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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2012-07-07 18:35:00 76
저 시대에 태어났으면 내가 미녀였을텐데... [새창]
2012/07/07 22:43:20
일단 시대에 따라 미인의 기준은 달랐습니다, 옛날 시대라 해도 무조건 비만이 미인의 기준은 아니었지요,

가령 그림 속에서 여자가 보고 있는 그림의 기준인 르네상스 시대를 기준으로 보자면 알랑드코의 미의 기준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가지 하얀 것, 피부, 치아, 손

세가지 검은 것, 눈, 속눈썹, 눈썹

세가지 빨간 것, 입술, 뺨, 손톱

세가지 긴 것, 몸통, 머리카락, 손가락

세가지 짧은 것, 치아, 귀, 발

세가지 가는 것, 입, 허리, 발볼

세가지 굵은 것, 팔뚝, 허벅지, 다리

세가지 작은 것, 젖꼭지, 코, 머리

즉 르네상스 시대의 미인의 기준은 비만은 아니라는 애기입니다.

덧붙이자면 당시에는 머리는 금발이 제일이라, 자기전 수선화 가루로 머리를 범벅해 놓는 수고도 필요했고 눈썹은 없거나 극히 가는것이 좋아 매일 뽑아야 했습니다.
72 2012-07-06 20:39:02 2
중국역사 고수님들 [새창]
2012/07/06 01:05:32
삼국지연의가 사회의 기반인 유교 질서를 잘 알려주면서도 재미도 나름 있는 이른바 사회의 권장도서 였던 탓에, 이 삼국지연의의 주요한 사건인 적벽대전은 당연히 큰 인기를 끌수 밖에 없었죠,

비수대전도 소위 말하는 중국 3대 대전중 하나로 손꼽힐 정도라 나름 잘 알려져 있기는 합니다, 다만 나머지 두개가 관도와 적벽, 적벽과 곤양으로 자주 바뀌는 탓에 가려지는 면이 없지는 않지만 말이지요.
71 2012-07-06 19:28:29 11
김대중 개새끼 [새창]
2012/07/06 18:23:47
이러한 매우 소위 말하는 시사적인 주제를 다루는 어떠한 역사적인 사건이나 배경을 다루지 않고 특정 인물 비방에 치우친 글은 시사게시판에 좀 더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옮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70 2012-07-06 18:17:36 0
중국 수천년의 폐단과 악습을 근절한 초유의 대개혁(下) [새창]
2012/07/06 16:48:32
적어 놓고 보니 참 뻔한 애기로군요;
69 2012-07-06 18:04:08 2
중국 수천년의 폐단과 악습을 근절한 초유의 대개혁(下) [새창]
2012/07/06 16:48:32
옹정제의 평가가 저조할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무래도 향신들의 눈 밖에 나서가 아닐까 합니다.

향신들은 스스로를 일컫기를 양민이라 하지요,

본문에서 나왔듯이 절대 다수의 인구를 차지하는 대부분의 농민 계층 등이 아닌 소수의 부를 거머쥔 이들이 스스로를 가리켜 양민이라 일컫는다는게 참 아이러니 합니다만 아무튼 자신 들 입맞에 맞게 사상적 기반을 두고 또 현실과 동떨어진 자신들의 이득이 부합하는 바를 국가 정책에 기준을 두려 하였으니 폐단은 당연한 일이겠습니다만 그 들에게 그런 폐단은 당연한것이며 지도자의 문제일뿐이었죠,

그러니 옹정제와 같은 그 들과 척을 지는 개혁 군주들이 좋은 평가를 받기는 힘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68 2012-07-06 08:36:32 3
중국역사 고수님들 [새창]
2012/07/06 01:05:32
일단 이유는 미친나그네 님의 말씀대로 보존의 문제입니다,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면 전공을 세웠으면 확인이 되어야 하는데 이게 바로 앞에 상급자나 혹은 확인을 할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모를까 대개는 먼거리에 떨어져 있기에 다소 쪼그라 들지만 썩지는 않기 때문에 장기간의 보관을 위해 염장을 시켜 보냈습니다.
67 2012-07-05 23:33:26 1
오원춘은 인육을 노렸나???.JPG [새창]
2012/07/04 20:52:29
저는 역사 게시판에 다른 이용자 분들에 비하자면 한없이 부끄러운 수준의 사람일뿐입니다, 높게 평가해주시는건 대단히 감사드리오나 별것 아닌 것으로 유세를 부린듯 하여 참으로 부끄럽네요;

아무튼 댓글을 읽으며 보니 참으로 난감한 애기가 추천을 받았군요, 멍청한 공자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요,

인류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4대 성인에 들어가며 동아시아 역사와 사상에 있어 뺄수도 없고 더할수도 없으며 정신적 토대 그 자체가 된 업적을 세운 공자가 고작 멍청한 운운의 애기를 들을정도라니 참 뭐라 답글을 달아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66 2012-07-05 23:27:50 0
주관적인 역사 객관적인 역사 [새창]
2012/07/05 22:58:19
아무래도 한국인은 '경제발전주의'라는 이념(민주주의, 공산주의, 민족주의, 자유주의와 같은 이념)을 가지고 있다는게 어느 정도 말씀하신 것에 영향을 끼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독재를 하든 깽판을 치든 범법자이든 상관없이 경제발전만 하면 다 되고, 경제 발전은 '선'이다라는 기본적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시사 게시판에 어울릴지 모르는 사례이지만 현재 대통령이 당선된 배경을 보면 어느정도 근간에 깔린 이러한 발상이 쉽게 와 닿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경제발전지상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기가 또 쉽지 않은게 보릿고개라 없어진 것은 통일벼가 들어오면서부터인데 60년대 말까지는 정말로 먹고 살기가 힘든게 사실이었고 현재 사회의 주역이라 하실수 있는 실권자라 하실수 있는 분들은 이러한 과정을 겪으신 분들이니 말입니다.
65 2012-07-05 23:09:48 0
주관적인 역사 객관적인 역사 [새창]
2012/07/05 22:58:19
감정을 떠나 객관적으로 솔직히 말하자면 식민지 근대화론을 두고 벌이는 양자간의 토론은 다소 무의미한 애기가 아닐까 합니다.

식민지를 만든 측의 의도도, 식민지로 전락한 측이 받아들이는 방식도, 그리고 양자의 관계 속에서 벌어진 식민지 현실이 어떤 식으로 '근대화'를 낳아버렸는가에 대한 현실도 어떤 뚜렷한 방향성이 없이 난잡하게 얽혀있는 상황에서 말이죠.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사람마다 다른 것이라 정답이 없습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강간으로 인해 임신하여 아이를 낳은 여자의 이야기와도 같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그 어머니에게 있어서 고통일 수도 있고, 그저 사랑하는 아이일 수도 있고, 둘 다 일 수도 있고, 그 어느 것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 여자에게 "네게 있어서 그 아이는 어떤 존재냐"라고 묻는 것은, 그 여자가 어떤 대답을 해도, 대답을 하는 쪽도, 대답을 듣는 쪽도 받아들이기 힘든 결과만을 낳을 뿐입니다.
64 2012-07-05 23:07:11 0
주관적인 역사 객관적인 역사 [새창]
2012/07/05 22:58:19
그렇다면 현재 한국의 산업화와 근대적 발전의 모델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의 문제가 생기는데, 이것이 바로 식민지 시절에 대한 착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경제학적-통계학적 성향과 결합하면서 현재의 '식민지 근대화론'이 탄생한 것입니다.

즉 총합하자면, 19세기적 영국의 발전모델을 염두에 두고, 20세기적 맑스주의 방법론으로, 근대과학으로서의 통계학과 결합하여 생겨난 것이 현재의 '식민지 근대화론'의 양상이라고 볼 수 있을듯 합니다.
63 2012-07-05 23:05:17 0
주관적인 역사 객관적인 역사 [새창]
2012/07/05 22:58:19
처음에 '식민지 근대화론'을 시작했던 사람들은 역설적이게도 NL계열 운동권으로서, 우리 역사에서 자주적 역량을 통해 서구적 근대화의 씨앗을 찾으려던 이들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안병직은 다산의 연구를 통해, 이영훈은 토지소유형태의 변화를 통해)

하지만 이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19세기적 영국 산업화의 모델과, 20세기의 맑스사학의 방법론(특히 나카무라 데츠, 오오츠카 히사오 등 일본의 강좌파 사학자들의 영향이 컸습니다.)을 비교해서 봤을 때, 조선사회에서 도무지 '서구 근대적 근대화의 씨앗'을 찾을수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죠.

(오히려 그런 점에서 학문적으로는 꽤 '양삼적'이라고 볼수도 있습니다.)
62 2012-07-05 23:02:50 0
주관적인 역사 객관적인 역사 [새창]
2012/07/05 22:58:19
식민지 근대화 론에는 크게 두가지 분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안병직-이영훈 류의 주장으로 이들은 식민지시대를 통해 우리사회의 주요한 근대화의 '기반'이 마련되었고, 그를 통하여 현재의 경제성장이 가능했다고 보는 말 그대로 로스토우-라이샤워 식의 '근대화론'의 견지에서 보는 입장입니다.

반면에 요즘 미국학계에서 주로 나오는 '식민지 근대성'론은, 근대화론에 비해 한국사회의 '발전의 기반'이 식민지 시대에 마련되었다고 주장하기보다는, 현재 한국의 근대적 삶이나 일상 등의 '근대성'이 식민지 시기에 싹텄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61 2012-07-05 22:53:33 0
조선인으로 왜놈들을 다스리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나요? [새창]
2012/07/05 22:43:43
조선 후기에 접어들어 문화적으로 낙후 되었으나 무력적으로 강성하다는 평가를 받아 조선 통신사를 통해 교화를 시켜 피해를 줄여보고자 한것이 일본 입니다, 또한 지배하고 통치한다, 말은 쉽지만 실질적으로 그에 따른 병력 및 물자의 소비를 감당할수 없었던게 조선의 실정이었습니다.

또한 조선 전기에 있어서는 가치가 없었기에 손을 대지 않았지요, 무엇보다 왜구라 함은 비단 일본의 해적만을 지칭하는게 아니기 때문에 함부로 책임을 묻기가 힘들었으며 정벌을 한다 한들 왜구가 근절될수 없었던 사실을 직시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조선이 행한 정벌 역시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던 쓰시마에 한정시킬수 밖에 없었습니다.
60 2012-07-05 12:51:04 1
고조선 bc2333 건국 [새창]
2012/07/05 12:16:25
고조선의 건국 연대는 최소 기원전 7세기에서 최대 기원전 2333년 까지 입니다만 대개는 기원전 10~15 세기 즈음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2333년은 일연스님이 중국의 요순임금과 한반도의 고대국가의 기원을 동일시 하려는 일종의 상징적인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표방하는 민족주의 개념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가 난감하지요,

그리고 청동유물도 고조선이 진정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였는지 아닌지도 분별할수 없는 저급의 유물들이 많이 나오는 바 함부로 단정짓기에 문제가 많습니다.

하지만 사료를 따지자면 춘추전국시대 즈음에는 벌써 한반도에 조선이라는 연나라와 대등할 정도로 발달된 정치체제가 등장했고, 또 기원전 1세기 즈음에는 한나라와 멱살잡이를 할만한 중앙집권 체제 즉 위만조선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고조선이 어느정도의 정치집단이었냐는 아직까지 이견이 많습니다만, 앞서도 언급드렸지만 최소한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즈음엔 강력하지 않아도 국제적으로 융통성이 있는 정치집단을 보유했을 가능성이 큽니다(고조선이 중국 동전을 유통한 고고학전 근거가 있고 무역을 한 사료가 실존합니다).

하지만 이것과는 별개로 한반도 내의 청동기 문화권의 시기는 지금도 계속 올라가는 추세라 한반도 남부만 해도 기원선 10~15세기를 웃도는 청동기 유물이 출토됐습니다. 따라서 고조선의 문명 수준을 가늠해 볼수가 있지요.

덧붙여 여기서 주의해야 할점은 기원전 10~15세기라 주장하는 바의 논거는 토기를 가지고 추정한 것이라는겁니다.. 초기 철기시대의 설정에도 이런 방법이 사용되는데, 그러다 보니 이름으로는 청동기 시대라고 했는데 청동 제품은 없고, 철기시대라고는 했는데 철 제품이 없는 기간이 꽤 길게 나타나게 됩니다.

물론 청동 제품에만 그렇게 집착해야 할 필요는 없고 사회의 발전 정도를 따져보는게 더 발전적인 논의가 되겠지만 청동기 개시 연대를 기원전 20세기까지 올려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논자 가운데 한 분인 최몽룡 선생님은 아예 한국 최초의 국가를 위만조선으로 보시는데 이는 기록으로 확인할수 있는 제대로 체계가 잡힌 고대국가라는 점을 주목한 바에 근거합니다.
59 2012-07-04 21:50:15 7
오원춘은 인육을 노렸나???.JPG [새창]
2012/07/04 20:52:29
집에 와보니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셨네요, 음 아무튼 감사드리며 이전에 썼던 글 중 일부를 발췌하여 몇글자 더 작성해 보려합니다.

우리나라 역사 기록에 이런게 있습니다.

"남의 배를 갈라 사람을 죽인 자를 체포하는 일을 해조로 하여금 공사로 만들게 하라."

(선조 09(1576년)년 6월26일 기사.)

>조선시대, 인육(人肉, 사람의 고기)과 사람의 간담(肝膽, 간과 쓸개)을 창질(瘡疾, 매독)을 치료하는 약으로 썼기 때문에 배를 가르고 사람의 장기를 빼가는 무리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 흉악한 무리들이 소아(小兒)를 사람이 없는 곳으로 유괴하여 살해함은 물론이고 비록 장성한 남녀라도 혼자 길을 가는 경우에는 겁략하여 모두 배를 가르고 쓸개를 꺼내어 갔다고 하는데. 그 쓸개를 팔면 많은 값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나무에 묶여 배를 갈리운 자가 산골짝에 잇달아 있으므로 나무꾼들이 나무를 하러 산에 갈 수가 없었고 이에 왕명으로 법을 만들어 현상금을 걸고 체포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나라가 전통적으로 식인을 했다? 그건 아닐 애기일겁니다.

(더하자면 흔하게 일상적인 식인에 대하여 가장 먼저 떠오르는 아즈텍의 경우는 인신 공양후 남는 시체를 호박꽃이나 토마토에 버무려 먹었습니다만 대부분의 인신공양이 수확기에 벌어진 점이나 그 들의 종교관 등을 볼때 단백질 공급원의 부족이 사유라기보다는 사실상 문화적 배경에 따른 차이라고 봐야 할것입니다.)

어디까지나 광범위하게 벌어지는 식인은 선택의 여지가 없던 극한의 기아의 상황에서 나오는 행동이며 이는 세계에서 어느 문명권이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일입니다,

가령 이러한 사례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나 삼국시대를 비릇한 각종 전란의 시기나 산동성 대기근 그리고 조선의 임진왜란 이나 역시 조선에서 벌어진 2년 간의 대기근으로 최소 10%, 최대 25%가 사망하고 인구의 절대 다수가 기아를 체험했다는 경신 대기근,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대기근 등이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렇다고 이게 상시적인 식인의 증거는 될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지만 어째서인지 중국인들이니까 라는 전제하에 중국인들에게만 증거가 성립되는지도 역시 참 알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제가 필력이 부족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어떻게 잘 전달될지는 모르나 오원춘 관련해서 오유에 올라오는 글들을 볼때마다 참 이성적인 판단이 아쉬울때가 많기도 하고, 이데올로기 반감에서 비릇되는 민족주의적 또 국수주의적 마녀 사냥이나 선동 이라는게 참 공포스럽기도 해서 몇자 적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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