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유인페이지
개인차단 상태
brianjung님의 개인페이지입니다
회원가입 : 15-12-04
방문횟수 : 758회
닉네임 변경이력
일반
베스트
베오베
댓글
974 2017-06-17 19:48:14 1
한사군 누구의 말이 옳은가? [새창]
2017/06/17 19:04:58
이병도따위는 아무 상관도 없음.
심지어 일본하고도 무관함.

1. 낙랑호구부 목간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21015000/2007/04/021015000200704260657014.html
기원전 45년(한나라 연호로는 초원 4년) 낙랑군 내 25개 현의 현별 호구와 인구, 전체 인구 28만여 명을 기록한 당시 공문서 목간이 평양 낙랑 구역의 옛 귀틀무덤에서 발굴됐다는 내용. 이른바 낙랑 호구부 목간

2. 세종실록 지리지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tid=kda&pos=4&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B%82%99%EB%9E%91
세종실록지리지 평양부, 낙랑에 대한 기록

3. 정약용 아방강역고
http://kostma.korea.ac.kr/riks/sub6/sub6View.do?base_uci_no=1062
/ 정약용 아방강역고, 낙랑군의 치소는 본디 조선현에 있었는데, 조선현은 즉 지금의 평양이다.

4. 안정복 동사강목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layout/contentsIframe.jsp;jsessionid=n4NcQLNd8hjycQdHtWVCWGKVBJ9zTJMgtvBBdQnNhKvVQjmJLQlV!-2018665117%3FbizName=MK%26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253FbizName=MK%2526seojiId=kc_mk_c007%2526gunchaId=ax004%2526finId=009
/ 안정복 동사강목, “평양성(平壤城)은 곧 한(漢)의 낙랑군 왕검성(王儉城)이다.” 하였다. 지금 평양을 낙랑이라고 칭하니 그 유래가 오래다.

5. 한치윤 해동역사
http://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433A_0740_010_0010
조선후기 실학자 한치윤의 해동역사 속집 제1권 > 지리고 > 최종정보
평양에 낙랑 비정

6. 고려사
http://db.history.go.kr/KOREA/search/searchResult.do?sort=levelId&dir=ASC&limit=20&page=1&codeIds=PERIOD-0-3&searchTermImages=%EB%82%99%EB%9E%91+%ED%8F%89%EC%96%91&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B%82%99%EB%9E%91+%ED%8F%89%EC%96%91&searchKeywordConjunction=AND#searchDetail/kr/kr_058r_0010_0040_0020_0010/6/3/6/r
고려사 권58 > 지 권제12 > 지리3(地理 三) > 북계 > 서경유수관 평양부 > 연혁

서경유수관(西京留守官) 평양부(平壤府)는 본래 3조선(三朝鮮)의 옛 도읍이다. 당요(唐堯) 무진(戊辰)년에 신인(神人)이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오니 국인(國人)이 그를 임금으로 옹립하고, 평양(平壤)을 도읍으로 삼아 단군(檀君)이라 부르니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 되었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정벌하고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封)했으니,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 되었다.

41대 후손 준(準)에 이르러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무리 1,000여명을 모아 망명해 와서 준(準)의 땅을 빼앗아 왕험성(王險城)【험(險)은 검(儉)으로도 쓰고, 곧 평양이다.】을 도읍으로 하니, 이것이 위만조선(衛滿朝鮮)이 되었다. 그의 손자 우거(右渠)가 황제의 명령을 받들지 않자,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원봉(元封) 2년(BC. 109)에 장수를 보내어 토벌하고 사군(四郡)을 정하면서 왕험을 낙랑군(樂浪郡)으로 하였다.

7. 2011년 낙랑 북중공동발굴 보고서<평양일대의 낙랑묘장>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792895.html , 한겨레 17년 4월 30일
고고학자인 정인성 영남대교수는 최근 중국 연변대학이 펴낸 2010~11년 북중공동발굴 보고서 <평양일대의 낙랑묘장>을 입수해 30일 <한겨레>에 공개했다. 이 보고서는 평양시 남사리 구역에서 확인된 낙랑 계열의 전축분을 정영근, 이동휘, 정경일 등 연변대학의 조선족 고고학자들과 북한의 고고학자들이 2년간 공동조사한 성과들을 담고있다.

특히 조사에서 나온 벽돌무덤 내부와 주요 유물들을 찍은 컬러 도판들이 발굴 상보와 함께 실려 눈길을 끈다. 평양 일대의 중국풍 전축분은 식민지시대 일본 학자들이 100기 이상 굴착해 <조선고적도보>와 당시 보고서들에 조사개요와 흑백도판들을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80~90년대 이후 북한 당국이 조사한 낙랑계 고분의 근래 발굴 내용들이 전체 컬러 도판으로 소개된 것은 이 보고서가 처음이다.

정 교수는 “부장품이 매우 고급스럽고, 먹과 벼루가 나온 점 등을 보면 태수급 이상의 고위급 유력자가 묻혔던 무덤으로 추정된다”며 “분명한 중국 한대 전축분 양식을 띠고있어 낙랑군이 평양 일대에 자리했음을 확실히 입증하는 유적이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보고서는 이 무덤을 낙랑군의 전형적인 전축분으로 결론짓고 있다. 이는 공동조사를 벌인 북한 학계의 공식 견해와 배치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973 2017-06-17 19:41:48 0
만주원류고는 청나라판 동북공정인데 말입니다. [새창]
2017/06/17 17:22:35
청나라가 신라후손이라고 만주원류고에서 말하니, 그럼 청나라도 한민족국가라고 주장하죠.
그럼 아무 문제 없어요. TT
972 2017-06-17 15:45:49 0
흠정만주원류고를 누가 번역하였는가? [새창]
2017/06/17 13:54:21
http://m.blog.naver.com/ckchang1/30037443631 장진근님이 참조한 원문입니다.
장진근님 번역본은 원문에 매우 충실한 정확한 번역본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목차에 고구려가 아예없고(신라,백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고구려땅을 신라땅으로 만들고 있는데서 알 수 있듯이,
만주족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 충만한 역사서라는 거죠.

물론 모든 역사서가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집니다만, 만주원류고는 그 정도가 너무 심했습니다.
하긴 그럴수 밖에 없는게 역사에서 제대로 나라를 세워 본 바 없는 민족이 대제국을 세웠으니 그런 방법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이 됩니다.

원문에 황제가 직접 관여했다(흠정), 수많은 인원이 참여했다나 서지정보 이런거에 목매지 마시고
내용먼저(하다못해 목차라도) 보고 얘기를 하시는게 좋겠습니다.
971 2017-06-17 15:20:42 0
만주원류고는 고구려의 실체를 부정한 적이 없음 [새창]
2017/06/17 13:27:39
흠정이라서 집빌핀 많아서 옳다고 주장하시는 건 권위의 오류구요.
그래서 원문을 제시해 드립니다. 번역본 낸 장진근씨가 올린 원문입니다.
이걸 못 믿으시겠으면, 다른 원본을 찾아주세요.

http://m.blog.naver.com/ckchang1/30037443631 , 번역본 목차이니 원문은 역시 위에 장진근님 원문으로 교차검증하시면 됩니다.
만주원류고 권9 신라편 신라9주 조
謹按: 新羅始附庸於百濟, 後兼加羅、任那諸國, 與百濟爲鄰。考其疆土, 東南並有今朝鮮之慶尙、江原二道, 西北直至今吉林、烏拉, 又西近開原、鐵嶺。唐顯慶以後, 又得百濟故地, 及高麗南境, 於是東西增九百里, 南北增千餘里。開元以後, 渤海盛强, 其西北諸境, 盡爲所倂, 新羅所有, 僅鴨淥江以南
삼가 살피건데 신라는 처음에 백제에 부용되었으나 후에 인근의 가라, 임나 백제등을 겸병하였다. 그 강토를 살펴보면 동남으로 지금 조선의 경상 강원 ㅈ도요, 서북으로는 길림, 오랍에 이르고 또 서쪽으로 개원, 철령 부근이다. 당 현경(656-660년) 이후에 백제 옛땅과 고려 남쪽경계까지 얻어 동서로 구백리, 남북으로 천여리를 얻었다. 개원(713-741) 이후에 발해가 강성하여 그 서북경계를 모두 병합하였고 신라는 압록강 이남의 땅만 차지하였다.
---
고구려땅 모두 신라땅으로 편입되어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땅을 발해가 차지한것 처럼 나와있구요. "고구려"는 완전 삭제되어 있습니다.

https://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mallGb=KOR&ejkGb=KOR&barcode=9788981601102&orderClick=JAj
만주원류고 목차입니다. 보시다시피 백제, 신라, 삼한, 말갈은 다루어도 고구려는 별권으로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백제, 신라가 고구려보다 더 오래되고 큰 나라였던가요? 내용에서도 고구려땅은 전부 신라땅이에요. 고구려 없는 거 맞습니다.

흠정만주원류고 권1
부족(部族) , 만주(滿洲) / 숙신(肅愼) / 부여(夫餘)

흠정만주원류고 권2
부족 2 , 읍루(-婁), 삼한(三韓), 물길(勿吉)

흠정만주원류고 권3
부족 3 , 백제(百濟)

흠정만주원류고 권4
부족 4 , 신라(新羅)

흠정만주원류고 권5
부족 5 , 말갈(靺鞨)

흠정만주원류고 권6
부족 6 , 발해(渤海)

7이후로는 링크 참조하시면 됩니다. 너무 길어서요.
970 2017-06-16 13:38:48 0
초기 고구려는 요서를 100년이상 차지했다. [새창]
2017/06/16 05:02:10
참 핵심 파악 못하시네. 저 글의 핵심은 서안평이 압록강 하구라는게 아니구요.
2세기 초반까지 고구려가 한군현 정리도 못하는 상황이었다는 겁니다.

변군도 처리를 못하는 군사력으로 무슨 중심지역을 공격해서 점유하냐는 겁니다.
태조왕 10성 건축에 따른 요서점유가 말이 되러면 당연히 그전에 주변 한나라 변군은 정리가 되는게 논리적으로 맞아요.

님이 강남구 마피아 보스면 옆동네 서초구에서 이갈고 있는 조직 놔두고 종로패 치러 갈거에요?

그리고 삼국유사 3권 홍법조랑 신당서 고구려조, 요사 지리지 인용하신거 교차검증되게 링크를 가져오신던지,
아님 가지고 계신 책 사진이라도 찍어 올리시죠?
저 말이 있는지 님이 지어낸 말인지 제가 어찌 압니까?

교차검증할수 있게 하라고 몇번은 말했는데 그냥 마이동풍이네.
969 2017-06-16 11:29:29 1
아오...플랫어스 신봉자랑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새창]
2017/06/16 00:15:32
밤과 낮이 항상 동시에 존재한다.
968 2017-06-16 11:21:23 0
초기 고구려는 요서를 100년이상 차지했다. [새창]
2017/06/16 05:02:10
대외진출의 흐름을 봐도 1세기 중엽 나부체제 성립체제 전에는 대규모 군사정복 활동은 존재하지도 않았음.
1세기 후반에 근처의 동옥저, 동예를 복속하고 3세기나 되야 옥저에서 세금거두기 시작했는데, 서기 50년 경부터 120년동안 방어하기도 어려운 회랑지역인 요서를 군사적으로 점유했다는건 타당성이 없음.

더불어 한변군(현도군,요동군)에 대한 공략 자체가 2세기 전반에 시작. 주변 한변군도 정리 못하고 있는시기에 요서진출이라니 타당성 없음.
---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nh&types=&synonym=off&chinessChar=on&levelId=nh_005_0020_0020_0020_0020&position=-1

1세기 중엽경 나부체제가 성립되면서 고구려의 대외정복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계루부왕권은 각 나부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대외정복을 전개하였는데, 크게 두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동해안 방면의 옥저와 동예를 복속하고 이 지역의 풍부한 해산물을 확보하여 확고한 배후기지로 삼았다. 고구려는 내적인 성장을 바탕으로 한군현의 성쇠 및 邊民지배정책의 추이를 면밀하게 살펴 1세기 후반경에는 동옥저를, 2세기 중·후반경에는 동예를 복속하였다. 그런데 3세기 전반경 고구려는 옥저의 사회질서를 유지시킨 채 공납을 징수하는 속민지배·집단예민지배를 실시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옥저의 大人을 使者로 삼아 읍락사회를 통솔하도록 하는 한편 고구려의 대가로 하여금 조세를 통책하도록 하였다.

 한편 고구려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군현과 직접적인 군사대결을 전개하였다. 1세기말∼2세기초경 현도군을 蘇子河유역에서 渾河유역의 瀋陽―撫順 방면으로 퇴축시킨 뒤, 2세기 전반에는 현도군과 요동군 공략에 나섰다. 이 때 고구려는 나부의 군사력뿐 아니라 예맥·선비 등 주변 종족집단까지 동원하여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 태조왕 53년(105) 요동을 공격하여 6개 현을 약취한 이래 현도군과 요동군을 계속 공략하여 태조왕 69년(121)에는 선비 8천 인을 거느리고 요하유역의 군사 요충지인 遼隊를 공략하였다.

그리고 차대왕 1년(146)에는 요동과 한반도 서북을 잇는 교통로상의 요충지인 압록강 하구의 西安平을 습격하여 帶方令을 살해하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그런데 한군현 공략은 동해안방면 진출과 달리 인민을 노획하고 재물을 초략하는 약탈적 성격이 강하였다. 이는 기본적으로 한군현세력이 강하였기 때문이겠지만, 고구려 또한 한군현지역에 진출하여 직접 지배할 만큼 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계루부왕권은 한군현 공략에서 획득한 포로와 재물을 전쟁에 참여한 각 나부세력이나 이종족집단에게 분배함으로써 왕권의 기반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고, 때로는 한군현과 타협하여 보상을 받고 반환하여 대외적 위상을 높이기도 하였다.
967 2017-06-16 11:06:45 0
초기 고구려는 요서를 100년이상 차지했다. [새창]
2017/06/16 05:02:10
상군은 국경과 맞닿지 않은곳이었음에도 침공을 받음.
당시 국경이 현대국가들처럼 선/면으로 이루어진게 아니므로, 기동력을 가진 북방유목민 입장에서 국경지역인 구원군이나 북지군을 점유하고 있을 이유도 필요도 없음. 공격할 가치가 있는 ( 군사력이 직접되어 있다거나, 치소가 존재한다거나, 재부가 쌓여있다거나, 대게는 이 3가지 같이 가지만 ) 지점을 공격하면 그만.

기록에도 약탈이나 습격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왜 배후지인 요서지역이 고구려 손에 있어야 하는지?
966 2017-06-16 11:02:46 1
초기 고구려는 요서를 100년이상 차지했다. [새창]
2017/06/16 05:02:10
https://books.google.co.kr/books?id=nMTbCQAAQBAJ&pg=PT834&lpg=PT834&dq=%ED%9D%89%EB%85%B8+%EC%83%81%EA%B5%B0%EC%95%BD%ED%83%88&source=bl&ots=_rTGISlHes&sig=go3goCl-jkr6viX1nb3MtvNMjkA&hl=en&sa=X&ved=0ahUKEwjTqrPmocHUAhWIkZQKHRjRDk4Q6AEILjAB#v=onepage&q=%ED%9D%89%EB%85%B8%20%EC%83%81%EA%B5%B0%EC%95%BD%ED%83%88&f=false
그 다음해, 흉노가 다시 대군, 정양, 상군등에 각 3만의 기병을 이끌고 쳐들어가 수천명의 백성등을 살해하고 약탈

965 2017-06-16 10:41:57 1
초기 고구려는 요서를 100년이상 차지했다. [새창]
2017/06/16 05:02:10
글 내에서도 일관성이 전혀 없습니다.

(광무제 건무) 25년 봄, 구려(句驪)가 우북평(右北平)·어양·상곡·태원을 노략질하였으나 요동태수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의로써 이를 초유하니 모두 다시 항복하였다. -> 노략질했다가 항복했다고 되어 있는데, 웬 갑자기 "점령"입니까?

고구려 본기에 달랑 한줄 요서에 10성을 쌓아 방비했다는 한줄이 있을 뿐이에요.
심지어 저 넓은 요서지역에 성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요. 요하근처에 있을지, 아님 더 깊숙히 들어가 있는지 기록도 근거도 아무것도 없지요.

근데 이걸 보고 요서를 120년간 "점유"했다구요?
소설쓰세요?
964 2017-06-16 10:36:33 0
초기 고구려는 요서를 100년이상 차지했다. [새창]
2017/06/16 05:02:10
지도에 찍은 병주 위치는 당시 한나라 수도인 낙양이 있던 곳입니다.
그리고 "침범"했다고 했지 "점령"했다는 기록이나 유물이 있나요? "침범"을 "점령"으로 해석하는 근거가 뭔가요?

963 2017-06-16 10:34:48 0
초기 고구려는 요서를 100년이상 차지했다. [새창]
2017/06/16 05:02:10
KBS스페셜 언제 몇편에서 북평/어양/상곡/태원을 저렇게 위치비정을 했는지 알려주세요. 본인이 읽고 찾아서 쓰셨으면 당연히 아시겠죠? 그 프로그램이 어떤 문헌과 어떤 유물을 기초로 저런 추정을 했는지 명확하게 알아야하지 않겠어요?
962 2017-06-16 00:31:27 0
[새창]
지나족은 소설 치우천왕기에 나오는 건데요? 환타지와 현실 좀 구분해주세요.
961 2017-06-15 18:00:46 3
김부겸 오보낸 한겨레 이정연 "기자" [새창]
2017/06/15 16:19:27
이건 기자 잘못이라기 보다는 데스크 잘못입니다.
한번 나간 기사 수정은 데스크 허가없이면 될 수가 없어요. 기사삭제나 정정보도, 사과보도 모두 마찬가지구요.
한겨레 전체가 책임을 져야하는 문제고, 데스크를 교체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조중동도 안하던 짓인데, 한겨레 이딴 짓을 했으면 당연히 데스크 갈고 일면에 사과보도 내야죠.
960 2017-06-15 17:45:23 0
이 두가지 차이가 뭔지 궁금하네요 [새창]
2017/06/15 16:57:23
내용상으로는 동일한데 임원과 직원의 신분차이때문입니다.
직원은 회사가 징계를 내려 6개월간 휴직상태에 준하게 만들수 있지만,
임원에 대한 신분상 처리는 이사회의 동의가 필요한 문제라서요.

다시 말해 당장 자를 수는 없으니, 일단은 이사회 결정시까지 업무를 못하게 하라는 거죠.
그건 당장 가능하니까요.
<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
< 31 32 33 34 35 >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