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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1 00:4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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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답글이 달릴 거라 보지는 않습니다만 글을 읽어보니 혹시나가 역시나 로군요, 어떻게 반박할거라고 하시는데 대체 뭘가지고 제 주장의 반론으로 해당 링크를 제시하셨는지 반문 드리고 싶습니다, 여기에서 인조의 실정을 부정한 사람이 있던가요?
당시 조선이 처해있던 상황은 해당 글에도 명확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만주지역에 든 흉년, ,명의 경제제재와 금수조치가 무엇을 이야기 할까요? 제가 어떠한 것을 말씀드린 것인지는 아실터 제가 무엇을 가지고 반론을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또 글의 말미에 나온 상황을 보자면 전국적으로 발생한 유례없는 가뭄속에 간신히 잡은 물가가 요동치고 나라의 재정이 무너지는 와중에 후금의 사신이 한양을 방문하여 맹약을 지키지 아니함을 질책하는 국서를 전달하는 한편 모문룡과의 관계를 종식할 것을 요구하고, 또 후금과 모문룡 간의 전투가 발생하여 호란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공포가 전국을 뒤흔드는 상황에서 일본의 사신이 상경을 요구하자 국서를 가지고 있지 않음과 더불어 인조가 결코 전례없는 행동을 한다면 차후 같은 일이 반복될뿐더러 그 들은 우리의 주적이라는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여 논쟁이 벌어지나 이귀가 더 이상 적을 늘릴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들고 나오며 이정구가 절충안을 제시하여 몇몇만을 상경시키는 것으로 마무리 지은바 이러한 배경이 오로지 인조의 실정때문일까요? 인조가 일본에 무력하게 고개를 숙였습니까?
천만에요, 공허지국이라는 표현을 쓴 이정구가 절충안을 제시하는 등 현실론을 들고 나온 것은 대소 신료들입니다, 당장 광해군이 재정을 무너뜨리고 호란으로 말미암아 나라가 뿌리채 흔들리는 와중에 초유의 자연 재해까지 겹쳐 아수라장이나 다름없는데다 인조는 의리와 명예를 고수하려 하나 현실은 그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명분에만 집착했느냐 아닙니다, 그에 앞서 후금과의 전쟁을 보자면 실록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광해군 당시의 외교노선을 가지고 어떻게 해서든 전쟁을 피하고자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인 왕입니다, 그러한 노력이 명분론에만 둘러쌓인 것이라 볼수는 없지요, 앞서 설명드린 사례와 같이 현실을 직시하고 있기도 했습니다,
다만 역사라는 것은 모 아니면 도가 아닙니다, 이러한 바탕 이면에 그의 실정과 좁은 인재풀이 낳은 여러 문제들을 무시할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런데 그러한 실정만을 집착하는 답글에 대한 반론이 왜 시쳇말로 말하는 인조빠로 해석될수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