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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19 2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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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국왕이 반란 선언서를 발표했습니다, 독립의 열망과는 별개로 생존의 문제가 된 셈이죠, 즉 끝까지 가야 되는 문제가 된것입니다. 적당한 교섭이런게 들어갈 여지 그 자체가 없는 문제가 된것입니다.
그리고 보상의 문제는 대륙 의회에서 발표한 애기입니다, 그 것을 기반으로 신병의 입대가 대량 증가되어 부대를 구성할수 있게 된것이죠, 개인의 리더쉽의 문제가 아니라 말이죠,
가령 필라델피아 근교의 벨리 포지에서의 사례를 들수가 있겠죠, 조지 워싱턴이 혹독했던 겨울에 사망자와 탈영병, 제대하는 병사들로 당시 미국군이 그렇듯 무너져 가던 군대에 제대로 된 훈련을 시킬수 있게 된것은 델라웨어가을 건너서 뉴저지, 델라웨어 및 매릴랜드의 동부해안 쪽까지 헨리 리 장군과, 네셔널 그린 장군에게 대륙 의회가 상환을 보장한다는 영수증을 뿌리고 가축을 징발한 이후의 일입니다, (아 물론 대륙 의회와는 어떠한 사전의 상의도 없었습니다.)
또한 프랑스와의 동맹이 체결되었다는 소식과 대륙회의가 전쟁이 끝난 후에 추가급료와 보너스를 지급하겠다고 약속을 한 덕분에 입대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또한 주변 민가에서 지원이 시작되었죠,
물론 리더쉽이 없었다는것은 아닙니다만 그의 리더쉽이 전황을 타계한 주요한 원인이라는 것이나 그의 부대를 구한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왕 이야기를 하시는데 이거 낭설입니다.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물론 조지 워싱턴이 스스로를 3인칭으로 부르거나 전하라고 부르게 하거나 하는것은 있었습니다만 당시 미국에서 대통령 연임에 관한 법이 없어 2번의 대통령직 연임 이후 낙향한것에 대한 애기중에 하나일뿐이지요,
가령 1776년 7월 12일에 존 디킨슨이 이끄는 한 위원회가 "연합규약과 영속적인 연방 "이라는 헌법초안을 발표했고 이후 대륙회의는 더 긴급한 사안들을 다루면서 틈틈이 시간을 내서 그 규약들에 관해서 1년 이상 토론을 했으며, 1777년 11월에 마침내 그것을 채택했던것을 사례로 볼수가 있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