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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9 2016-03-19 13:34:21 0
평화시대는 왜 자꾸 조선에 대해 극단적인 비하글을 올리는가... [새창]
2016/03/19 11:24:34
뒷조사가 싫으면 트롤링안하면 됩니다.
나는 다른사람들이 싫어하는 글 올려도 되지만 다른사람들은 님 싫어하는글 올리면 안되나요?
508 2016-03-19 02:04:53 0
고구려사초 3대 대무신제기 1년~10년 [새창]
2016/03/18 23:59:28
정작 박창화 본인은 그거 사서필사라고 한번도 말한적없는데 다른사람들이 사서필사한거라고 주장.
507 2016-03-18 20:24:17 1
유교탈레반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 - 덧글 [새창]
2016/03/18 19:44:04
그럼 그렇게 글을 수정하셔야죠.
예송으로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후 당쟁이 예송의 영향권아래 있다하더라도 예송이 사람을 죽게 만든건 아닙니다.

그런 관점이면 애초에 붕당이 형성된 서인과 동인에게서 이후 당쟁의 부수적 희생자들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겠네요.
506 2016-03-18 20:21:02 1
유교탈레반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 - 덧글 [새창]
2016/03/18 19:44:04
예송논쟁의 본질은 효종의 정통성 문제입니다.
적자인 소현세자가 사망한후 원칙대로라면소현의 자식들이 대통을 이어야 하나 그렇지 못하고, 동생인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시작된 문제구요.

전근대시기 왕권의 정통성은 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정권의 정통성을 논하는것과 동일한 수준의 문제입니다.
민주주의 공화국에서도 정권의 정통성은 여당과 야당 모두가 사활을 걸고 논쟁해야 하는 이슈입니다.
( 정권의 선출방법, 여론의 지지, 헌법에 부합되는 정치행동 등등 )

당시 정치제제하에서 핵심적인 이슈에 대한 당파의 논전이 있었을뿐, 이는 비생산적인것도 쓸데없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505 2016-03-18 14:37:12 1
[새창]
제사와 조상신숭배는 이미 유학의 번성과 무관하게 민간에서 이루어지던 일이었습니다.
주희는 주자가례를 통해 이를 유학적 관점에서 정리하고자 한것이구요.
음사가 아닌 유학적 예법과 질서에 고래로 행해져오던 일상을 정리하고자 한것입니다.

따라서 조상과 선현에 대한 제사는 유학이 만들어낸것이 아니고 유학이 보다 합리적으로 정리한것입니다.
http://form.ugyo.net/front/gds/gdsView.do;jsessionid=4FC58C857D4BCEE3DF973820F79F2F20?currPage=1&listSize=10&searchType=gds_name&searchValu=&gdsCode=1006&gdsSeq=12
『주자가례』는 당시 사회의 수요에 적응하여 보편적으로 시행 가능한 예제의 수립이라는 목적에서 쓰여진 것이다.

http://theologia.kr/index.php?mid=board_korea&document_srl=27999&category=26510&sort_index=readed_count&order_type=desc
주희가 살았던 시대는 귀신과 신령에 대한 신앙이 중국인의 일상 생활을 지배하는 종교 신앙의 시대였다. "현재 일반인의 풍속은 귀신을 숭상한다. 예를 들어 신안(新安) 등지는 아침이나 저녁으로 마치 귀신의 소굴과 같다".(『어류) 권 3-79, p. 53)라고 말하는 주희의 증언은 당시의 귀신 및 신령숭배의 실상을 잘 말해 준다.

http://theologia.kr/index.php?mid=board_korea&document_srl=27999&category=26510&sort_index=readed_count&order_type=desc
주희는 적극적으로 민중의 귀신(신령) 신앙을 극복하여 유교적 제사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구체적인 결실이 『가례』의 저술을 통한 제사 제도의 확립이었다. 그의 제사론은 가묘의 설립과 종법제도의 수립이라는 두 개의 축을 가지고 있다. 첫째, 가묘(家廟)의 설립은 민중의 음사적 사묘(祀廟)에 대응하는 유교적 정통 예를 사서인의 일상 속에 뿌리박는 작업에 다름 아니었다. 둘째, 종법제도의 확립은 제사를 드리고 받는 후손과 조상의 혈연관계를 재조정함으로써 유교의 고전적 제사 이념을 정립하기 위해 추진된 원리였다. 그러한 종법이 확정을 통해 일반 사서인은 누구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이 예법에 적합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게 된다.
504 2016-03-18 14:19:48 3
고조선, 고구려가 진짜 위대하다고 봅니다 [새창]
2016/03/18 14:04:45
뭘 띄우나요.
옛 역사는 모두 소중합니다.
조선을 특별히 띄우는게 아니라 기록된게 많아서 할말이 많을 뿐입니다.
503 2016-03-18 10:17:04 0
[새창]
조상을 모시는것 자체는 성리학과 관련이 없습니다. 주자가례자체가 송대에 사치스럽고 복잡해진 장례/제사관행을 개혁하기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주희가 조상신자쳬를 인정하지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구요. 유학자체가 원래 괴력난신을 부정합니다.
502 2016-03-17 23:18:33 2
[새창]
위패는 양반가문에나 있는것이지 서인(평민)이나 천인이 위패를 모시지는 않습니다. 한양거주자 전부가 양반일수 없는데 어떻게 모두 위패를 모시나요
http://www.seoulstory.kr/mobile/story/list/6/1389

직계선조의 위패에는 인적사항을 기재한다. 즉 관직, 시호, 아호, 본관, 성, 휘, 자 등을 쓰고 왼쪽에 봉사자의 친속관계와 이름을 쓴다. 종묘의 공신당 위패의 기재순서는 실직, 군호, 증직, 시호, 성명 순으로 쓴다. 말미에 ‘신위’라고는 쓰지 않는다. 문묘(성균관·향교)에서는 공자는 ‘대성지성문선왕’으로 쓰고, 동방 18선현의 위패는 시호와 성명을 기재한다. 간혹 위패 말미에 ‘神位’라고 표기한 향교도 있다.
500 2016-03-17 15:06:45 2
애초에 유교가 나쁜게 아닙니다. [새창]
2016/03/17 09:47:32
동시대 유럽국가들은 그런 말조차 안했습니다.
전근대시기에 민본이라는 말의 의미가 현대 민주주의의 그것과는 분명히 다르긴 합니다만,
국왕이 행차하는데 일반백성이 징을 울리면서 고충을 하소연하는 격쟁같은 제도는 "백성이 근본이다"라는 명제에 부합할만한 실질이었습니다.

당시 유럽국가나 중국에서 그런짓을 하면 당장에 목이 잘립니다. 아니 국왕행차에 접근자체가 불가능하죠.

전근대시기의 제도를 현대와 비교하면 모두다 비루해 보입니다.
그 시기의 제도는 그 시대의 다른 국가와 비교해야 맞습니다.
498 2016-03-17 13:52:32 4
애초에 유교가 나쁜게 아닙니다. [새창]
2016/03/17 09:47:32
주자나 공맹의 가르침에 토지를 겸병하고 소작농을 쥐어짜는것을 권장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건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개별 인간의 문제죠.

조광조 같은이는 주자학의 가르침에 따라 서민이나 천민도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실제 집안하인에게도 경어를 사용했습니다.
유교탈레반의 대표격으로 공격받는 송시열은 여성도 공부를 하고 사회활동을 해야한다고 주장했구요.

초등학교 도덕시간에 사람은 평등하다고 가르치지만
그런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자라나서 사람을 평등하지 않게 대하잖아요?
그건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개별인의 인성의 문제죠.
497 2016-03-17 11:30:52 5
애초에 유교가 나쁜게 아닙니다. [새창]
2016/03/17 09:47:32
정도전이 조선을 건국할때(전 감히 이성계가 했다고 안하고 정도전이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가졌던 사상을 생각해보면, 주자학은 러시아 혁명가였던 레온 트로츠키의 그것 못지 않은 당대의 혁신적 사상이었습니다.

1.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토지를 백성에게 균등하게 분배하는 공산주의에 가까운 경제평등주장
2. 핏줄에 따라 능력과 무관하게 관직을 차지하던게 너무나 당연한 전근대사회에서 능력을 기반으로 한 관리선발주장
3. 핏줄에 따라 상속되는 군주가 아니라, 교육받은 사대부들의 대표인 재상이 국정을 주도하는 정치체제 주장
4. 권력에 대한 견제라는 개념자체를 떠올리기 어려운 시대에 국왕을 견제하는 간관시스템 주장
5. 국왕의 뜻에 따른 인치가 아닌 법과 제도에 기반한 제도정치를 주장

지금은 유학이 낡고 완고한 교조적 이데올로기로 보이겠지만 14세기에 조선이 건국될때 그것은 당대 최첨단의 혁신적 정치사상이었습니다.
496 2016-03-17 11:22:04 0
애초에 유교가 나쁜게 아닙니다. [새창]
2016/03/17 09:47:32
공자나 맹자 및 각종 유현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 분들의 사상을 추종한건 ( 때로는 맹종하기도 ) 사실이나, 종교적이라고 부를 만한 요소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공맹이나 유현에게 기복을 바라는 것도 현실의 문제가 초현실적 방법으로 해결되길 바라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세계3대 종교인 기독교, 이슬람, 불교 모두 성소에 가서 기도를 드리지만 유학에서 공맹이나 유현에게 기도를 드리진 않습니다.
495 2016-03-17 11:14:43 0
고구려도 유교탈레반 조선만큼 힘들던 시기가 있었나요? [새창]
2016/03/17 05:38:17
246년에 관구검에게 환도성함락(수도국내성 방어기지, 조선으로 치면 남한산성)
342년에 전연의 모용황에게 목저성전투에서 패하면서 국내성함락. 포로 5만명과 왕후를 인질로 내줌
371년 백제의 근초고왕에게 수도 평양성 함락위기. 고국원왕 전사.

수도가 2번이나 털렸고, 1번은 거의 털리기 전까지 갔지요.
이게 임난과 호란때 한양을 함락당했던 조선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고구려가 동북아시아 패자였던건 광개토대왕-장수왕 시기뿐이었습니다.
그것도 중원이 분열된 시기였기 때문에 가능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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