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유인페이지
개인차단 상태
brianjung님의 개인페이지입니다
회원가입 : 15-12-04
방문횟수 : 758회
닉네임 변경이력
일반
베스트
베오베
댓글
914 2017-06-13 18:03:07 0
도종환을 환빠, 사이비역사학으로 몰고가는 건 억지. [새창]
2017/06/13 15:36:57
추측이 아니라 다른 사서에도 안나와있고, 유물도 없는데
삼국사기에 1줄 나오니까 그런겁니다.
이게 도종환 후보자 태도랑 뭐가 틀립니까? 삼국사기에 1줄 나오면 그냥 그대로 사실로 인정되나요?
삼국사기가 무슨 절대 안틀리는 성선가요?
913 2017-06-13 17:59:50 0
도종환 후보자 끝난게 아니었군요 [새창]
2017/06/13 11:39:07
말씀을 하시려면 인용해서 얘기를 해주세요.
아무 링크나 근거없이 그냥 그렇게 말했다하면 님 말씀을 제가 믿어야 되나요?
912 2017-06-13 17:58:40 0
도종환 후보자 끝난게 아니었군요 [새창]
2017/06/13 11:39:07
다른 분은 모르겠지만, 전 도종환 후보자를 유사사학, 사이비로 몬적 없습니다.
단지 그분의 역사관이 공직을 맡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 뿐이고, 청문회때 당연히 이 부분에 대한 상세한 소명이 필요합니다.

http://pokr.kr/meeting/193323215837/pdf
삼국사기 초기 기록이라고 하는 것은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의 토대가 구축되기 이전의 기록으로서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대해서는 아까 이덕일소장께서 지적하셨듯이 불신론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믿자라는 신빙론도 있고, 이런 것들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해야 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불신론은 식민지 사학에 의해서 제기되었던 것은 맞습니다.

그것은 이미 한국 학계에서 폐기되어 있습니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믿지 않는다, 아무도 없습니다.
저 역시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의존해서 역사를 구성하고 논문을 쓰고, 많은 학자들이 있습니다.
지금 출간되어 있는 한국 고대사의 많은 논문들을 보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이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런데 불신하고 있다라는 지적은 현재 학계의움직임을 전혀 보지 않은, 이해하지 못하는 말씀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단, 한국 학계에서는 이것을 무조건 믿을 것이냐 아니면 이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것이냐라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
속기록 전문에서 임기환 교수가 발언반 부분 인용합니다.
대체 어디를 인정했다는 건가요? 속기록 보시긴 보신거에요?
911 2017-06-13 15:04:19 0
[재업]동북아역사지도에 독도가 안나오는게 맞음 [새창]
2017/06/13 14:42:16
논쟁의 대상인 삼국사기 신라본기 우산국 기록이외에 교차검증으로 인정할수 있는 자료에서 독도가 영토로 표시된 지도가 얼마나 되 있는지
자료 제시 바랍니다. 저는 신라본기 우산국기록이외에 다른 기록 본 바 없습니다. 1900년에 공식기록 등장했는지 그 이후부터 한일합방전까지 지도에는 나왔겠죠.

하지만 동북아특위에서 문제된건 1900-1910년 아닐 신라시대입니다.
910 2017-06-13 14:55:53 0
도종환 후보자 끝난게 아니었군요 [새창]
2017/06/13 11:39:07
http://todayhumor.com/?history_21059
석탈해가 아진포에 도착했을때 마이너스 13세라는것, 백제 고이왕의 사망한 나이가 최소 120살이라는것,
그리고 미추이사금의 사위 실성마립간이 장인 사후 133년에 사망했다는 상세한 기록이 나와있습니다.
그래서 맥락에 맞추어 엄밀하게 해석해야 한다는 이야기죠.
---
주류학계 입장은 삼국사기 불신론이 아니라 "엄밀하게 독해하자"는 입장인데 왜 왜곡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초기기록 위와 같습니다. 그대로 읽으면 대체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고이왕이 120살에 사망한걸로 기억하면 되나요? 실성마립간은 장인죽고 133년 후에 죽었구요?
석탈해는 태어나기 전에 아진포에 도착했습니까?
909 2017-06-13 14:37:47 0
도종환 후보자 끝난게 아니었군요 [새창]
2017/06/13 11:39:07
http://todayhumor.com/?history_28150
이왕 공부를 권하셨으면 제가 전에 올린글도 봐주시요. 이건 지금까지 도종환 후보자가 해명한적 없는 내용입니다.
앞으로 해명할때 당시 속기록 발언에 대해 뭐라고 할지 궁금합니다.

도종환 위원 : 성을 쌓았다고 그랬잖아요?
참고인 임기환 : 태조왕 때 요서 10성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요서 10성을 쌓았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이 기 사가 그 이후에 다른 자료들을 다 파악해 보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로 실현되는지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기사 역시 저희 지도에 반영하지 않았습니다.
도종환 위원 :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세요?
참고인 임기환 : 검토돼야 될 기사, 현재로서는 이 기사대로 이 기사에 맞춰서 지도를 그릴 수 있는 근거가 확보되지 않았습니다.
도종환 위원 : 삼국사기에 나오는 기록 아니에요?
참고인 임기환 : 예, 맞습니다.
도종환 위원 그런데 왜 그걸 인정을 안 해요?
참고인 임기환 : 삼국사기 기사만이 아니라 모든 기사를 다 합쳐서 관련 상황에서 합리적인 조항을 추정하는 것이 기본적인 태도라고 생각을 합니다.
도종환 위원 : 우리 거는 인정하지 않고 인정하 지 않을 수 있는 다른 것들까지 고려해서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런 말씀이신가요?
참고인 임기환 : 아니지요. 우리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 피 사료 비판을 통해서 삼국사기 기록을 적극적 으로 검토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 하나를 가지고 저희가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 니다.
도종환 위원 : 이해할 수가 없네요
---
가장 완성도가 뛰어나 사서인 조선왕조실록조차 승정원일기, 비변사초, 민간기록과 대조하여(교차검증) 하여 사실을 확정합니다.
하물며 12세기 초기 천년전 역사를 기록한 책은 당연히 교차검증과 유물검토를 통해서 사실확정을 하는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도종환 후보자께서는 당시 "삼국사기에 나왔으면 당연히 맞는것 아니냐"라는 대단히 비합리적이며 비학문적인 태도를 밝히신바 있습니다.
908 2017-06-13 14:35:06 0
도종환 후보자 끝난게 아니었군요 [새창]
2017/06/13 11:39:07
http://todayhumor.com/?history_20507
다른 분이 쓰신 이전글인데, 제 입장과 동일해서 인용합니다.
전 임기환교수가 했던 말 ( 나중에 수정해서 표기하겠자 )도 적절한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과거 역사기록을 보면 우산국(울릉도)이라고 나와있지, 독도를 점유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동북아역사지도는 기록과 유물에 기반해서 작성된 것이고, 그대로 했을 뿐입니다.

독도에 대해 그나마 기록이 등장하는건 1900년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건 일본의 책동에 넘어가는거 아니냐는 오해를 하시는데,
( 기록에 없으면 독도가 우리땅이 아닌것처럼 보인다는 )
국제사법재판소는 영토점유와 관련된 판결에서 일관된 입장이 있습니다.
"역사적 연원"따위는 고려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현재 평화롭게 점유하고 있는 걸 최우선으로 해요.

과거에 독도를 점유했다는건 현실의 독도영토인정에 아무런 고려대상이 아닙니다.
실제 국재사법재판소가 관여했던 모든 영토점유사건에서 일관되게 적용한 원칙입니다.

따라서 현재 독도를 평화롭게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거지,
과거역사에 그게 나왔느냐 안나왔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이유로 동북아역사지도에 왜 과거 독도가 안나오냐고 하는건,
현실적 필요로 ( 존재하지도 않는 필요지만 ) 역사를 왜곡하는 겁니다.
906 2017-06-12 00:04:30 2
낙랑목간은 낙랑군 평양설 확실한 증거다? [새창]
2017/06/11 22:43:07
http://contents.history.go.kr/mfront/km/view.do?levelId=km_027_0030_0020_0010 , 고구려 사례
지금까지 고구려 지역에서 보습이 여럿 발견되었다. 예를 들면 지안(集安) 유림향(楡林鄕) 지구촌(地溝村) 칠보구(七寶溝) 남산(南山) 출토 보습, 지안 태왕릉(太王陵) 서측(西側) 출토 보습, 지안 동대자(東臺子) 건축 유지(建築遺址) 출토 보습, 푸순(撫順) 고이산성지(高爾山城址) 출토 보습, 청원(淸原) 영액문(英額門) 산성자(山城子) 남파하(南坡下) 출토 보습, 평양시 상원군 고구려 석실분 출토 보습, 황해남도 신원군 아양리 남평양 유적 출토 보습, 아차산 제4 보루 유적 출토 보습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밖에도 지안 지역에서 몇 개의 보습이 더 출토되었다는 보고가 있고, 또 평양 근처의 정릉사(定陵寺) 터 우물 유지에서도 보습과 볏이 발견되었다
---
이런 고구려도 무덤에서 농기구가 나오네?
905 2017-06-11 23:52:27 2
낙랑목간은 낙랑군 평양설 확실한 증거다? [새창]
2017/06/11 22:43:07
지배층이었다면 농기구를, 농군이라면 지배층인 관리가 사용하는 필기구나 관복에 사용하는 띠걸이를 같이 넣어 묻었을 리 없다는 것이다.

어디서 이런 되도 않는 소리를 주장하시는지 모르겠으나, 지배층 무덤에 농기구가 들어있다는 증거를 보여드리죠.
http://contents.history.go.kr/mfront/km/view.do?levelId=km_005_0060_0020_0040 , 가야 고분
또한 가야의 무덤에서는 백제계 유물에서 보이는 것처럼 쇠도끼, 낫, 살포 등 다양한 종류의 도구를 작은 모형으로 만들어 껴묻었다. 이것은 실생활 도구를 그대로 작게 만든 것으로 죽은 이가 사후에도 현실 생활을 유지하게 하려는 내세관과 함께, 농업을 중시하는 풍조를 알 수 있다.

이 시기 지역 지배층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농기구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살포이다. 살포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우리나라 특유의 농기구로서, 김매기할 때 사용한다. 살포의 등장으로 U자형 따비(갈이), 살포(김매기), 낫(걷이)이라는 단계적인 지배층의 농기구가 완성되었다. 수장층의 무덤인 옥전 M3호에서 출토된 살포는 논농사를 장악하고 통치하는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http://contents.history.go.kr/front/km/print.do?levelId=km_005_0060_0020_0030&whereStr= , 백제 고분
백제 지역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유물 가운데 소형 철제 농기구 모형도 특색이 있다. 이것은 백제의 금강 유역과 영산강 유역, 대가야 지역에서도 출토되는데, 대체로 4세기 초에 금강 유역에서 출현하여 5∼6세기를 지나면서 다른 지역으로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모형 농기구란 실제 사용하는 농기구를 모델로 하여 3∼10㎝ 정도 크기로 작게 만든 것으로, 낫, 살포, 따비, 도끼 등이 있다. 이것은 아마도 실용 농기구를 상징화한 의례 도구이거나 껴묻거리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용구일 것이다. 이렇듯 철제 농기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작은 모형으로 만들어 껴묻었다는 것은 그만큼 당시 사회에서 농업을 상당히 중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모형 농기구는 지역 지배자의 무덤에만 다량으로 껴묻히는데, 지배자가 농업 생산에 필요한 농기구를 분배하고 풍요를 기원하는 농경 의례를 주도하는 등 경제적 기반인 농업 생산력을 장악하였음을 말해 준다.
---
가야,백제 지배층 무덤에서는 농기구 나온답니다.
심지어 백제는 지배층 무덤에서 농기구가 나옵니다.

문성재 박사가 누군데 지배층 무덤에 농기구가 없다는 개소리를 하세요?
904 2017-06-11 02:33:33 0
'고려 중기 동북 국경에 관하여' - 윤관 9성을 중심으로 (이인철 교수 [새창]
2017/06/11 02:18:30
사료기록이 있다하시니 사료기록 좀 보여주세요.
윤관9성이나 공험진 위치비정은 여전히 논란상태입니다.

조선총독부가 조작했다고 주장하시는데 무슨근거로 그러시는지 말씀좀 해주시고 ,
유형원, 신경준, 한진서, 윤정기같은 조선총독부가 뭔지도 모르는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훨씬먼저
길주이남에 윤관9성과 공험진이 있다고 주장한바 있습니다.
903 2017-06-11 02:00:33 0
여전히 잘못되어있는 고려 윤관의 9성 위치 [새창]
2017/06/11 01:33:40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5847
그리고 9성이 한반도 내부에 있다는 길주이남설도 일본인들이 주장한게 아니라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주장했습니다.
항상 이게 일제시대 일본학자들 의견추종했다는 환타지들을 쓰시는데,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이런 주장을 훨씬 먼저했습니다.

(3) 길주이남설
윤관이 진출한 지역의 북쪽 한계는 길주 이남이라는 견해이다. 이같은 주장은 17세기 초 한백겸(韓百謙)에서 비롯되는데, 공험진의 고려정계비는 마운령(磨雲嶺) 꼭대기에 있을 것이라는 가설에서 출발하고 있다.
고려정계비에 대한 인식은 진흥왕순수비를 오인한 데서 기인하며, 그의 가설은 조선 후기 고증지리학자들인 유형원(柳馨遠)·신경준(申景濬)·한진서(韓鎭書)·윤정기(尹廷琦) 등에게 계승되었다.
902 2017-06-11 01:54:25 0
여전히 잘못되어있는 고려 윤관의 9성 위치 [새창]
2017/06/11 01:33:40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5847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함흥평야설
쓰다(津田左右吉)의 북청이남설(北靑以南說)의 발전형태로 제기된 이케우치(池內宏)의 견해이다. 현재 정설처럼 학계나 교과서에 수록되고 있다. 즉, 윤관이 개척한 범위는 함흥평야에 해당하며, 구성의 소재지도 제시하고 있다.
즉, 함주대도독부(咸州大都督府)는 함흥, 영주성은 함경남도 신흥군 동흥리 산성, 길주성은 함경남도 함흥군 산대리 산성, 복주성은 함흥군 탑동리 산성, 웅주성은 함흥군 퇴조면 신동리 산성, 공험진성은 함흥군 대덕리 산성, 통태진은 함흥군 운성리 산성, 숭녕진은 함흥군 운흥리 중봉산성, 진양진은 함흥군 오로리 금반산성에 비정하였다.
---
이케우치의 견해는 북청이남설이 아니라 함흥평야설입니다.
901 2017-06-11 01:46:32 0
여전히 잘못되어있는 고려 윤관의 9성 위치 [새창]
2017/06/11 01:33:40
세종실록 지리지 다시보세요.
155권 지리지 함길도 길주목 경원도호부에 공험진 있다고 나옵니다.
---
http://db.history.go.kr/KOREA/search/searchResult.do?itemIds=kr&sort=levelId&dir=ASC&limit=20&page=1&synonym=off&chinessChar=on&searchTermImages=%EA%B3%A0%EB%A0%A4%EC%82%AC+%EC%A7%80%EB%A6%AC%EC%A7%80&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A%B3%A0%EB%A0%A4%EC%82%AC+%EC%A7%80%EB%A6%AC%EC%A7%80&searchKeywordConjunction=AND#searchDetail/kr/kr_056r_0010_0010/2/0/2/r
고려사 지리지 서문

그 사방 경계[四履]는, 서북은 당(唐) 이래로 압록(鴨綠)을 한계로 삼았고, 동북은 선춘령(先春嶺)을 경계로 삼았다. 무릇 서북은 그 이르는 곳이 고구려에 미치지 못했으나, 동북은 그것을 넘어섰다.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108006_002
세종실록 86권, 세종 21년 8월 6일 임오 2번째기사. 여기서 나온 선춘점이 선춘령입니다.

《고려사(高麗史)》에 이르기를, ‘윤관(尹瓘)이 공험진(公嶮鎭)에 비(碑)를 세워 경계를 삼았다. ’고 하였다.
지금 듣건대 선춘점(先春岾)에 윤관이 세운 비가 있다 하는데, 본진(本鎭)이 선춘점의 어느쪽에 있는가. 그 비문을 사람을 시켜 찾아볼 수 있겠는가.

http://sillok.history.go.kr/popup/print.do;jsessionid=4D7E7089B31607F9F85385E5222ABA16?id=kda_40011004_001&gubun=all
세종실록 155권, 지리지 함길도 길주목 경원 도호부
경원 도호부(慶源都護府) ( 현재 함경북도 경원군 )

고려의 대장(大將) 윤관(尹瓘)이 호인(胡人)을 몰아내고 공험진 방어사(公險鎭防禦使)를 두었다.
본조 태조(太祖) 7년 무인에 덕릉(德陵)과 안릉(安陵)이 있다고 하여 경원 도호부로 승격시키고, 성(城)을 수축하기 위하여 땅을 파다가 인신(印信) 1개를 얻었는데, 그 새긴 글에 ‘광주 방어지인(匡州防禦之印)’이라고 되어 있었다.

중략. 수빈강(愁濱江)이다. 【두만강 북쪽에 있다. 그 근원은 백두산 아래에서 나오는데, 북쪽으로 흘러서 소하강(蘇下江)이 되어 공험진(公險鎭)·선춘령(先春嶺)을 지나 거양성(巨陽城)에 이르고, 동쪽으로 1백 20리를 흘러서 수빈강이 되어 아민(阿敏)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기 20리, 서쪽으로 경성(鏡城) 두롱이현(豆籠耳峴)에 이르기 40리, 남쪽으로 연해(連海) 굴포(堀浦)에 이르기 12리, 북쪽으로 공험진에 이르기 7백 리, 동북쪽으로 선춘현(先春峴)에 이르기 7백여 리, 서북쪽으로 오음회(吾音會)의 석성기(石城基)에 이르기 1백 50리이다.
---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공험진은 오늘날 함경북도 경원군에 있습니다.
900 2017-06-11 01:27:41 0
"역사학자는 '사실' 찾는 사람.. 다른 견해도 존중을" [새창]
2017/06/11 01:18:08
http://todayhumor.com/?history_21143
요동정벌군 출발당시에 이미 철령위는 요동에 있었어요 ( 처음부터 요동에 설치됐다는 말입니다 )
요동지에 첫번째 철령위가 설치된 철령성이 "고려와 경계를 접했다"고 나옵니다.
현재 학계에서는 랴오닝성 봉집현으로 이 첫번째 철령위 설치장소를 비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요동으로 갔구요.

여기서 포인트는 옛날 고려 철령(현재 함경도 원산으로 비정되는)에 철령위가 있을거라고 "왜" 생각을 했냐는 겁니다.
철령위 "본부"는 고려 철령에 있던 적이 없다는게 결론입니다.

철령위 위치 비정을 처음에 한 일본사학자 이케우치 히로시도 철령위 본부가 한반도 철령에 있다고 한적이 없어요.

고등학교 지리부도 보고 지명이 철령이니 거기에 철령위가 있다고 말한다고 생각한겁니다.
학계에서 요동 봉집현에 철령위가 설치됐다는 연구는 보지도 않구요.
---
기초적인 사실확인조차 문제가 있는 분을 인정해드리기 어려운건 당연한 일입니다.
"다른 견해"가 아니라 "근거가 없거나", "논리적 개연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주장을 하니까 욕을 먹는거죠.

학계연구조차 제대로 안보는 분이 "다른 견해도 존중"이라는 말을 하니 참 어이가 없네요.
<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
< 36 37 38 39 40 >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