www.sciencetimes.co.kr/?news=039%EB%AA%A8%EC%84%B8%EC%9D%98-%EA%B8%B0%EC%A0%81039-%EC%9D%B4%EC%9A%A9%ED%95%9C-%EC%B2%99%EA%B3%84%EA%B4%91%EC%9D%98-%EC%99%9C%EA%B5%AC-%ED%86%A0%EB%B2%8C
1553년 8월 왜구들이 절강성의 상우현에 상륙해 벌인 참극은 처참했다.
이들은 무자비한 살육을 감행했고, 항주에서 절강 서쪽을 지나 안휘성 남쪽을 짓밟은 다음 남경에 육박했다.
그 후 또다시 표양·무석·소주 등지에 상륙해 절강·안휘·강소의 3성을 짓밟으면서 80여 일에 걸쳐 4천명 이상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3. 나하추, 명군의 요동진입을 막을 정도의 군사력을 보유했고, 명은 진압을 위해 20만을 보냈습니다.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nh&setId=197109&position=6
명은 나하추를 공략하기 전에 먼저 압록강·佟佳江·輝發河 상류 일대를 경략하여 고려와의 연결을 차단시키는 한편, 원의 잔여세력과 여진 각 부를 초무하여 나하추를 고립시키는 일에 주력하였다. 우왕 13년(1387) 명 태조는 나하추를 일거에 섬멸시킬 목적으로 풍승으로 하여금 20만 대군을 이끌고 金山으로 육박시켰고, 도저히 대적할 수 없음을 안 나하추는 드디어 항복하고 말았다.

나하추의 세력이 강성하였을 때는 북으로 북원과 연결하고 남으로는 고려와도 교통하여 명군이 요동으로 진출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명군이 북원의 주력을 토벌하는 데도 측면의 위협이 되었다.
412 2016-02-14 15:11:51 3
막스 베버의 자본주의론은 어디까지 의미가 있을가요? [새창]
2016/02/14 11:11:42
칼뱅주의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입니다. 한국이 그렇게 오해를 하는 대표적인 나라구요.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4487
구원받은 사람은 만사가 형통하고 건강하며 경제적으로도 복 받는다는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유행하는 소위 '삼박자 복음'은 칼뱅의 가르침이 아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부하든 가난하든 경제적으로 청지기적인 삶을 살아야 하며 청지기적인 삶을 살지 못한다면 구원받지 못했다고 보는 게 칼뱅의 신학과 경제윤리다.

칼뱅이 가르친 신학과 경제윤리는 결코 인간이 노력해서 구원받거나 복 받는다는 '인과응보의 신학'이 아니다.
또 부를 많이 획득한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은 것이기 때문에 부가 구원의 증거라는 것도 칼뱅의 원래 가르침이 아니다.

칼뱅은 불행이나 가난에 처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냉대하시는 것이며 부와 건강에 처한 사람은 하나님이축복하시는 증거라고 보지 않았다.
칼뱅은 부와 번영, 건강이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라고 보지 않았으며 구원의 증거라고 보지도 않았다.
칼뱅이 가르친 것의 핵심은 전적인 은혜로 인한 구원과 구원 이후에 모든 영역에서 성화된 삶이다.
411 2016-02-14 14:41:45 1
삼별초의난은 민족적 항쟁인가 [새창]
2016/02/12 21:32:25
초기무신정권시절에도 문신은 여전히 무신보다 많았습니다.
이의방시절에도 정중부시절에도 경대승시절에도 여전히 그랬으니까요.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nh_018_0040_0020_0020
명종 원년 이의방이 집권한 후 무신세력이 확대되면서 문신의 출사로였던 외직에 무신이 임용되었는데, 이는 문신들의 출사로가 축소된 반면 무신들의 宦路의 폭이 확대된 것을 뜻한다. 또 명종 5년(1175)에는 이의방에서 정중부로 집권세력이 바뀌었지만 외직에 武散官을 채움으로써 문신들의 출사로는 더욱 축소되었다. 문신들의 사기가 위축되었을 것임은 당연하다.

 그러나 경대승집권기에 오면 그간 계속되었던 문신 탄압의 현상이 사라지게 되었다. 반정중부세력이었던 경대승은 문신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온건한 인물로서 유학을 존중하고 문신에 대해 비교적 호의적이었다. 이 기간에 주목되는 것은 지금까지 정권에서 소외되었거나 외면당하였던 문인들이 점차 과거에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상으로 초기 무신정권기에도 문신들이 무신보다 많이 관직을 제수받고 등용되었으나, 항상 무신들의 견제와 탄압으로 문신들의 정치활동은 위축된 상태가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410 2016-02-14 14:29:17 0
삼별초의난은 민족적 항쟁인가 [새창]
2016/02/12 21:32:25
미군정기의 역사교과서들이 삼별초의난 자체에 대한 기술을 아예 안했고, 그나마 했던 새국사교본(이병도)이나국사교본(진단학회)도 대단히 건조하게 기술한걸 보면 기술방향이 이후 바뀐건 맞는것 같습니다.
409 2016-02-13 23:01:47 0
[새창]
역으로 생각해서 굳이 강화도를 점령할 필요가 있었을런지 의문입니다.
이미 한반도 전체를 석권한 상태인데 그냥 강화도는 왕따시키고 전국에 다루가치 배치해서 식민통치했어도 별 상관이 없지 않았을까하는.
강화도는 육상에서 오는 조공끊어지면 어짜피 자동으로 항복할수 밖에 없는 상황이니
408 2016-02-13 22:52:19 3
드라마 장영실을 보면서 궁금한 점 질문 드려요. [새창]
2016/02/13 22:15:45
간의대의 경우 공개를 안한게 맞기는 하지만, 선조기까지 보수기록이 있고 이후 청이 중원을 차지한 효종기에도 관측기구인 혼천시계의 제작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이 대외공개를 꺼렸던 것을 볼때, 중국역시 대외공개를 회피했을것으로 보이기는 하나, 조선이 이 기술개발이나 활용에 있어 중원왕조의 제지를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nh_027_0020_0020_0030_0010
간의대는 세종 때에 창설된 이후 여러 번 보수되면서 조선의 중앙 천문관측대로서 서운관에 의하여 그 기능이 활발히 발휘되었으며, 끊임없는 관측이 조직적으로 계속되었다. 간의대는 매우 훌륭한 규모를 갖춘 웅장한 천문대였다. 관측활동도 높은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시설은 외국 사신들에게도 공개하지 않았을 뿐더러, 경회루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하므로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겠다는 논의가 있었을 정도로 공개되기를 꺼려했던 국가의 기밀 시설이었다. 이렇게 경복궁의 대간의대는 15∼16세기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천문대의 하나였다.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nh_027_0020_0020_0030_0020
세종 때의 혼천시계는 중종 21년(1526)에 수리되고 또 여벌의 혼천시계도 제작되었다. 명종 4년(1549) 정월에는 새 혼천시계가 만들어져서 홍문관에 설치되었다. 표준시계로서 그리고 천문교습을 위한 실험용의 기기로서 학자들의 기관에서 쓰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혼천시계들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는 효종 8년(1657)까지 100년 이상이나 새로이 만들어지지 못했다.
407 2016-02-13 16:56:27 0
우리 나라 역사 푸념글 [새창]
2016/02/12 23:19:08
유럽과 동아시아가 이부분에서 갈립니다만,
동아시아처럼 명분상 맹주를 인정하고, 평화를 얻을것인지
아니면 유럽처럼 계속되는 전쟁을 치루면서 평등한 관계를 유지할것인지

독일은 30년전쟁으로 국토가 수백개로 찢겨저서 사분오열된 비참한 시절이 있었고
프랑스는 100년전쟁의 고통이 있었고
잉글랜드는 바이킹에 통째로 나라가 넘어가기도 했었죠.
스코틀랜드는 사실상 700년가까이 계속 잉글랜드와 적대관계로 지냈고,
아일랜드가 잉글랜드에 당한건 끔찍할 지경이죠 ( 식량문제로 수백만이 아사하기도 했습니다 )
이탈리아도 수개의 독립공국으로 쪼개져 전쟁에 전쟁으로 세월을 보냈구요.
이런 긴전쟁(30년~100년) 말고도 유럽국가들은 수시로 전쟁했습니다.

국가의 존엄을 보전하는 측면에서라면야 유럽방식이 낫겠지만, 그 존엄이 누구를 위한것일까라는 측면에서는 동아시아쪽이 낫다고 봅니다.
그 존엄의 보전에 따른 희생의 감내는 결국 대다수의 기층민중이 하는거니까요.
406 2016-02-13 14:23:45 3
최우의 강화도 천도 [새창]
2016/02/13 12:24:13
요는 이것입니다.
대다수가 반대하며 피치자의 안위조차 보장할수 없는 그 "결정"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을 위한것이란 말이죠.
그 결정이 최우의 사익이 아닌 "대고려"를 위한 결정이었다 한들, 결과는 대고려를 위한것도 기층민중을 위한것도 아니었습니다.

최우의 머리속을 알수는 없으나, 그 결정이 최선을 위한것이었다 가정한다 해도 결과에 대한 책임은 결국 최고통수권자가 지는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최우와 최씨무신정권은 여몽전쟁의 참상에 대해 책임을 져야할 이유가 분명합니다.
405 2016-02-13 14:15:48 3
최우의 강화도 천도 [새창]
2016/02/13 12:24:13
천도이후 방어를 위한 적극적인 정책을 수행했으면 최우의 행동이 대의를 위한것이다었다는 주장에 어느정도 힘이 실리겠으나, 무신정권이 항몽기간중 한것이 없습니다. 전투행위들은 모두 지역차원의 자위행동이였을뿐 승패를 떠나 중앙이 조직하여 이루어낸 어떤 전투행위가 있었나요?

게다가 기간동안 강화도에서는 사치행위가 육상에서는 끊임없는 반란이 지속되었을 뿐입니다.
고조선시기부터 역사를 모두 봤을때 어느 정권이 30년 이상 피치자와 대부분의 영토를 적성국의 공격에 방치했을까요?
최씨 무신정권이외에는 누구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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