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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4 2016-03-30 12:16:0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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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흥의 3군단지휘소는 처음부터 하진부리에 있었고 ( 포위된적이 없고 ), 도망갔다는 군단장 유재흥은 포위상황에서 현리로 들어와서 회의를 한후 군단지휘소가 있는 현리로 북귀했습니다. 도망갔다면 대체 왜 포위상태에 있는 현리로 돌아왔을가요?
http://koreanwar60.tistory.com/817
5월 17일 14:00시경 헬기로 현리에 도착한 군단장 사단장들과의 작전회의에서 제3사단장에게 부대를 통합 지휘해 오마치 고개를 돌파하여 철수하라고 명령하고 15:30분 하진부리의 군단지휘소로 복귀하였다.

제3사단장과 제9사단장은 17:00시경 포위망 돌파계획을 예햐 연대에 하달하였다. 먼저 제9사단 제30연대가 공격하여 중간목표인 736고지와 785고지를 확보하고, 이후 제3사단 제18연대가 초월 공격하여 오마치 고개를 탈환한 후 810고지와 681고지를 확보하도록 하였다.

국군 제3군단의 철수는 조직적인 철수가 아닌 무질서한 패주였다. 장교-병사 할 것 없이 뒤섞여 철수하였다. 중공군의 집요한 추격으로 대오를 추스르기도 힘들었다. 광원리에서 창촌으로 이동한 후 집결하려 하였지만 그마저도 중공군이 먼저 차단하고 있어 대부분의 철수 병력이 계방산을 넘어 하진부리로 이동하였다.

5월 20일 하진부리에 집결한 병력은 제9사단이 40%, 제3사단이 34,2%에 불과하였다.
553 2016-03-30 12:12:4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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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공식기록을 인용하자면, 중공군의 오마치고개 집중공격으로 미 제10군단에서는 7사단의 상황을 알수 없었고, 따라서 7사단의 철수요청(질서정연한 퇴각이 될수있는)을 거부했습니다. 이게 딱히 누구 잘못이라고 말할수는 없습니다.
http://koreanwar60.tistory.com/817
중공군은 5월 16일 17:30분에 국군 제3군단 서쪽에서 방어 중인 미 제10군단의 국군 제7사단 지역을 향해 집중적으로 공격해왔다. 이에 따라 20:00시경 국군 제7사단의 전방연대들이 붕괴되면서 통신마저 두절되어 상급부대에서는 국군 제7사단의 상황을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한편 오마치 고개를 차단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중공군 제20군 예하 제60사단 제178연대 제2대대는 국군이 배치된 진지를 우회해 빠른 속도로 국군 제7사단의 바어종심을 향해 기동하였다. 그 결과 중공군 첨병중대가 17일 04:00시에, 대대가 07:00시에 오마치 고개 일대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들은 16일 18:00시부터 17일 07:00시까지 13시간 동안에 동부전선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뚫고 무려 25km나 기동하였던 것이다.

국군 제3군단의 좌측 사단인 제9사단은 20:00시경 국군 제7사단 제5연대가 전투지경선을 넘어 사단지역으로 철수하면서 전장상황을 알게 되었다.
제9사단장은 03:00시경에 철수를 건의하였으나, 군단장은 미 제10군단으로부터 아무 이상이 없다는 답변을 듣고 철수를 허락하지 않았다.
552 2016-03-28 12:22:38 0
당이 손보기에 고구려가 상당히 먼 거리에 위치해 있는 건가요? [새창]
2016/03/28 11:35:19
집안은 국내성 인근인데, 3차방어선이 국내성인근에 있다면 두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천해의 방어요충지인 천산산맥을 방기하는 것이고, 수도인 평양에 대한 방어선이 없습니다.
551 2016-03-28 12:04:53 0
당이 손보기에 고구려가 상당히 먼 거리에 위치해 있는 건가요? [새창]
2016/03/28 11:35:19
돌궐이나 서역이나 남만이나 고구려나 다 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고구려의 경우는 그나마 수군을 이용한 물자수송이 가능하기때문에 돌궐이나 서역처럼 짐마차이외에 어떤 운송수단도 없는 곳보다 훨씬 공략이 용이하죠.

다만 다른 점은 고구려는 요동반도일대에 강력한 고정 방어선을 구축해놨다는 겁니다.
1차방어선(요하), 2차방어선(요동성,안시성등의 대성), 3차방어선(소규모 산성 수백여개)으로 이루어진 이 방어선은 가히 철벽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정도 였으니까요.

550 2016-03-26 01:42:02 1
다른건 다 둘째치고 조선말기에 대해 [새창]
2016/03/26 00:19:54
역사에 나쁜나라같은건 없음.
나쁜나라라고 생각하고 싶은 당신의 증오가 있을뿐
549 2016-03-25 15:02:18 0
조선시대도 까일건 까이는게 맞지 않습니까? [새창]
2016/03/25 02:12:20
부가설명 단거에요.
548 2016-03-25 14:30:15 0
조선시대도 까일건 까이는게 맞지 않습니까? [새창]
2016/03/25 02:12:20
대외무역의 활발함이 나라의 개방성을 표징할수 있다고 봤을때
송/원대에 중국의 대외무역은 청대의 그것보다 더 활발하고 큰 규모였습니다.
더불어 송/원대에 비해 축소된 명/청의 그것조차 세계평균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무슨 근거로 송대부터 중국이 폐쇄적이 되었다고 주장하시는지 궁금합니다.
https://www.google.com/url?sa=t&rct=j&q=&esrc=s&source=web&cd=3&ved=0ahUKEwiFg4-EjNvLAhUoW6YKHeefADMQFggpMAI&url=http%3A%2F%2Fwww.naksung.re.kr%2Fxe%2F%3Fmodule%3Dfile%26act%3DprocFileDownload%26file_srl%3D157207%26sid%3D4526fa6e0f5edccf76528b3c30f809e2&usg=AFQjCNHNx8RmWB-aWusfHFToN-g4CT94bw&sig2=X-eltwdNvfaqrp-8bXI90A
낙성대 경제연구소의 워킹페이퍼인 임진왜란과 국제무역(이헌창) 인용입니다.

중국의 무역은 9세기부터 꾸준히 성장하였다. 宋代(960-1279)와 元代(1271- 1368)에 조선술, 그리고 나침반 사용 등 항해술이 발전하여 중국인은 동아시아 해역의 해로 무역에 활발히 종사하고 인도까지 진출하였다.

그래서 남송대에는 무역에서 발생하는 재정 수입이 세입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중국도 16세기 국내 시장의 성장, 일본 은의 유입, 해금의 해제 등으로 무역이 성장하였다.
1700년경과 1800년경 중국 무역액의 GDP에 대한 비율은 1.5% 정도로 추정되었다. 1800년, 1870년, 1913년 세계의 무역의존도는 각각 2%, 10%, 그리고 22% 정도로 추정된 것으로 보건대, 1700년경 중국의 무역의존도는 세계 평균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이나, 18세기와 19세기 전반기에 세계 평균에 뒤떨어지고 그 격차는 갈수록 커졌다.

송대와 원대의 무역의존도는 청대보다 높았던 것으로 보이니, 당시 중국은 거대한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무역의존도가 세계 평균보다 높았다.
547 2016-03-25 14:19:42 1
조선시대도 까일건 까이는게 맞지 않습니까? [새창]
2016/03/25 02:12:20
의도적인 트롤러 혹은 관심을 원하시는분이 분명합니다.
정성들여 링크 붙여서 주장을 반박을 해줘도 다른 글에서 같은 주장을 또 반복하시는 분입니다.
546 2016-03-25 14:17:42 1
유교탈레반 이외의 다른 종교도 우리나라에 남녀차별이 있었나요? [새창]
2016/03/23 00:12:46
거짓말 그만하시라고 이전에도 답글을 여러번 달았건만 똑같은 거짓말을 반복하시네요.
1. 제가여성의 관직진출 금지법은 성종대에 세워진 법입니다.
2. 남편사망시 제가가 어려운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건 사족여성에만 해당사항이 있죠. 인구의 절대다수인 평민과 천인과는 무관한 예깁니다.
3. 이성간에 같이 목욕하는게 어떤 의미에서 사회의 선진성을 표징하는지 모르겠습니다.
4. 결혼시 처가살이풍습이 파뀐건 18세기 부터입니다. 태종이 강제로 바꿨다는 거짓말은 어디에서 들으셨나요?
5. 사족의 축첩행위는 유래가 오래되었으며 동서양 막론하고 어디에나 있습니다.
6. 바깥 외출이 어렵다는 거짓말은 어디서 보셨습니까? 조선 전기와 후기를 막론하고 그런기록은 없습니다
7. 장옷과 같은 케이프나 클록이 유럽에서도 보편적으로 성별무관하게 쓰였다는 사실은 이미 논증했습니다. 더더구나 고려 외출복은 몽구도 장옷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8. 사족남편이 아내를 구타할시 유배형에 처했다는 기록을 이미 이전 글에 답글을 달은바 있습니다.

명백한 증거를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3가지 거짓말(4번, 6번, 8번)을 반복하시는군요.
거짓말해서 사람들이 댓글달면 좋으세요?
545 2016-03-25 11:24:52 2
조선시대도 까일건 까이는게 맞지 않습니까? [새창]
2016/03/25 02:12:20
좋아하시는 고구려에 유교가 어느정도 영향을 미쳤는지 알려주는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 정확하게는 고구려의 역사기록 자체가 별로 안남아 있죠 )
그러나 동아시아의 모든 국가들이 유교를 도입한것은 유교가 중앙집권과 왕권강화에 매우 유용한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시의 유교는 조선의 성리학과는 다른 원시유교입니다.
성리학에서 강조했던 역성혁명이나 무도한 군주에 대한 방벌같은건 아직 정립되기 전이니까요.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nh&setId=1564942&position=1
太學은 국가차원에서 유교적 정치이념에 충실하고 그 정치제도의 운영에 능숙한 인재를 키우고자 창설한 교육기관이다.
중앙집권적 정치제도에 적합한 관리를 양성하여 확대된 영토와 복잡다양한 성격의 내부 구성원들을 체계적으로 통치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태학설립은 유교정치이념을 도입하고자 하는 고구려정부의 적극적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유교사상은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의 운영에 필요한 정치이념을 제시해 주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544 2016-03-25 11:15:33 1
조선시대도 까일건 까이는게 맞지 않습니까? [새창]
2016/03/25 02:12:20
연대측정상으로 백두산 분화와 발해 멸망은 직접적인 연관이 없습니다.
발해가 멸망한 다음에 백두산이 분화했으니까요.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5300951451
1980년대 일본 도립대의 화산학자 마치다 히로시(町田洋) 교수는 흥미로운 가설 하나를 제기했다. 10세기 백두산 대폭발과 발해멸망의 연관성이었다.
역사학자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926년을 전후해 백두산 분화에 대한 문헌기록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데 어떻게 믿겠냐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백두산에서 날라온 화산재의 퇴적층과 함께 화산폭발에 이은 화쇄류로 묻혀버린 탄화목에 대한 연대를 측정했다. 그
결과 10세기 백두산 대폭발의 연대는 934년 전후와 937년 전후, 그리고 946년 전후로 좁혀졌다.

소원주 박사는 “최근 탄화목의 현미경 분석결과 930년까지 연대가 나온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어찌됐든 연대측정결과로는 발해의 별망(926년)과 백두산 폭발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543 2016-03-25 11:12:42 2
조선시대도 까일건 까이는게 맞지 않습니까? [새창]
2016/03/25 02:12:20
발해도 유교탈레반입니다. 동아시아국가가운데 유교의 자장에서 벗어날수 있는 국가는 없습니다.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nh_010_0060_0020_0010
발해의 여러 제도를 살펴보면 유학과 관련된 명칭들이 다수 보인다. 궁중에서 후궁의 업무를 담당하던 巷伯局의 항백은≪詩經≫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문왕의 尊號인 “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에도 불교 용어와 함께 孝感이란 유교적 단어가 들어 있다.

무엇보다도 忠·仁·義·智·禮·信이라는 유교덕목을 6부의 명칭으로 삼은 것은 독창적인 것으로서 발해사회에 유학이 얼마나 깊숙히 침투해 있었는가를 실증해 주고 있다. 8세기 중반에 일본의 仲麻呂정권이 官號와 官制 등을 개혁하면서 이 6부의 명칭을 모방한 것도 눈여겨 볼 만하다.

발해 지배층에 유학이 깊이 자리잡고 있었던 사실은 貞惠公主와 貞孝公主의 두 墓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 묘지는 중국의 유교 경전과 역사서들을 두루 섭렵하여 변려체 문장을 구사하고 있어서 당시 발해 지식인의 소양을 엿보게 한다
541 2016-03-24 20:27:20 0
이도가 왕이된 이유에 대해 궁금합니다. [새창]
2016/03/24 16:52:25
여러가지 이유(이도의 총명함, 이제의 방약무인함 및 비행)가 있었겠으나 실록에 보면 아버지 태종에게 결정적으로 대든 기록이 있습니다.
첩이었던 어리와 관련된 일이었는데 독재군주 태종이 이를 결정적인 폐세자의 사유로 여긴듯 합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ca_11805030_001
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 5월 30일 기묘 1번째기사 1418년 명 영락(永樂) 16년 세자가 내관 박지생을 보내어 친히 지은 수서를 상서하다

세자가 내관(內官) 박지생(朴枝生)을 보내어 친히 지은 수서(手書) 를 상서(上書)하였는데, 사연은 이러하였다.

"전하(殿下)의 시녀(侍女)는 다 궁중(宮中)에 들이는데, 어찌 다 중하게 생각하여 이를 받아들입니까? 가이(加伊)를 내보내고자 하시나, 그가 살아가기가 어려울 것을 불쌍히 여기고, 또 바깥에 내보내어 사람들과 서로 통(通)하게 하면 성예(聲譽)가 아름답지 못할 것이므로, 이 때문에 내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지금에 이르도록 신(臣)의 여러 첩(妾)을 내보내어 곡성(哭聲)이 사방에 이르고 원망이 나라 안에 가득차니, 어찌 스스로에게서 반성하여 구하지 않으십니까?

중략

왕자(王者)는 사(私)가 없어야 하는데, 신효창(申孝昌)은 태조(太祖)를 불의(不義)에 빠뜨렸으니 죄가 무거운데 이를 용서하였고, 김한로(金漢老)는 오로지 신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를 일삼았을 뿐인데 포의지교(布衣之交)348) 를 잊고 이를 버려서 폭로(暴露)하시니, 공신(功臣)이 이로부터 위험하여질 것입니다. 숙빈(淑嬪)이 아이를 가졌는데 일체 죽(粥)도 마시지 아니하니, 하루 아침에 변고(變故)라도 생긴다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스스로 새 사람이 되어, 일호(一毫)라도 임금의 마음을 움직이지 아니할 것입니다."

중략

세자의 사람됨이 광포(狂暴)하고, 미혹(迷惑)하고, 음란하고, 오락을 즐기고, 말을 달리기를 좋아하고, 유생(儒生)을 좋아 하지 아니하고, 학문(學問)을 일삼지 않았다. 매양 서연(書筵)에는 병이라 칭하고 나오지 않다가, 서연관(書筵官)이 두세 번씩 청한 뒤에야 혹은 나왔다. 강론(講論)하는 스승이 앞에 있으면서 전에 한 말과 지나간 행동을 이끌어다가 되풀이하여 이를 타일러도 전심(專心)하여 이를 듣지 않았다.

제(禔)가 잘못을 뉘우친다는 뜻으로 맹세의 글을 지어서 종묘(宗廟)에 고(告)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어리(於里)를 김한로의 집에 숨겨 두고 다시 전(殿)에 들이었다가, 일이 또 발각되니, 임금이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위하여 통절(痛切)히 이를 꾸짖어 거의 스스로 새 사람이 되도록 하였고, 또 김한로를 외방에 유배하였다. 세자가 도리어 원망하고 분개하는 마음을 품고 드디어 상서(上書)하였는데, 사연이 심히 패만(悖慢)하고, 또 큰 글씨로 특별히 써서 2장이나 부진(敷陳)352) 하여 심히 무례(無禮)하였다. 이에 조말생에게 명하여 세자의 글을 가지고 영의정 유정현(柳廷顯)·좌의정 박은(朴訔) 등에게 보이고 말하였다.

"세자가 여러 날 동안 불효(不孝)하였으나, 그러나 집안의 부끄러움을 바깥에 드러 낼 수가 없어서, 나는 항상 그 잘못을 덮어두고자 하였다. 다만 직접 그 잘못을 말하여 뉘우치고 깨닫기를 바랐는데, 이제 도리어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싫어함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어찌 감히 숨기겠는가?"
540 2016-03-24 00:06:55 3
'박근혜는 이런 사람'...전여옥이 말하는 박근혜 [새창]
2016/03/23 23:5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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