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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9 2017-06-10 23:03:49 15
천재영웅에서 글로벌 사기꾼으로.. [새창]
2017/06/10 22:29:18
미국판 황우석인데...
898 2017-06-09 16:42:23 0
머리없는 닭처럼 사람도 머리의 일부만 가지고 생존이 가능할까요? [새창]
2017/06/09 14:12:41
이걸로 보면 정신활동을 관장하는 대뇌는 손상되도 생존에는 지장이 없을듯 합니다만,
그 아래 있는 간뇌,연수,척수,소뇌는 모두 신체유지 필수요소라서 여기까지 손상되면 어렵겠죠.
그러니 일단 머리 상단 3분의 1정도까지는 절단되도 생존이 가능해보입니다.
다만 인간이니 정신활동부위가 다 날라가면 그냥 바보가 되겠죠. 키큰 3세 소아수준?

897 2017-06-09 16:16:48 1
[새창]
▷ 개마대산(蓋馬大山)은 평양(平壤)의 서쪽에 위치하는 지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개마대산(蓋馬大山)은 연주(燕州 : 幷州 : 山西) 지역의 마읍(馬邑) 주위에 위치하는 산맥일 가능성이 큽니다.

첫번째 지적 연결선상입니다. 현재의 운남성 서산이 평양서쪽이라는 입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개마대산이 서산주위에 있는 산맥을 가능성이 큰가요?
896 2017-06-09 16:14:54 1
[새창]
단계적으로 하나하나 리뷰를 하지요.

▷ 평양(平壤)의 서남쪽에 마읍산(馬邑山)이 위치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원래 연주(燕州 : 幷州 : 山西) 지역에 속하는 마읍(馬邑)이라고 합니다.
※ 평안도(平安道)에 속하는 지명들 대부분은 고대 부터 고구려(高句麗)가 유(幽) ' 연(燕) ' 제(齊) ' 노(魯) ' 오(吳) ' 월(越) 등지를 평정하고 자국의 영토로 삼았을 당시 그 지명들에 기인한 걸로 같아 보입니다.

서산은 현재 운남성 ( 서남지역 )에 위치하는 지명입니다. 아무런 증명도 없이 어떻게 갑자기 평양 서남쪽 마읍산이 운남성 서산으로 등치가 되나요?
그리고 고구려가 유,연,제,노,오,월을 평정했다고 주장하시는데, 근거는 무엇입니까? 왜 그러한 기록이 고구려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한마디도 없는 것입니까?
895 2017-06-08 19:58:27 1
일본의 근세사(펌) [새창]
2017/06/08 19:02:13
일제시기 초반 문해율 10%는 일본어 기준입니다. 공식적인 공용어가 일본어뿐인데, 한국어(언문) 문해율을 조사해야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전근대시기 국가별 문맹률을 제대로 알수 있는 데이타같은건 없습니다. 당시에 그런 조사를 한적도 없고 해야할 필요도 없었으니까요.
( 문맹률 조사는 근대공업화를 위해서 필요한것입니다 -기초적인 문자쓰기/읽기가 가능해야 기계에 대한 학습과 조작이 가능하므로- )

http://www.cha.go.kr/newsBbz/selectNewsBbzView.do?newsItemId=155696952&curPage=4&strWhere=&strValue=&schWhere=&schDirect=§ionId=add_cate_1_sec_1&sdate=&edate=&category=&mn=NS_01_10
조선시기 언문을 기준으로 하면, 왕도 교서를 언문으로 했고, 왕실여인들이 모두 언문을 썼으며, 송강정철같은 대표적 유학자도 언문편지를 다수 남길정도로 양반사족사이에서도 광범위하게 사용된걸로 보입니다. 일반 백성들도 언문상소를 올린 기록이 있구요.
894 2017-06-08 19:47:26 1
기록 관점으로 보는 삼만위(三萬衛 : 옛 만주)의 위치.. [새창]
2017/06/08 18:10:22
그래서 거기를 만주라고 비정할수 있는 유물이나 유적, 생물학적 증거가 있나요?
고대사서가 성전입니까? 사서에 있는 말을 꽤어 맞추면 그게 사실이 되나요?
사서에 나왔으면 그 다음 단계로 유물/유적/생물학적 증거가 뒷받침이 되야죠.
893 2017-06-08 19:42:03 2
기록 관점으로 보는 부여(夫餘)의 위치.. [새창]
2017/06/08 17:56:46
선택적으로 본인 편하신대로 인용하니까 망상이라고 하지요.
어디서는 삼국지를 인용안하고, 어디서는 삼국지를 인용하고.
이런식의 취사선택이 무슨 학문인가요?
892 2017-06-08 19:40:58 1
기록 관점으로 보는 오환(烏桓)의 위치.. [새창]
2017/06/08 17:52:55
읍루의 위치에 관해선 삼국지 기록을 불신하시더니 , 왜 오환의 위치에서는 삼국지를 인용하시나요?
인용을 하고 안하고 기준이 뭔가요?
891 2017-06-08 19:38:21 3
청사고(清史稿) 지리지가 증언하는 흥안령(興安嶺)의 위치.. [새창]
2017/06/08 18:15:17
청사고는 초고상태 기록입니다. 교열과 수정이 완료된 정식 청사가 있는데,
왜 초고상태기록을 인용하시는지요?
890 2017-06-08 19:33:01 2
중화인민공화국 입장으로 보는 읍루(邑婁)의 위치.. [새창]
2017/06/08 15:32:47
읍루의 위치에 대해 삼국지와 사기가 말하는 바는 믿을수 없고 ( 오늘의 유령님이 인용한 )
신빙성이 의심되는 요사와 사행사가 쓴 개인견문록인 연원직지는 인용할수가 있다가 님이 하신 말씀이구요.
전 그게 타당성이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889 2017-06-08 18:13:27 1
중화인민공화국 입장으로 보는 읍루(邑婁)의 위치.. [새창]
2017/06/08 15:32:47
요사에 대한 신뢰성 논쟁은 차지하고(요사는 중국정사에도 포함이 안되어있습니다), 연원직지는 사행사가 쓴 개인견문록입니다.
신뢰성이 의심되는 요사와 개인견문록인 연원직지는 인정하고, 공식사서이자 숱하게 교차검증이 된 삼국지와 사기는 인정못하겠다는 말인가요?
888 2017-06-08 17:58:37 0
중화인민공화국 입장으로 보는 읍루(邑婁)의 위치.. [새창]
2017/06/08 15:32:47
http://www.hayoungsun.net/data/bbs/ys_meet1/201308201016359.pdf
1권 출강록 11월 29일 기사에 있네요. 심양세폐기같이 별도 제목하에 있는건 아닙니다.

11월 29일 영수사-난니보-십리하보
- 점사가 매우 큼. 몇백명을 수용하고도 남음. 11월 30일 십리하보-백탑보-심양
- 혼하기: 효종이 심양에 있을 때 정자를 지은 곳. 세자가 무를 심은 것도 이 땅. - 심양성기: 심양은 한나라 때는 낙랑이 다스리던 곳이고, 위.수나라 때는 고구려에 속했으며.... 노가재 당시에는 심양 시장에 서책이 없었다는데 지금은 봉황성 및 책문 등지의 책자는 모두 여기에서 나감. 심양.산해관.북경 세 곳은 모두 성에 올라가는 것을 엄금함.
887 2017-06-08 17:55:58 1
중화인민공화국 입장으로 보는 읍루(邑婁)의 위치.. [새창]
2017/06/08 15:32:47
사료비평을 전혀 안하시고 모든 사료를 동렬로 판단해서,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시면 안되죠.
오늘의 유령님 말처럼, 정규사서인 삼국지나 사기와 조선후기 개인의 견문록인 연원직지가 동렬의 기록이 될 수 없습니다.
여기에 먼저 답변을 하셔야죠. 연원직지 기록이 삼국지나 사기의 기록에 우선하나요? 우선하면 근거는 뭔가요?
886 2017-06-08 13:38:14 0
K는 0 아니 NaN 이 정상이거나 아예 성립되지 않는 개념이어야 합니다 [새창]
2017/06/08 13:02:09
전자투표는 낮은 투표율을 올리고, 노약자/장애인의 투표접근성을 개선하며, 선거의 비용을 낮출수 있는 매우 좋은 방안이라고 생각합니다.
( 더불어서 투표지 인식에 대한 문제도 현저하게 감소합니다. 스크린에서 고르면 되니까요 )
다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건, 이런 시스템이 좋고 나쁘고의 여부가 아니라,
시민들이 정부활동에 대한 신뢰도가 낮다는게 문제죠.

저 사람들 믿을 수 있다고 하면 사실 수개표니 전자개표니, 전자투표니 하는 방법들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885 2017-06-08 13:28:52 1
원앙진이 왜군에게 잘 먹혔던 이유가 뭘까요? [새창]
2017/06/08 12:58:10
http://blog.yes24.com/blog/blogMain.aspx?blogid=atena01&artSeqNo=7687622, 구보타 마사시 일본의 군사혁명
일본군 보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병종은 장창 아시가루였습니다.(약 40% 정도)
그러나 마케도니아군대나 로마군대처럼 밀집된 방진을 이루어 집단전을 벌이는 대신 산개해서 싸우는 개인전을 중시했습니다.

특이한 점은 병사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방패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전국시대 후기로 가면서 철포의 보급이 늘어나자 창 중심의 전술이 철포 중심이 되어 최전열에 철포병과 궁수가 배치되고 창병은 그 뒤로 밀려났습니다. 야전이 벌어지면 쌍방은 철포를 쏘아대면서 서로의 거리를 좁히고 다음으로 궁수가 활을 쏘며 마지막으로 창병이 돌격하는 식이었습니다. 창병은 후위부대와 적 창부대의 돌격을 저지하는 방어적 역할을 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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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법을 당연히 구사하긴 했습니다만, 전국시대 기준으로 볼때 일본군주력인 장창보유 아시가루들은 밀집방진이 아니라 개인전을 선호했습니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장기간 전투원으로 종사하며 개인의 전투역량이 높았던 것과 지형의 영향이 아닌가 합니다.
( 아시다시피 일본도 넓은 평야지대가 많지 않습니다 )

나폴레옹전쟁이후 유럽에서도 평야가 많은 프랑스를 비롯한 서부지역이 아닌 구릉지역이 많은 동부지역의 경우에도 방진이 아닌 산개진이 일반사례였던 였으니까요.

방패도 없는 개인전 선호 장창병이 주력이니, 역할이 잘 분담된 밀집 전투조에게 밀리는게 당연한게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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