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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9 2017-06-15 17:11:58 17
[이겼네요!] 고개숙인 CJ E&M [새창]
2017/06/15 15:13:04
방송컨텐츠 제작환경이 너무 열악해서, 업계 메이저인 CJ E&M의 조치로 많은 변화를 기대합니다.
최저임금도 아랑곳 않는 도제식 업무체계에, 몇일 씩 밤새는건 기본이고, 심지어 그러면서 식사나 휴식환경조차 열악한게 오랜기간 방송환경이었어요.
성희롱이나 막말은 말할것도 없고 결제체계도 너무 엉망입니다.

이렇게 극악한 환경에서 어떻게 한류가 일어나고 그게 유지가 되는지 신기할 지경입니다.
방송컨텐츠쪽이야말로 가장 대표적인 열정패이/노동자착취로 유지되는 산업분야가 아닌가 합니다.
958 2017-06-15 15:50:56 2
모택동이 언급한 한국인들의 영토는 ? [새창]
2017/06/15 15:42:37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626249.html
마오 주석은 북-중 국경조약 체결 직후인 1964년 10월 베이징을 찾은 최용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 북한 대표단을 만나 “당신들의 경계는 요하 동쪽(요동)인데, 봉건주의가 조선 사람들을 압록강변으로 내몬 것이다”라고 말했다. 마오 주석의 이런 발언은 1964년 10월 중국 외교부가 펴낸 <모택동접견외빈담화기록휘편> 제11책에 실려 있다.

마오 주석은 이에 앞서 1958년 11월 베이징을 방문한 김일성 수상 등 북한 대표단과 만나서도 “당신들 선조는 당신들의 영토가 요하를 경계로 한다고 말했으며, 당신들은 현재 당신들의 압록강변까지 밀려서 쫓겨왔다고 생각한다. 당신들이 역사를 기술할 때 이것을 써 넣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1958년 11월 중국 외교부가 펴낸 <모택동접견외빈담화기록휘편> 제4책에 실려 있다.

한편, 1964년 10월 마오 주석을 만난 북한의 박금철 당시 노동당 중앙위 부위원장은 마오 주석의 요동 영토 관련 발언을 듣고는 “양국 간 국경은 1962년에 이미 해결됐습니다. 주은래 총리가 아주 분명하게 백두산과 천지 문제를 모두 합리적으로 해결했습니다”라며 “현재의 국경선에 우리는 만족합니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두고 북한의 우선권을 주장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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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새로운 사실인가요? 고조선/고구려때 요동땅 점유했죠. 그건 교과서에도 나와요.
957 2017-06-15 14:46:15 0
도종환 의원의 유사역사학 문제 관련 국회 청문회 수준 [새창]
2017/06/15 14:36:41
http://www.koreahiti.com/news/articlePrint.html?idxno=2081
바른정당 김세연 의원이 학술발표회 축사를 하고 있다. 김세연 의원은 지난 19대 국회의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에서 활동한 경험을 되 살려 조선총독부의 식민사관이 우리 국사책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청산 작업에 나설 것을 분명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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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연 의원 도종환 후보자랑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발표때 같이 참여 했었어요.
무슨 질문을 할건지는 기대도 안했습니다.

954 2017-06-15 10:06:05 3
역사 게시판의 소수의견에 대한 생각. [새창]
2017/06/15 04:03:30
근거는 당연히 교차검증 가능해야 하고 ( 님만 아는 내용 아무리 길게써도 그냥 그건 님의 주장입니다 )
출처가 명확해야 합니다. 아니면 말할 가치가 없지요.
어디 한번 기대하겠습니다. 얼마나 토론할 가치가 있는 입장과 근거를 제시 하는지.
953 2017-06-15 10:03:54 4
역사 게시판의 소수의견에 대한 생각. [새창]
2017/06/15 04:03:30
학술은 자유롭게 토론되어야 하나 논리적인 전개에 따라 명확한 근거를 가지고 진행되야 합니다.
다른 사람 글 통채로 긁어오는것 말고는 아무것도 못하시는 분이 무슨 "학술"을 논하고 "토론"을 논합니까?

본인이 직접 읽은 걸 가지고 명확하게 근거를 가지고 주장하면 그걸 읽고 말해드리죠.
하지만 지금까지 올린 글들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얘기 드리지만 모두 가치 없는 글입니다.
952 2017-06-14 23:25:08 0
뭐 하나 물어봅시다 [새창]
2017/06/14 20:56:05
오 그렇군요. 주장은 내가 한다. 해결은 니들이 해라!
951 2017-06-14 20:29:18 1
일제의 낙랑군 위치 유물조작 [새창]
2017/06/14 16:22:05
5분의 1 읽었는데, 근거없는 주장 7개에 기각된 주장 1개군요.
대체 어디서 이런 쓰레기 글을 긁어와요?
950 2017-06-14 20:27:32 1
일제의 낙랑군 위치 유물조작 [새창]
2017/06/14 16:22:05
(2) 모든 속현이 군의 태수부로 문서를 올리고, 태수가 상부(자사), 인접 군, 그리고 속현(屬縣)에 문서를 내릴 때 봉니를 사용하는 것이므로 태수부에 태수의 인장이 찍힌 봉니가 나올 수 없는 데 소위 그들이 말하는 낙랑군 지역에서 '낙랑태수장'이란 봉니가 나타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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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research&No=3&Num=13
봉니(封泥)는 고대 중국에서 널리 유행하였는데, 행정기관들이 문서나 물건을 보낼 때 진흙으로 봉하고 거기에 도장을 찍어 신용을 보장하는 데 사용되었던 것이다. 봉니(封泥)의 출토는 1822년에 중국 사천성(四川省)에서 처음 발견된 후 수많은 예가 출토ㆍ발견되면서 1920~30년대에 집대성되었다.

봉니는 그냥 개인사인에 가까운겁니다. 태수의 인장이 찍힌 봉니가 못나온다구요? 근거가 뭡니까?
949 2017-06-14 20:22:42 1
일제의 낙랑군 위치 유물조작 [새창]
2017/06/14 16:22:05
(1) 봉니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중국 본토의 옛 군현지역에서도 이렇게 많은 양이 나타난 곳은 없다. 그 것은 글을 받은 군현의 수령이 봉니를 열면 부서져 버리기 때문에 개봉하지 않은 채 봉니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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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이 쓰여졌을때는 없었는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4,600개의 한나라 봉니가 특정지역에서 발굴된바 있습니다. 따라서 이 주장 기각입니다.
http://www.huaihai.tv/news/24hours/2016-02-18/285248.html , 2016년 2월 18일 기사
948 2017-06-14 19:59:51 1
일제의 낙랑군 위치 유물조작 [새창]
2017/06/14 16:22:05
특히 이 토성은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도와 황해도에 걸쳐 있었던 막조선(莫朝鮮)과 낙랑국(樂浪國)의 유적으로 한(漢)의 유물들이 출토되는 것은 낙랑국이 멸망당한 후(고구려 대무신왕 20년, AD37년) 고구려가 생포한 한인(漢人) 포로수용소로 사용된 때문인 것으로 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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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와 황해도에 걸쳐있던 막조선과 낙랑국? 이게 근거가 뭔가요? 막조선은 환단고기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말고는 어디에도 안나오는 얘긴데, 어느쪽이 근거인가요? 유물은 확인됐구요? "낙랑국"이라는 국가가 나온 기록이 있나요? 유적이나 유물은요?

그리고 고구려가 생포한 한인 포로수용소? 이건 근거가 뭐에요?
946 2017-06-14 19:56:53 1
일제의 낙랑군 위치 유물조작 [새창]
2017/06/14 16:22:05
이상의 제 이유로 이 토성은 한(漢)의 낙랑군 치소가 아니라 어울동토성(평남 온천군), 운성리토성(황해 은율군), 청산리토성(황해 신천군), 소라리토성(함남 영흥군) 등과 함께 BC3-2세기경의 것으로 BC1000년경의 전반기 고조선문화(비파형동검문화)를 계승한 세형동검문화(細形銅劍文化)의 유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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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78&itemId=nh&synonym=off&chinessChar=on&position=5&levelId=nh_003_0020_0010_0010_0020
이외에도 청동기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시기(구체적으로 비파형동검이 유입되는 시기)를 청동기시대로 보아서 비파형동검은 기원전 4세기 정도로 보고, 세형동검은 1기가 기원전 4세기 말∼기원전 2세기 초, 2기가 기원전 2세기 후반∼기원전 1세기 말, 그리고 3기는 제2식 세형동검(절대가 검의 하반부까지 내려오는 식)이 사용된 시기로 기원전 1세기 후반에서 기원후 1세기 말경까지로 보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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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형동검은 1기부터 3기까지 기원전 4세기말에서 기원전 1세기 후반까지 시기가 추산됩니다.
위에서 기원전 3~2세기라고 주장하시는데 근거가 뭔가요? 왜 BC4~1후반까지 걸치는 영역에서 1,2기에 걸친 영역을 주장하는 근거가 있습니까?
해당지역에서 1,2기 중간에 해당하는 세형동검이 발견이라도 됐나요?
945 2017-06-14 19:53:04 1
일제의 낙랑군 위치 유물조작 [새창]
2017/06/14 16:22:05
위에 3번에 보면 "기록에 의하면"이라고 나오는데 이 기록이 뭡니까?
이거 참 볼수록 웃기는 글인데, 책이름은 전혀 안나오고 "역사서에", "기록에 의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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