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유인페이지
개인차단 상태
Lemonade님의 개인페이지입니다
회원가입 : 12-06-21
방문횟수 : 1328회
닉네임 변경이력
일반
베스트
베오베
댓글
103 2012-07-14 12:39:06 2
[빽그라운드뮤우직~]라인배틀 [새창]
2012/07/14 02:39:17
사진이 깨져나옵니다, 확인 후 수정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몇자 사족을 짧게 적어보자면 총검의 경우 17세기에 기록이 남아있으며 루이 14세 당시 프랑스 정규장비로 채택되었습니다.

몽고말이나 과하마나 다를바 없습니다, 똑같은 말입니다, 군마에 있어 그 필요성에 따라 훈련을 시키는것은 동서양 다를바 없는 과목입니다.

동시에 사격이라기 보다는 서로 나중에 쏘는것을 선호하는데 신사적인 태도 역시 서로 나중에 쏘겠다는 행동입니다. 이는 머스킷의 명중률 때문인데, 대개 나중에 쏜쪽은 먼저 사격한 측이 재 장전할동안 더 가까이 접근하여 명중률을 높일수 있었습니다,

순차사격은 총기의 발달에 의해 개발된 전법입니다, 쉽게 말해 그 이전에는 이러한 총기의 활용에 대해 고민을 할 필요도 없을정도라 고안이 안돼었다 라고 보시면됩니다.

그리고 기병의 경우 퀴레시어나 드라군, 이후의 카비너에서 볼수 있듯이 전장에서 주역이 보병으로 바뀌면서 그 역할이 달라진 것 뿐입니다, 몰락이라 보기는 그렇죠,

그리고 흩어진 적을 들이치는것은 예비대의 투입에 의한 전과의 극대화입니다,

마지막으로 영국군이라고 다른 국가보다 더 고된 훈련 이런거 솔직하게 말하자면 없다고 보셔도 됩니다, (아 물론 미국 독립군보다야 좀 우세한것은 사실입니다만)

당시 화려한 군복과 군악대 등은 피아식별에도 필요했지만 사기 저하로 전투 이전에 혹은 중간에 와해되는것을 방지하는 목적이 컸는데 레드코트로 대표되는 영국군도 이러한 측면에 힘을 실었지요,

덧붙여 사각 방진 그러니까 테르시오 방진은 가운데 안 빕니다, 창병이 주축이 되어 중심을 이루고 그 사방을 혹은 네 모서리에 총병이 들어가는 형태입니다,

그리고 테르시오 방진은 1. 창병이 기병을 저지한다, 2. 총병의 집단 사격으로 예봉을 꺾는다 3. 운동능력이라는 기병의 유일한 잇점을 상실한 상대에 대하여 창병이 돌격한다의 순입니다.

라인배틀은 선형진을 이루며 대치하는걸 말하는데 테르시오와 선형진은 서로 다른 거죠,

102 2012-07-13 21:24:20 0
비잔티움 쇠망사 (2) [새창]
2012/07/13 08:08:56
실명이 단순한 육체적 고통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군요, 하기사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사실상 인생의 전반을 차지했던게 종교이니 그에 반하는 정신적 고통도 엄청나겠네요,
101 2012-07-12 21:05:53 3
[BGM]몽골의 서양 정복사 [새창]
2012/07/13 15:32:06
그리고 앞에서도 적었습니다만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것이 이미 들어났고 본거지 키에프에서는 너무 먼 데다가 꼭 동유럽을 점령해야하는 이유도 없습니다, 동유럽이 키에프보다 특별히 풍요로운 것도 아니고 살기 좋은 기후가 있는 것도 아니며 사마르칸트처럼 상업이 발달해서 약탈할 거나 많으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죠,

앞서 언급했지만 본거지가 너무 먼 탓에 장기전술이 될수 밖에 없는 이 상황은 약탈하고 돌아갔다 다시오니 원상복귀, 거기에 더욱 철저히 대비하고 있을테고 다시 약탈하고 갔다 오면 좀 더 대비를 강화하고 있을테고 다시 다녀오니 또 원상복귀에다 더욱 대비를 공고히 하고 있고 다시..이하 무한 반복인 상황으로 치닫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은 기껏해야 약탈전쟁인데 군비가 증축되었으며 몽골에 대한 방어기제가 강화된 풍요롭지도 재화가 넘치지도 않는 심지어 이후의 더 먼곳을 향한 원정에 대한 근거지로도 부적절한 어떻게 본다면 참 약탈자 입장에서는 황량하다고 할수 있는 이 헝가리에 막대한 물자와 인력를 소비할 필요성은 당연히 없는것을 생각해본다면 사실상 유럽을 포기한것은 '필요성'의 상황이라고 밖에 볼수가 없지요,

아 그리고 종이 말입니다, 교황은 그 이전 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이슬람 권역과의 교류라는것을 무시할수는 없는 일입니다.
100 2012-07-12 21:05:53 3
[BGM]몽골의 서양 정복사 [새창]
2012/07/12 19:38:26
그리고 앞에서도 적었습니다만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것이 이미 들어났고 본거지 키에프에서는 너무 먼 데다가 꼭 동유럽을 점령해야하는 이유도 없습니다, 동유럽이 키에프보다 특별히 풍요로운 것도 아니고 살기 좋은 기후가 있는 것도 아니며 사마르칸트처럼 상업이 발달해서 약탈할 거나 많으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죠,

앞서 언급했지만 본거지가 너무 먼 탓에 장기전술이 될수 밖에 없는 이 상황은 약탈하고 돌아갔다 다시오니 원상복귀, 거기에 더욱 철저히 대비하고 있을테고 다시 약탈하고 갔다 오면 좀 더 대비를 강화하고 있을테고 다시 다녀오니 또 원상복귀에다 더욱 대비를 공고히 하고 있고 다시..이하 무한 반복인 상황으로 치닫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은 기껏해야 약탈전쟁인데 군비가 증축되었으며 몽골에 대한 방어기제가 강화된 풍요롭지도 재화가 넘치지도 않는 심지어 이후의 더 먼곳을 향한 원정에 대한 근거지로도 부적절한 어떻게 본다면 참 약탈자 입장에서는 황량하다고 할수 있는 이 헝가리에 막대한 물자와 인력를 소비할 필요성은 당연히 없는것을 생각해본다면 사실상 유럽을 포기한것은 '필요성'의 상황이라고 밖에 볼수가 없지요,

아 그리고 종이 말입니다, 교황은 그 이전 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이슬람 권역과의 교류라는것을 무시할수는 없는 일입니다.
99 2012-07-12 21:02:13 3
[BGM]몽골의 서양 정복사 [새창]
2012/07/13 15:32:06
물론 헝가리 군과의 교전에서 회군을 고려할정도로 정복 작업이 쉽게 이루진것도 아닐뿐더러

상대적으로 동유럽의 넓은 평원에 비하여 서유럽의 평원은 좁은 편입니다. 구릉과 숲, 습지는 물론, 경작지 비율은 훨씬 넓습니다. 경작지의 고랑과 울타리는 기병의 탁월한 기동력에 방해가 될 것이고, 높은 인구밀도에 따라 요새도 동유럽보다 훨씬 높은 밀도로 펼쳐 있습니다.

즉 서구라는 배경에서는 기동력보다는 방어력과 힘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몽골군이 야전에서 승리하더라도 이러한 배후 요새들은 상대의 격멸을 방해할 것이고, 당연히 기동에도 제약을 미칠 겁니다(서유럽의 요새들은 대개 적의 보급로와 연락선을 차단할 수 있는 곳에 건설되어 있습니다. 서유럽은 전술 수준에 비해 훨씬 섬세한 전략을 구사했죠)

물론 몽골군이 금과 코라즘을 공격하면서 탁월한 공성수준을 쌓았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요새 공격 자체가 적잖은 병력 손실을 강요하는 일입니다. 당시에는 보다 발전된 형태의 투석기인 트레뷰셋이 쓰이지도 않았고, 설사 쓰였다고 할지라도 트레뷰셋이 성곽 자체의 방어막을 무력화 시킨 경우는 동서양을 통틀어 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성과는 대포가 나오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실제로 벨라 4세가 모히 전투 이후 서구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전술과 훈련을 재정비하고, 헝가리 곳곳에 돌로 만든 요새를 증축한 결과, 1284-85년에 걸친 몽골의 헝가리 공격은 예전에 비하면 훨씬 보잘것없는 성과만 얻고 끝나고 맙니다.

노가이가 이끈 부대는 트란실바니아를 성공적으로 유린했지만 탈라부가가 이끈 북부 헝가리를 향한 공세는 눈 때문에 카르파티아에서 막힌 뒤, 페스트에서 라디슬라우 4세가 이끄는 국왕군에게 격파당한 뒤, 되돌아가는 길에 Szekely인들의 매복에 걸려 패배합니다. 이듬해의 공세도 큰 피해를 못주고 격퇴되고 맙니다.

헝가리의 상황에서 볼 때, 설사 바투의 본대라 할지라도 서유럽을 휩쓸만한 전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즉, 배후에서 보급을 받아야죠.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몽골군이 서유럽까지 돌진해 온다면 배후도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깊숙이 들어온 상황일겁니다.

지속적인 원정을 위해서는 몽골군도 어느 선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바투가 실제로 물러나 킵자크 칸국을 세운 뒤에 어느 정도 세력을 펼쳤나요? 이들은 러시아의 반란을 진압하고, 헝가리와 폴란드에 대해 지속적인 공세를 펼치기는 했지만 결국엔 서유럽에 대한 진출은 펼치지 않았습니다.

물론 동유럽과 서아시아를 향한 몽골의 공세는 강력하게 펼쳐졌지만 예전같은 폭발력은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도 이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통치체제를 갖춰야했고, 따라서 처음 왔을 때와 같은 주변세력에 대한 전력을 다한 공세는 펼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몽골군 이라고 해서 뭔가 차별적으로 엄청나게 다르거나 특별할것은 없습니다,
98 2012-07-12 21:02:13 4
[BGM]몽골의 서양 정복사 [새창]
2012/07/12 19:38:26
물론 헝가리 군과의 교전에서 회군을 고려할정도로 정복 작업이 쉽게 이루진것도 아닐뿐더러

상대적으로 동유럽의 넓은 평원에 비하여 서유럽의 평원은 좁은 편입니다. 구릉과 숲, 습지는 물론, 경작지 비율은 훨씬 넓습니다. 경작지의 고랑과 울타리는 기병의 탁월한 기동력에 방해가 될 것이고, 높은 인구밀도에 따라 요새도 동유럽보다 훨씬 높은 밀도로 펼쳐 있습니다.

즉 서구라는 배경에서는 기동력보다는 방어력과 힘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몽골군이 야전에서 승리하더라도 이러한 배후 요새들은 상대의 격멸을 방해할 것이고, 당연히 기동에도 제약을 미칠 겁니다(서유럽의 요새들은 대개 적의 보급로와 연락선을 차단할 수 있는 곳에 건설되어 있습니다. 서유럽은 전술 수준에 비해 훨씬 섬세한 전략을 구사했죠)

물론 몽골군이 금과 코라즘을 공격하면서 탁월한 공성수준을 쌓았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요새 공격 자체가 적잖은 병력 손실을 강요하는 일입니다. 당시에는 보다 발전된 형태의 투석기인 트레뷰셋이 쓰이지도 않았고, 설사 쓰였다고 할지라도 트레뷰셋이 성곽 자체의 방어막을 무력화 시킨 경우는 동서양을 통틀어 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성과는 대포가 나오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실제로 벨라 4세가 모히 전투 이후 서구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전술과 훈련을 재정비하고, 헝가리 곳곳에 돌로 만든 요새를 증축한 결과, 1284-85년에 걸친 몽골의 헝가리 공격은 예전에 비하면 훨씬 보잘것없는 성과만 얻고 끝나고 맙니다.

노가이가 이끈 부대는 트란실바니아를 성공적으로 유린했지만 탈라부가가 이끈 북부 헝가리를 향한 공세는 눈 때문에 카르파티아에서 막힌 뒤, 페스트에서 라디슬라우 4세가 이끄는 국왕군에게 격파당한 뒤, 되돌아가는 길에 Szekely인들의 매복에 걸려 패배합니다. 이듬해의 공세도 큰 피해를 못주고 격퇴되고 맙니다.

헝가리의 상황에서 볼 때, 설사 바투의 본대라 할지라도 서유럽을 휩쓸만한 전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즉, 배후에서 보급을 받아야죠.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몽골군이 서유럽까지 돌진해 온다면 배후도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깊숙이 들어온 상황일겁니다.

지속적인 원정을 위해서는 몽골군도 어느 선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바투가 실제로 물러나 킵자크 칸국을 세운 뒤에 어느 정도 세력을 펼쳤나요? 이들은 러시아의 반란을 진압하고, 헝가리와 폴란드에 대해 지속적인 공세를 펼치기는 했지만 결국엔 서유럽에 대한 진출은 펼치지 않았습니다.

물론 동유럽과 서아시아를 향한 몽골의 공세는 강력하게 펼쳐졌지만 예전같은 폭발력은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도 이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통치체제를 갖춰야했고, 따라서 처음 왔을 때와 같은 주변세력에 대한 전력을 다한 공세는 펼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몽골군 이라고 해서 뭔가 차별적으로 엄청나게 다르거나 특별할것은 없습니다,
97 2012-07-12 21:00:47 17
이스라엘 여자들 [새창]
2012/07/12 20:18:40
이스라엘의 경우 남성과 다르게 여성의 경우 종교적 사유와, 결혼으로 군 면제가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결과요? 이스라엘 국방부에서는 사설 탐정까지 고용해서 페이스북 뒤지고 있습니다, 안식일날 사진 바꾸거나 올리거나 유대교 율법에 어긋나는 식당을 가거나 율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거 찾느라 말이죠,

이스라엘 정부에서는 사실혼 조사에 별도의 인력을 투입하고 있고 말이죠,

2010년 기준으로 군내 자살, 여군에 대한 성범죄, 전선투입 거부병사의 증가를 포함 현역병 20%가 매년 복무 부적합 등으로 조기전역하고 있고 男 26% 女 43%가 위와 같은 사유등으로 고의적으로 병역을 기피하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더 늘었으면 늘었지 줄어들 일은 절대 없는 결과입니다.

2007년 병역을 면제받는 방법과 면제 성공자들의 수기가 게시물로 올라오는 병역기피사이트가 이스라엘 젊은이들 사이에 검색1위로 올라오고 2008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스라엘 젊은이들의 심각한 병역기피로 인해 이스라엘군이 붕괴 직전에 처했다고 이스라엘 국방장관이 그릇된 국가관을 비판하고 애국심을 호소하는등

이스라엘 여군이라고 뭐 다를거 없습니다, 18살 부터 2년 동안 군대 가라고 하면 가기 싫은건 매한가지인 똑같이 사람 사는 동네죠
96 2012-07-12 20:57:31 3
[BGM]몽골의 서양 정복사 [새창]
2012/07/13 15:32:06
간단하게 몇자 적자면 엄밀하게 말해서 몽골 기병이 아니라 몽골 군입니다, 또한 이 들이 매우 강성했다는것은 사실이나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이상적인 이야기만을 다룬것일뿐입니다,

몽골이 강대했던 중국을 거꾸러트린 것은 정복이 완료된 북중국이라는 후방과 그 생산력, 이들에게 축적된 기술력을 지속적으로 투입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불가능한 실제 역사의 바투 수부타이 제베의 군단이 공세를 펼쳤을 때 갖는 효과는 별개로 고려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간단히 넘어간 애기들을 좀 더 자세히 적자면 몽골은 1223년 칼카 전투에서 키예프 루스의 군대를 결정적으로 격파했고, 1240년에 키예프를 점령하여 러시아 정복을 완료합니다. 그리고 이듬해 동부-중유럽에 대한 공세를 제기하여, 군대를 둘로 나누어 리그니츠에서 폴란드군을, 모히에서 헝가리군을 격파합니다.

여기까지 보자면 분명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적인 군대가 맞습니다만 러시아를 사례로 보면 정복은 했지만 전체 러시아가 몽골에게 굴복한 것은 아닙니다. 타타르의 멍에는 이반 뇌제의 시대까지 이어지지만 타타르의 멍에를 벗어던지기 위한 러시아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몽골은 이들의 반란을 끊임없이 제압해야 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폴란드로 진출한 몽골군은 리그니츠에서 승리하고 어떠한 정복작업도 마치지 않고 바로 헝가리로 되돌아왔고, 모히 전투에서 패배한 벨라 4세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몽골군을 저지했으며, 방어선이 돌파된 뒤에도 끊임없이 게릴라전을 펼치며 몽골군의 후방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95 2012-07-12 20:57:31 5
[BGM]몽골의 서양 정복사 [새창]
2012/07/12 19:38:26
간단하게 몇자 적자면 엄밀하게 말해서 몽골 기병이 아니라 몽골 군입니다, 또한 이 들이 매우 강성했다는것은 사실이나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이상적인 이야기만을 다룬것일뿐입니다,

몽골이 강대했던 중국을 거꾸러트린 것은 정복이 완료된 북중국이라는 후방과 그 생산력, 이들에게 축적된 기술력을 지속적으로 투입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불가능한 실제 역사의 바투 수부타이 제베의 군단이 공세를 펼쳤을 때 갖는 효과는 별개로 고려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간단히 넘어간 애기들을 좀 더 자세히 적자면 몽골은 1223년 칼카 전투에서 키예프 루스의 군대를 결정적으로 격파했고, 1240년에 키예프를 점령하여 러시아 정복을 완료합니다. 그리고 이듬해 동부-중유럽에 대한 공세를 제기하여, 군대를 둘로 나누어 리그니츠에서 폴란드군을, 모히에서 헝가리군을 격파합니다.

여기까지 보자면 분명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적인 군대가 맞습니다만 러시아를 사례로 보면 정복은 했지만 전체 러시아가 몽골에게 굴복한 것은 아닙니다. 타타르의 멍에는 이반 뇌제의 시대까지 이어지지만 타타르의 멍에를 벗어던지기 위한 러시아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몽골은 이들의 반란을 끊임없이 제압해야 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폴란드로 진출한 몽골군은 리그니츠에서 승리하고 어떠한 정복작업도 마치지 않고 바로 헝가리로 되돌아왔고, 모히 전투에서 패배한 벨라 4세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몽골군을 저지했으며, 방어선이 돌파된 뒤에도 끊임없이 게릴라전을 펼치며 몽골군의 후방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94 2012-07-12 13:13:58 0
비잔티움 쇠망사 (1) [새창]
2012/07/12 09:16:58
과연 정형화 된 패턴이 어떻게 흐를지 상상해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가 아닐까 합니다.

기대를 가져주신다니 가져온 보람이 있네요,
93 2012-07-12 13:11:28 0
마약의 역사 (32) 통제할수록 확산되는 밀거래 [새창]
2012/07/11 09:04:32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국가 경제라고 보기도 좀 그런게 사실입니다, 뒤에 나옵니다만 아편에 대하여 강경한 입장을 취한것도 아들 셋을 아편으로 잃은데에 대한 극명한 거부감의 발로와 황제가 통제할수 없는 은의 유출에 관한 문제에서 비릇된 일뿐이었지요,

천상 공행이 무역 허가증을 받으려면 최소 5만 파운드가 필요하며, 각종 관리 부터 태수까지 별도로 들어가는 막대한 뇌물 등 밀수출로 얻는 관리들이야 막대한 이득을 취하였다지만 결과적으로 황제의 손에 쥐어지는것은 없으니 말입니다.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보자면 당시 서구 열강과의 무역은 엄밀히 보자면 조공 무역은 아닙니다,

일종의 쇄국 정책의 기조 아래 성립된 관계로서 당시 중국으로서는 장기간 중화체제에 대한 위협을 느끼지 못했기에 불공정 무역을 취할시 미쳐올 여파에 관해서는 안전불감증에 가까운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수가 있겠습니다.

영국이나 기타 열강들도 사실상 1차 아편 전쟁 이후까지는 이러한 중국의 국력에 대하여 어느정도 인정을 하고 있는 분위기 였습니다. 실지로 중국도 1차 아편전쟁을 변방에서 일어난 소동 즈음으로 여기기도 했지요,

이러한 배경은 막대한 자원을 생산하며 대체 자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정도의 능력을 가진 중국에 대한 서구 열강측의 막연한 시각과 역시 실질적으로 서구 열강의 힘을 체감하지 못한 중국간의 착각 아닌 착각으로 빚어진 것으로


이것이 깨지게 되고 본격적으로 위기를 느낀것은 영불연합군이 북경의 외항인 천진까지 올라온 제2차 아편전쟁이고- 늦게 잡으면 의화단의 난, 8국연합군 북경 진주 즈음으로 베일에 쌓여있던 서로간의 실체(?)를 엿보게 된 순간이나 되서 였습니다.
92 2012-07-12 11:53:56 0
족보를 보다보니 이상한점 [새창]
2012/07/12 11:05:36
음 그러니까 나이 어린 동생이 형보다 앞서 적혀있다는 애기 신가요? 흠 자세한 가계도의 관계 구성의 내용을 몰라 추측만 해봅니다만 정실과 후처의 관계가 아닐까 합니다.
91 2012-07-11 22:09:52 1
[새창]
더는 그런 수모 감내하시지 말고 저 학계에 부디 말씀하시는 그 엄청난 이론을 발표하시어서 사회에 널리고 널린 우매한 자 들을 계몽하시기를 간청드립니다,

그리 하시면 당연히 이런 유머 사이트의 작은 게시판에서 비웃음 당하고 무시 당하는 수모를 겪으실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혼자서 나는 세상과 싸운다 뭐다 하시고 계시지만 주류사학계와 재야 사학계와 맞서 싸우신다는 지금 하신다는 그 행동이 코흘리개 어린 아이가 티비 속 인물에 대고 소리 지르는거랑 뭐가 다르겠습니까?

부디 넒은 세상에 혜안을 베푸시어 계몽 좀 해주시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90 2012-07-11 21:42:09 10
일본원숭이가 위안부 사건을 우습게 보는 이유 [새창]
2012/07/12 20:16:57
근거가 대학원 교수이자 전 게이오 대학 방문 교수라는 것 외에는 출처가 되는 책에서 인용한 통계 수치에 대한 신빙성이나 구체적인 통계에 관한 내용은 전무한 애기로군요,

심하게 말하자면 넷 우익들의 혐한 이나 오십보 백보나 다름없는 신빙성이라 귀담아 들을 필요는 없어보입니다,
89 2012-07-11 21:42:09 2
일본원숭이가 위안부 사건을 우습게 보는 이유 [새창]
2012/07/11 16:03:24
근거가 대학원 교수이자 전 게이오 대학 방문 교수라는 것 외에는 출처가 되는 책에서 인용한 통계 수치에 대한 신빙성이나 구체적인 통계에 관한 내용은 전무한 애기로군요,

심하게 말하자면 넷 우익들의 혐한 이나 오십보 백보나 다름없는 신빙성이라 귀담아 들을 필요는 없어보입니다,
<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
< 591 592 593 594 595 >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