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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2012-07-21 21:28:48 0
서양 총병들의 라인배틀은 평지에서만 가능하지 않나요? [새창]
2012/07/19 16:07:36
yyy 님// 다시 댓글을 읽어봐주시기 바랍니다, 작성하신 댓글의 바로 윗 댓글에서도 말했고 몇번을 다시 작성합니다만 저는 독립에 대한 열망을 부정한 적이 없습니다.
132 2012-07-21 21:27:16 0
마약의 역사 (43) 기독교 아편과 중국 아편의 경쟁 [새창]
2012/07/20 07:54:52
미국의 경우는 멕시코와 남미의 수입품이 좀 더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더군요, 특히 남미는 이모작 이상이 가능해서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시장 경쟁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131 2012-07-20 13:59:47 0
서양 총병들의 라인배틀은 평지에서만 가능하지 않나요? [새창]
2012/07/19 16:07:36
기본적인 팩트를 부정한다고 하시는데, 대체 미국 독립전쟁에서 독립에 대한 열망을 부정했다는 내용은 어디서 보신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분명 앞서도 수차례 언급했지만 필수 불가결인 사안인것은 부정할수 없는 이야기죠, 그러나 이것이 미국 독립에 있어 주요한 승리의 요인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가령 역시 앞에서 수차례 언급했습니다만 그렇게 독립에 대한 열망이 주요한 승리의 원인이라면 왜 대륙군에 대한 보급을 대다수의 농가에서 거절했을까요? 왜 의용군도 아니고 대륙군이 추위와 배고픔에 퇴역하고 탈영을 밥먹듯이 해서 부대가 붕괴 직전까지 몰리는 일이 비일비재했을까요? 왜 믹국의 많은 주에서 주요한 '적'인 영국을 두고 내전에 가까운 전투를 벌였을까요?

주요한 승리의 결정적 기로가 된 사라토가 전투가 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이겼나요?, 아니요 호레이쇼 게이츠 장군의 능력으로 이겼습니다.

전쟁을 끝낸 요크 타운 포위전에서 프랑스 해군이 영국 해군의 지원을 막아내지 못했다면 전쟁은 어떠 했을까요?

아니 미국 독립 전쟁 내내 미국의 해군이 영국의 해군을 상대할수 없었던 사실을 본다면 워싱턴 장군의 큰 그림인 소모전에서 프랑스의 해군과 물자 지원을 뺐을때 전쟁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즉 프랑스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라는 사실을 알수 있는데, 프랑스 해군이 미국에 대한 독립의 열망이 차고 넘쳐서 도와줬을까요?

그리고 인적 물적 자원의 축적을 강조하십니다만, 가장 먼저 의결한 것이 보스턴 주위에 모인 민병대를 규합하여 대륙군으로 받아들이는 것은어떻게 설명할수 있을까요? 말씀대로라면 병력을 제대로 통제도 못하는 상황은 없어야 되는게 아닌가요?

또 전쟁 수행 능력이 부족해서 2백만 달러를 급하게 발행하여 벌어진 인플레이션은 뭐라고 설명을 주시겠습니까?,

또 워싱턴 장군이 뽑히게 된 배경에 무보수로 진군할것을 약조했던 사실도 있다거나 전쟁이 벌어진지 2달이 지난후에야 해군과 해병대의 창설을 승인했고 내각을 구성했으며 영국에 대하여 타협의 제스쳐를 끊임없이 보냈고, 반란선언서가 내려온 이후에야 외국에 대한 원조에 대한 가능성을 타진했고 전쟁이 벌이진지 1년이 지나서야 독립선언을 한 것은 뭐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솔직하게 아무것도 없었던게 사실입니다. 대륙 의회에서 처음부터 급진 주의자 등의 발상대로 독립을 열망한것도 아니고 말이죠, 대체 어떤 것을 기점으로 두고 물자와 자원을 축적하고 있었고, 처음부터 모든걸 준비하고 독립을 열망했다고 보시는지 저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네요.

네 참 더이상 대화가 의미가 없겠네요, 워싱턴 장군의 일도 그렇고 매우 기본적인 팩트의 과도한 해석도 그렇고, 뭐라 결론이 나겠습니까?

굳이 사례를 들자면 국공내전 당시 공산당은 반일 감정이 강해서 애국심이 강해서 이긴거고 국민당은 반일 감정이 적어서 애국심이 적어서 진거다 랑 크게 다를바 없는 주장에 뭐라 애기한들 무슨 결론이 날까요?
130 2012-07-20 10:03:09 0
서양 총병들의 라인배틀은 평지에서만 가능하지 않나요? [새창]
2012/07/19 16:07:36
전쟁이 촉발되어진 계기를 일방적인 미국측의 전쟁 선포라고 보시면 안되죠,

급변하는 정세속에 대륙 회의 측에서 프렌치 인디언 전쟁 이후 부터 반 의무화 된 민병대를 긴급히 강화한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독립전쟁의 시발점이 된 렉싱턴 - 콩코드 전투는 민병대의 병참기지를 파괴하려는 영국군의 오발사고와 파괴활동이 문제가된 바가 있습니다만 더욱이 보스턴이라는 이 지역은 영국군이 주둔하고 있지만 '자유의 아들들'이라는 과격파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즉 민병대를 강제 해산 시키려는 영국군과 과격파의 교전이었던 것이고,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올리브 가지 청원을 작성한 대륙 청원에서 볼수있듯이 모든 주가 보스턴과 같은 과격한 이상을 가지고 있던것은 아니며 모두가 독립 전쟁을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가령 렉싱턴- 콩코드 이후에 에썬 알렌이 이끄는 푸른산 형제단과 베네딕트 아놀드의 메사슈세츠 자원병들이 티콘데로가 요새를 점령했고, 영국군이 주둔한 보스턴이 민병대에게 포위당했을때, 확산되어가는 전쟁에 관한 소식이 난무하는 가운데, 대륙회의는 아무런 법적 권한도 재원도 상황 파악도 없이 개최되었죠, 즉 애초에 전쟁을 생각도 안하고 있었다는겁니다.

또한 렉싱턴 - 콩코드의 사례에서 볼수있듯이 미국이 먼저 이 전쟁을 시작한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가령 말씀하신 독립선언은 독립전쟁이 시작되고 1년여 뒤에 작성되었죠, 물론 세부적인 원인을 따지 자면야 종교, 치안, 규제 등 견해와 전망의 분파적 다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말이죠,

그리고 덧붙이자면 앞서 정부조직등이나 군편제를 사례로 드셨는데, 대륙회의가 가장 먼저 의결한것 중 하나는 보스턴 주위에 모여있는 잡다한 병력들을 승인하여 받아들이라는 요청입니다. 또 전쟁의 수행 능력을 연장시키기 위해 2백만 달러를 발행했죠,

그리고 두달후에 벤자민 프랭클린을 우체국장으로 하는 우체부를 조직했으며, 해군과 해병대의 창설을 승인했고 외국의 원조를 받을 가능성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다는 말이며, 올리브 가지 청원 과 무기를 들게된 원인과 필요성에 대한 선언을 이때 발표하게 됩니다. 즉 공식적인 독립에 대하여 전쟁이 시작된 이후에도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29 2012-07-19 23:00:45 0
국가권력의 주구가 된 용병 (上) [새창]
2012/07/19 18:42:45
좋게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음 개인적인 감상입니다만 인류의 문명 개화 이래 힘 그러니까 무력과 그 것을 동반한 수단은 문명의 발달과 함께 수많은 개혁을 거치고 또 변화해 왔지만 이 용병이라고 하는 서비스 산업은 챔피언이라고 하는 직종의 탄생이래로 변하지를 않는것 같습니다.
128 2012-07-19 21:39:11 0
서양 총병들의 라인배틀은 평지에서만 가능하지 않나요? [새창]
2012/07/19 16:07:36
처음 열렸던 대륙회의는 과감하게도 훗날 대영제국의 자치령이론 으로 불리게 되는 것을 채택했는데, 이 이론은 식민지 주의회들의 독립적인 권한에 대한 주장 속에 오랫동안 내포되어있는 것이기는 했지만, 더 최근에는 펜실베니아의 제임스 윌슨과 버지니아의 토마스 제퍼슨이 널리 유포된 2개의 팜플렛에서 공식화한 바 있는 애기입니다.

이 것은 각 식민지 주는 영국 자체와 마찬가지로 별개의 영토이며 영국 의회가 아니라 영국 국왕에게만 복종한다는 내용이며 또한 아메리카인의 권리선언이라는 것을 통해 통상과 순수한 제국의 문제에만 영국 의회의 간섭을 허용한다는 내용의 선언을 발표했는데

이는 보스턴 항만법, 새로운 숙영법, 공평한 법집행을 위한 법률, 메사츄세츠 행정법 등 네가지 강압적인 법률과 이후의 퀘벡법의 제정과 맞물려 각 주의 재산권을 침범하고 카톨릭 교도들을 보호하는 내용으로 흘러갈 우려가 있자 이에 항의하는것이 요지입니다.

무력을 동반한 혹은 과격한 어조의 독립이 요지가 아니라 말이죠, 물론 영국 측에서는 이러한 식민지의 이해 타산에 의한 연합과 공동 선언을 지나친 방종으로 해석을 하고 반란 선언서를 내렸지만 말이죠,

또한 독립전쟁의 불꽃은 렉싱턴 마을의 민병대의 해산에 관련하여 벌어진 사고에 의하여 촉발되었습니다. 대륙 의회의 독립에 의거한 무력 행사나 선언, 영국측의 선례 생산 목적이 아니라 말이죠,
127 2012-07-19 21:23:46 0
서양 총병들의 라인배틀은 평지에서만 가능하지 않나요? [새창]
2012/07/19 16:07:36
전쟁 수행 의지를 이야기 하시는데 영국 정부의 반란선언서는 무엇이라 보십니까? 그 이전에 발표한 올리브 가지 청원등의 대표자들의 이름으로 발표된 선언들은 뭐라 보시는지요?

분명히 머리를 숙이고 자신들이 이렇게 까지 내몰릴수 밖에 없던 상황에 대하여 국왕에게 변함없는 충성을 약속하는 청원을 하고 또한 국왕께서 영면하신 조치를 해주심을 또 그러한 조치가 취해질때까지 적대적인 행위는 자제해 줄것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애초부터 전쟁을 이야기 한것은 아닙니다, 반란 선언서가 영국 국왕의 이름으로 내려졌기에 반란군이 되버린 그 들이 택할수 있었던것은 급진 주의자들의 독립과 맞물려 무력 저항을 하는것 밖에는 없었던 것이죠,

조세 저항 애기도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주들은 애초에 해안선의 소동은 관심조차 없었던 것처럼 그 들이 처음부터 급진 주의자들의 무장 항쟁을 동반한 독립을 다 같이 주창한것은 절대 아닙니다,
126 2012-07-19 21:17:01 0
서양 총병들의 라인배틀은 평지에서만 가능하지 않나요? [새창]
2012/07/19 16:07:36
음 아무래도 제가 필력이 딸리다 보니 근본적인 부분에서 오해를 사게 만드는군요, 제 말은 독립에 대한 열망이 승리에 있어 필수 불가결한 요소는 맞으나 주된 원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앞서 적은 댓글을 그대로 옮겨보자면 당시 영국과의 정치적 상황이나 미국의 두 축을 이룬 대륙군과 의용병을 볼때 또 영국군의 전력 차나, 당시 내부의 갈등과 정치적 구조 그리고 미군의 편을 들어 참전한 동맹국들 특히 프랑스 함대의 역할 등을 볼때 단순하게 독립에 대한 열망이 독립에 주요한 역할이다 보기는 어렵다는거죠,
125 2012-07-19 20:53:36 0
서양 총병들의 라인배틀은 평지에서만 가능하지 않나요? [새창]
2012/07/19 16:07:36
이 사라토가 전투에서 승전을 거둠으로서 당시 영국이 반란 선언서를 거두고 협상에 들어갈 생각을 가지게 했으며 프랑스로 하여금 14척의 배에 군수 물자와 기타 물자를 보내며 대륙 정부와 수호통상조약과 동맹조약을 체결하게끔 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협상이란 미국의 모든 요구를 수용하는 협상입니다. 당시 영국 국왕은 강화 협상도 영국 수상이던 노스 경이 책임을 지고 사임하는것도 허락하지 않았지요, 그러나 사절단이 도착한것은 프랑스와의 조약 이후의 일로 이러한 협상은 물 건너간 이후였습니다.)

이후에 스페인이 영국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아 주겠다는 프랑스의 말에 힘입어 참전하게 되었고 네덜란드로 하여금 프랑스 및 미국과의 무역에 대한 중단을 거부하여 참전하게끔 합니다.
124 2012-07-19 20:47:48 0
서양 총병들의 라인배틀은 평지에서만 가능하지 않나요? [새창]
2012/07/19 16:07:36
그러니까 앞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독립이라는 급진적 사고관을 지닌 사람들이 힘을 얻은것은 반란 선언서 발표 이후입니다, 반란 선언서의 발표로 사실상 협상이나 그 무엇도 고려해볼 여지가 사실상 사라진것이죠,

이 독립에 대한 열망이 미국의 독립에 얼마만큼의 역할을 했는가는 논란이 있는것은 사실입니다만 당시 영국과의 정치적 상황이나 미국의 두 축을 이룬 대륙군과 의용병을 볼때 또 영국군의 전력 차나, 당시 내부의 갈등과 정치적 구조 그리고 미군의 편을 들어 참전한 동맹국들 특히 프랑스 함대의 역할 등을 볼때 단순하게 독립에 대한 열망이 독립에 주요한 역할이다 보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조지 워싱턴 특유의 리더쉽 이라고 하시는데 역시 앞서도 언급 드린 문제입니다만 밸리 포지에서 또 모리스 타운에서 무너저 가는 군대에 있어 조지 워싱턴의 이름이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그 군대를 구한것은 대륙 정부의 이름과 정책입니다, 당장 밸리 포지의 농부들이 왜 조지 워싱턴을 거부하고 영국군을 택했을까요?

그리고 제가 지적 드리는게 신격화의 문제가 아님은 댓글을 읽어보시면 아시는 문제라 보여집니다, 역시 앞서도 언급드렸습니다만 그의 리더쉽이 전황을 타계한 주요한 원인이라는 것이나 그의 부대를 구한것은 아니라는 애기죠,

끝으로 요크 전투를 이야기 하시는것 같습니다만, 그 이전에 휘그당원들로 이루어진 민병대와 콘월리스 간에 벌어진 킹스 마운틴의 전투나 너대니얼 그린이 콘월리스의 병력과 물자를 소모시켰던것과 또 너대니얼 그린이 그런 승리가 한 번만 더 있으면 우리는 끝장날 것이라고 영국 의회에서 탄식이 나올 정도로 거둔 대승을 비릇하여

뉴 포트의 드 그라세 제독의 프랑스 함대가 영국군의 봉쇄를 뜷고 지원을 하러 남하하여 , 토마스 그레이브스 제독이 요크 타운의 콘월리스를 지원하는것을 막아내었고 당시 워싱턴의 아메리카 군 병력만 보더라도 콘월리스의 2배가 넘는다는 사실을 간과하시면 안되죠,

이건 워싱턴의 능력도 물론 있었습니다만 그 만의 공적이 아닙니다.

또 사실상 독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전투는 사실 요크 타운이 아니라 사라토가 전투인데 이 당시 지휘관은 호레이쇼 게이츠 장군입니다.
123 2012-07-19 20:23:38 0
서양 총병들의 라인배틀은 평지에서만 가능하지 않나요? [새창]
2012/07/19 16:07:36
굳이 조지 워싱턴의 리더쉽을 평가하자면 당시 분열되어 있던 12개 주의 구심점이 된 정치적인 역량에 좀 더 촛점을 맞춰야 겠습니다.

그의 군사적 재능을 보자면 전술적 능력은 떨어졌지만 큰 그림을 짜는데는 매우 능했는데, 가령 미국군 전체의 전략의 방향을 소모전으로 잡은 것을 들수가 있겠습니다. 이러한 장점을 가지고 미국군을 지휘할만한 역량을 가진 거의 유일 무이한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필요한 인재였죠,

이는 앞서 언급한 너대니엘 그린이나 대니얼 모건 후에 정치적 상황에 시달려 배반한 베네딕트 아놀드 정도를 제하면 미국군 지휘부의 대다수는 무능 그 자체였다는 점에서 특히나 높게 평가 받는 부분이라 할수가 있겠습니다.
122 2012-07-19 20:09:10 0
서양 총병들의 라인배틀은 평지에서만 가능하지 않나요? [새창]
2012/07/19 16:07:36
영국 국왕이 반란 선언서를 발표했습니다, 독립의 열망과는 별개로 생존의 문제가 된 셈이죠, 즉 끝까지 가야 되는 문제가 된것입니다. 적당한 교섭이런게 들어갈 여지 그 자체가 없는 문제가 된것입니다.

그리고 보상의 문제는 대륙 의회에서 발표한 애기입니다, 그 것을 기반으로 신병의 입대가 대량 증가되어 부대를 구성할수 있게 된것이죠, 개인의 리더쉽의 문제가 아니라 말이죠,

가령 필라델피아 근교의 벨리 포지에서의 사례를 들수가 있겠죠, 조지 워싱턴이 혹독했던 겨울에 사망자와 탈영병, 제대하는 병사들로 당시 미국군이 그렇듯 무너져 가던 군대에 제대로 된 훈련을 시킬수 있게 된것은 델라웨어가을 건너서 뉴저지, 델라웨어 및 매릴랜드의 동부해안 쪽까지 헨리 리 장군과, 네셔널 그린 장군에게 대륙 의회가 상환을 보장한다는 영수증을 뿌리고 가축을 징발한 이후의 일입니다, (아 물론 대륙 의회와는 어떠한 사전의 상의도 없었습니다.)

또한 프랑스와의 동맹이 체결되었다는 소식과 대륙회의가 전쟁이 끝난 후에 추가급료와 보너스를 지급하겠다고 약속을 한 덕분에 입대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또한 주변 민가에서 지원이 시작되었죠,

물론 리더쉽이 없었다는것은 아닙니다만 그의 리더쉽이 전황을 타계한 주요한 원인이라는 것이나 그의 부대를 구한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왕 이야기를 하시는데 이거 낭설입니다.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물론 조지 워싱턴이 스스로를 3인칭으로 부르거나 전하라고 부르게 하거나 하는것은 있었습니다만 당시 미국에서 대통령 연임에 관한 법이 없어 2번의 대통령직 연임 이후 낙향한것에 대한 애기중에 하나일뿐이지요,

가령 1776년 7월 12일에 존 디킨슨이 이끄는 한 위원회가 "연합규약과 영속적인 연방 "이라는 헌법초안을 발표했고 이후 대륙회의는 더 긴급한 사안들을 다루면서 틈틈이 시간을 내서 그 규약들에 관해서 1년 이상 토론을 했으며, 1777년 11월에 마침내 그것을 채택했던것을 사례로 볼수가 있겠군요,
121 2012-07-19 19:40:31 0
서양 총병들의 라인배틀은 평지에서만 가능하지 않나요? [새창]
2012/07/19 16:07:36
독립에 대한 열망이 주된 승리 요인이라 볼수는 없지요,

당시 독립 전쟁 당시 내부를 보자면 휘그당과 왕당파, 토리당 간의 내전도 빈번했고 당시 많은 식민지 주민들은 해안선을 따라서 시행된 영국의 규제적인 정책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푸른산 청년단의 버몬트 주 창설이나 팩스톤 청년단의 펜실베니아 봉기, 노스캐롤라이나의 농장주와 이주민간의 갈등, 사우스캐롤리나 변경의 자경단 활동등 독립과는 별개의 의사와 가치를 가진 주들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조지 워싱턴을 애기하시는데, 당시 탈영과 군 복무기간 만료로 해체 직전의 1천여명의 병사만을 가지고 있던 조지 워싱턴의 부대를 구한것은 3년간 복무하거나 전쟁이 그보다 일찍 끝날 경우 종전 때까지 복무한 자들에게 대륙회의가 약속한 100에이커의 땅과 20달러의 보상금 입니다.

리더쉽이 아니라 말입니다.

그리고 당시 식민지의 생각은 그렇습니다, 각 식민지 주는 영국 자체와 마찬가지로 별개의 영토라는 즉 영국 의회가 왈가 왈부 할수 없다는 것인데

1775년 7월 5일과 6일에 대표자들은 두 가지 주요 문서를 발표한 것에서 당시 이러한 생각을 엿볼수 있습니다. 후에 올리브 가지 청원이라고 알려진 국왕에 대한 청원과 무기를 들게된 원인과 필요성에 대한 선언이 그것입니다.. '올리브 가지 청원'은 존 디킨슨이 쓴 것인데, 죠지 3세에 대한 변함 없는 충성을 주장하고 국왕에게 조정이 이루어질 때까지 더 이상의 적대행위를 자제해달라고 간청하고 있는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시 대부분을 디킨슨이 쓴, '무기를 들게된 원인과 필요성에 대한 선언'은 논쟁의 전말을 꼼꼼하게 따져보고 영국군이 정당한 이유 없이 렉싱턴을 공격한 것을 규탄했으며, 식민지의 독립을 부정했지만 식민지 주들이 노예상태로 전락하느니 그들의 권리를 지키기위하여 싸우는 것은 지지했습니다. 그는 "우리들의 명분은 정당하다,"고 선언했지요,

즉 8월 23일 영국 국왕이 반란 선언서를 발표하지 않았다면 독립 전쟁은 할 생각도 없었으며 급진적인 독립파는 제대로 된 의견조차 낼수 없었던것이 당시 식민지 대표자 들의 모임이었습니다.
120 2012-07-19 19:17:31 0
서양 총병들의 라인배틀은 평지에서만 가능하지 않나요? [새창]
2012/07/19 16:07:36
사실 무엇보다 미국의 승리에 일조한것은 우유부단과 자만심으로 가득찬 영국군의 상부와 부실한 통신이었죠,
119 2012-07-19 19:05:50 0
서양 총병들의 라인배틀은 평지에서만 가능하지 않나요? [새창]
2012/07/19 16:07:36
그리고 미국의 독립전쟁이야기가 나와 몇자 적어보자면 미국의 최대 승리 요인은 철저한 소모전 즉 게릴라 전으로 이끌어 나간 점에 기인합니다,

즉 물자 보급이라는 강점을 최대한 살린 전투로, 솔직하게 렉싱턴 콩코드 전투를 정규전이라 보기도 어려울뿐더러 사라토가 전투 이전에 미 정규군이 단독으로 영국의 정규군에 제대로 이긴점이 없다는 점을 볼때 또 당시 의용군이라 징집된 민병대의 훈련도나 장비를 볼때 가장 타당한 전술이었습니다.

말씀하신 저격 등도 이러한 게릴라 전에 기인한 하나의 전술이었으며 사실상 게릴라 전이야 말로 프랑스 군과 연합하지 않은 미 대륙군이 택할수 있었던 유일한 길이었죠,

그리고 독립에 대한 열망이라고 해봐야 요크타운 포위전에서 지원을 하기 위해 파견되어 영국의 함대가 프랑스의 함대에 가로막혀 영국이 더이상 전쟁을 지속할 수행능력을 상실했다 판단하기 이전까지 스페인이나 네덜란드, 프랑스 등의 지원을 받으면서 미국에 유리했지만 결판이 안났던것도 사실상 의견이 양분되어 내분이 컸던 문제를 볼때 독립에 대한 열망이 승리의 원인이라 보기는 어렵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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