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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2012-07-01 10:55:5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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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 시대 일본은 한반도를 비릇하여 대륙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후에 해빙기가 시작되면서 그 곳의 주민들이 고립되어 일본의 원주민을 이룬것이지요. 즉 구석기가 있었으며 인류의 이동 경로상 이주민이 아닌 원주민은 한반도나 중국이나 없습니다. 일본만의 특별한 경우가 아닙니다.

그리고 후지무라 신이치의 조작을 애기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이것은 이른바 우익 사관에 근거한 행동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구석기가 없어서 열등감 폭팔한게 아니라 말이지요,
42 2012-06-30 23:45:5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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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 엄연히 뿌리가 있습니다, 또한 뿌리가 있건 없건 별로 상관없는건 마찬가지입니다, 환단고기나 대륙 삼국설 등이 거짓임은 이미 정설이나 다름없는데 이는 왜 이런 엄청난 학설에 대하여 학계에서 무응답으로 일관하는지 생각하면 쉬운 애기입니다.

그리고, 맞는 말씀입니다, 고조선의 역사는 자료가 부족한것은 사실입니다, 수없는 전란을 거치는 등 여러 사유로 인하여 상당부분이 사라졌지요,

또 고대의 기록을 아무런 자료 없이 혼자 확신할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좋습니다, 때문에 사료를 통해 교차 검증하며 이를 통해 추론해 나가는것이죠, 또한 이러한 연구는 학계 등의 다른 학설과의 교류를 통해 부족하거나 잘못된 점을 고치거나 기존의 학설을 뒤집어 나가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다만 이 글쓰신 분은 어떠한 기존의 사료등과의 교차검증이나 기존의 학설과의 교류 없이 홀로 연구를 하시고 계신데 문제는 반론에 대하여는 이 글과 같이 반론하는 상대를 비하하시는 등 폄하함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우월함을 주장하시는 고압적 태도를 유지하신 다는것이고 이에 따라 표출되는 반응들이 다소 부정적인거죠,
41 2012-06-30 22:31:4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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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논리 대로 생각해 보자면 지금 주욱 우월함을 표출하시며 글을 쓰시는것은

'그가 이러한 우월함에 흠뻑 젖은 글을 남기는것은 자신의 실력이나 능력이 강단사학계에 언급될만한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며 또 한 이런 다소 저급하다 볼수 있는 유머 커뮤니티 역사 게시판에 마저 올리는 글마다 반론만 올라오는것은 이런 저급한 수준에서 마저 자신의 능력을 무시한다고 판단할수 있는 바 앞서 언급된 실력과 능력에서 오는 열등감을 숨기기 위해서 일부러 다른 사람 보다 우월한 척 포장하는 참으로 저급한 혹은 저열한 행위에 불과한것이 아닌가 의문이 들 정도이다'

라고 반문할수도 있겠군요,

이전에 쓰시고 지우신 글에서 볼수 있었듯이 연구활동을 하신다지만 실질적으로는 어떠한 교류 없이 혼자 하시는 연구에 지나지 않으니 딱히 강단사학계의 유물론은 소용없다 나의 연구를 들어라 라고 하셔도 뭐 별다른 가치가 있는 실질적으로 입증된 이론도 아니고 말입니다.
40 2012-06-30 22:02:41 7
태국 황실은 어떻게 강대국을 속에서 살아남았나... [새창]
2012/06/30 21:35:03
일단 제가 아는 바를 간단히 적으면 이 정도인데, 자세한 설명은 다른 고수 분들이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
39 2012-06-30 22:02:01 7
태국 황실은 어떻게 강대국을 속에서 살아남았나... [새창]
2012/06/30 21:35:03
덧붙이자면 태국 왕실의 경우 군부로 대표되는 기득권 세력과 민간 정치 세력간의 균형을 굉장히 잘 잡고 있습니다,

국민들 또한 오랫동안 국가의 독립을 지켜내고 또 나라를 균형있게 운영하는 왕실에 대한 높은 존경심과 지지도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정치적 안정성을 불러왔고 이는 수차례의 군사 혁명과 그리고 동남아 일대의 정치적 불안과 공산화 열풍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흔들리지 않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습니다.
38 2012-06-30 21:46:52 7
태국 황실은 어떻게 강대국을 속에서 살아남았나... [새창]
2012/06/30 21:35:03
일단 몇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지리적 요건과 유능한 상부의 조합입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완충 지대로서 택하기도 했고, 본격적으로 동남아에 서구 열강이 본격적으로 몰려들던 시기의 라마 5세 부터 시작하여 태국의 군주들이 매우 유능했습니다.(물론 그 이전부터도 대체로 유능했습니다.)

서구 문물을 거침없이 받아들이며 개혁에 앞장섰으며 누구 보다 국정 운영에 있어 솔선 수범하며 청렴한 운영을 하여 빌미를 주지 않았습니다, 또한 국제 정세를 매우 현명하게 잘 읽어 쉽게 말해 줄타기를 잘했죠

제국주의가 몰려들던 당시를 보면 영국과 프랑스 양측의 허영심과 자존심을 살살 달래가며 살아남았고, 2차세계대전 당시를 보면 일본이 우세한가 싶으니 동맹을 맺고, 일본이 소위 시쳇말로 탈탈 털려나가는 기미가 보이자 재빠르게 동맹을 풀고 연합군과 손을 잡았지요,

그렇다고 태국 왕실에서 일본에 마냥 순응을 했나 보면, 태국 내에서 이러한 일본과의 동맹에 반발하여 항일 운동을 전개했는데 문제는 왕실에서는 일본과 반일 세력 모두에게 지원을 하며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물론 일본에 대한 지원 역시 추후는 물론 당장 트집 잡히지 않을 선에서 한정짓고 있었고 말입니다.
37 2012-06-30 21:36:08 0
[새창]
1만년전 빙하기에 극지 사막지대와 툰드라 지역이던 바이칼 호수 인근에 국가를 건설하고, 그 국가를 기반으로 한 연방 영토의 80 ~ 90%가 극지 사막지대와 사바나, 사막지대, 툰드라 , 반 건조성 가시 덤불 지역, 열대 사막, 산악지대, 열대 몬순 기후의 정글과 기타 정글 등임에도

대체 뭘로 연방을 운영을 했고 어떻게 경제 사회 문화를 통일 유지시켜 나갔는지 그 엄청난 유물 유적들은 대체 어디로 갔고 왜 환단고기를 빼면 그 어떠한 사서에도 아무런 기록이 없는지, 설명하나 없는 불쏘시개를 두고 열등감 폭팔을 할게 있나요?

아니면 입맛대로 취사 선택하고 오만하게 봐라 멍청하게 일부만 가지고 반론하는 저능한 너희들과 다르게 모든 역사서를 두루본 난 위대하다 그러니 반론은 할 생각말고 내 진리를 경청해라 라는 투의 글을 두고 열등감 폭팔을 할까요?.

차라리 짜장면과 짬뽕을 두고 열폭하면 모를까, 이런걸 두고 열등감 폭팔을 할 일은 절대 없죠,
36 2012-06-30 17:45:52 3
총과 민주주의에 대해 질문. [새창]
2012/06/30 17:23:59
아무래도 무력격차가 총으로 줄어들어 민주주의가 이루어졌다 라는것은 잘못된 애기 같습니다. 우선적으로 핸드 캐넌 등 초기 총기류의 경우 기술이나 재료, 등의 문제는 부차적으로 최종 생산품의 가격은 매우 비쌌습니다. 즉 서민으로서는 범접할수 없는 물건이었지요,

더욱이 안전성이나 휴대성에 있어 서민들에게는 상당히 부적절한 수준의 제품이었고, 이러한 총기류가 대중적으로 변모하는 과정은 민주주의의 정착과는 큰 관련성 없이 매우 장기간에 걸쳐, 많은 시행착오와 경험 위에서 이루어져 나갔습니다.

사실 무엇보다 초기 민주주의는 이미 오래전에 그리스나 로마 등지에서 성행하였다는 매우 기초적이고 중요한 전제를 생략하시고 넘어가셨으니 논거에 있어 사상누각적인 측면이 크지 않나 싶습니다.

또한 현재의 민주주의란 결과가 매우 불확실한 이른바 공정한 투표를 통해 권력자가 선출되는 정치체제를 의미함을 볼때, 총기와는 매우 무관함을 볼수가 있습니다.
35 2012-06-30 16:59:56 14
2차세계대전 당시의 일본군인들 사진[BGM] [새창]
2012/06/30 21:08:18
이 치하를 보면 일본의 여러 병폐들을 고스란히 볼수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자금과 물자 그리고 기술의 열악한 사정으로 개량 계획이 전부 물건너 간것은 그렇다 칠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설계자 들이 뻔히 얇은 두께와 리벳식 접합의 문제점을 끌어안은 장갑의 열악성을 알고 있어 화력의 증대를 위해 설계시 여유를 두었지만 보병 병과의 높으신 분들께서 전차의 단독 행동을 더 나아가서는 기갑 병과가 힘을 얻는것을 우려해서 화력의 증강을 막는가 하면,

전차병이 좀 잘 좀 해보겠다고 전차에 증가 장갑 그냥 까놓고 말해 모래 주머니라도 달아보려 했더니 위대하신 천황 폐하의 신성한 하사품에 손을 댔으니 신성모독으로 사형이나 해댔으니 참 답이 없죠,
34 2012-06-30 16:59:56 2
2차세계대전 당시의 일본군인들 사진[BGM] [새창]
2012/06/30 09:44:11
이 치하를 보면 일본의 여러 병폐들을 고스란히 볼수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자금과 물자 그리고 기술의 열악한 사정으로 개량 계획이 전부 물건너 간것은 그렇다 칠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설계자 들이 뻔히 얇은 두께와 리벳식 접합의 문제점을 끌어안은 장갑의 열악성을 알고 있어 화력의 증대를 위해 설계시 여유를 두었지만 보병 병과의 높으신 분들께서 전차의 단독 행동을 더 나아가서는 기갑 병과가 힘을 얻는것을 우려해서 화력의 증강을 막는가 하면,

전차병이 좀 잘 좀 해보겠다고 전차에 증가 장갑 그냥 까놓고 말해 모래 주머니라도 달아보려 했더니 위대하신 천황 폐하의 신성한 하사품에 손을 댔으니 신성모독으로 사형이나 해댔으니 참 답이 없죠,
33 2012-06-30 16:47:10 0
인술라 미술(히베르노-색슨 미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下 [새창]
2012/06/30 08:51:49

이것은 아흐메드 카라히사리라는 서예가의 글로 '자비롭고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라는 문구입니다.

참 뭐랄까요, 서예라는 것은 비단 동양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도 놀랍지만, 예술성이 돋보이는 작품들입니다.
32 2012-06-30 16:45:22 1
인술라 미술(히베르노-색슨 미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下 [새창]
2012/06/30 08:51:49

이것은 술레이만의 투그라입니다, 항상 승리하시는 셀림 칸의 아들, 술레이만이라는 뜻이며 좌측 하단의 글은 '높고 고귀하시며 온 세계를 밝히시는 숭배받기에 합당한 카간의 우두머리(신께서 그를 도와 성공하게 하시며 그를 영원히 보호하시길)인 그분의 명령이다' 라는 글귀입니다.
31 2012-06-30 16:44:25 0
인술라 미술(히베르노-색슨 미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下 [새창]
2012/06/30 08:51:49

보통 이슬람에서는 이렇듯 꾸란의 여백에 그림을 그려넣고는 합니다, 인술라 미술에서 성경의 카펫 페이지에 그림을 그려넣는것과는 앞서 언급했지만 참 차이가 있지요,
30 2012-06-30 16:43:27 0
인술라 미술(히베르노-색슨 미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下 [새창]
2012/06/30 08:51:49

말씀하시는 이슬람의 미술 양식은 샤트란지나 투그람 같습니다, 투그람은 말 그대로 서명이라는 뜻이며 샤트란지는 사슬서법으로 네모칸으로 글씨를 쓰는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서예라고 보시면 됩니다.

(첨부된 그림이 샤트란지 입니다. 뜻은 상기의 네모는 하나님을 찬양하라를 네번쓴것이고 가운데는 하나님을 향한 찬미문, 하단의 네모는 꾸란 112장의 전문입니다.)

이러한 샤트란지나 투그람의 여백에 문양을 그려넣었다는것이 주로 카펫 페이지에 문양이나 그림을 그려넣은 인술라 미술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 아닐까 합니다.
29 2012-06-30 09:02:45 17
우리가몰랐던조선군의모습들. [새창]
2012/06/30 08:26:33
조선군에 있어 갑옷이 과연 보편적으로 전 군에 지급되었는가는 솔직하게 논란이 아니 무리가 있는게 사실입니다.

사실상 모든 병력은 갑옷과 투구를 갖추는 것이 원칙입니다만 문제는 그 갑옷이 국가에서 일괄 지급하는게 아니라 백성들이 각자 자비로 마련해야 하며 국가에서 지급하는 거라도 결국은 공납. 즉 백성들이 만들어 관아에 바쳐야 하는 거지요.

그러다보니 100% 갑옷 지급은 무모한 일일 뿐입니다.

가령 조선 후기를 보자면 두정갑 1부 제작단가가 16석 내외이며, 궁궐로 올라가는 별조색 갑옷의 경우 40석 이상까지 올라갑니다.

조총 1자루의 제작단가가 당시 3석5두 였던 것을 생각한다면 갑옷 하나가 조총 열자루의 제작비용이 든다는 이야기입니다. 임란 중기 이후 총통도 제작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던 조선군에게 완전하게 규범에 따른 장구류를 갖춘 병력은 요원한 일일뿐이죠,

비단 이것은 조선 후기에 국한된 일이 아닌 조선 전 후기를 통틀어 지속적으로 발생되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 대안품으로 등장한게 '엄심'입니다. 이는 종이나 가죽을 이용해 조끼 형태로 만든 간단한 가슴 보호구입니다. 그 단순함에 기록상 아예 '갑옷'이 아닌 방어구 정도로 취급받기도 했습니다.

세종 당시의 기록을 보자면 "매 1호(戶)에 투구[胄] 하나, 혹은 갑옷[甲], 혹은 엄심갑(掩心甲) 하나, 환도(環刀) 하나를 주고, 궁전(弓箭)은 1패내(牌內)에 5분의 3이 갖게 하고, 창(槍)은 5분의 2가 갖게 하여, 그 준비해 가진 바에 따라 항상 점검(點檢)하게 하소서."

라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즉 "갑옷 혹은 엄심갑"이라고 표현하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엄심은 갑옷이라기 보다는 갑옷의 대용품 정도로 인식했다는 것으로 판단해 볼수 있습니다.

인조와 중종 그리고 태종 당시의 기록을 사례로 보면 이러한 사실을 입증해 볼수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의 일은 착실하지 못하다. 배의 제도가 좋더라도 맨몸으로 시석(矢石)을 당할 수 없으니, 엄심(掩心)과 갑주(甲胄) 등의 기구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철갑(鐵甲)이 없으면 엄심갑(掩心甲)이 가장 편리하고 좋은데, 변방 군사들이 가난하여 마련하지 못합니다. 사섬시에 쥐가 쏠은 면포가 많이 쌓여 있으되 쓸 데가 없으니, 적당한 수량을 각사(各司)에 나누어 주어 검정물을 들이고 종이로 솜을 만들어, 엄심갑 1천 벌을 제조하여 양계(兩界)에 나누어 보내는 것이 매우 합당합니다.”

"각궁(角弓)과 환도(環刀)는 사람마다 만들기 어렵지마는, 지포 엄심(紙布揜心) ·두구(頭具)와 창(槍) 같은 것은 누가 만들지 못하겠습니까? "

엄심은 폐지 등을 재활용해 만들 수 있으므로 재료비도 저렴하고 만드는 방법도 비교적 단순해 특별히 정교한 기술 없이도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초에 엄심을 만들어 병사들에게 보급하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지요.

결론적으로 용병제로 구성되던 한성에 배비되는 소수의 중앙군이라면 모를까, 조선군 전체가 갑옷을 착용했으리라 보는것은 무리가 있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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