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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8 2014-04-09 10:45:12 4/4
이병도 친일파글에 반대테러가 많은이유 [새창]
2014/04/09 09:19:54

상기의 글은 이병도, 최태영 공저 한국 상고사 입문 서문 중 발췌한 일부입니다,

그리고 간단하게 지금 pei님의 주장의 모순이 무엇이냐 하면 가령 단군 문제를 사례로 들어볼까요?

A. 이병도는 친일 식민 사학자이다.

B. 일제에 의하여 단군이라는 우리의 역사는 신화로 격하되었다.

C. 이병도를 위시한 식민 사학자들이 현재의 역사 학계를 좀먹고 있다, or 식민 사학자들의 카르텔이 점령한 학계 = 현재 강단 사학이다.


그런데 현실을 보자면 이병도를 비릇한 역사 학계가 신화속의 단군을 현실로 이끌어 내었거든요, 그럼 이젠 뭐라고 해야할까요?

친일 식민 사학자 즉 일제의 수혜를 입고 그 들을 추종하며 그 들의 뜻을 받들어 모시는 자들이 일제에 의하여 격하된 단군을 역사로 만들었다? 아니면 이병도를 비릇한 학계는 민족 주의로 점철되어 있다?
1077 2014-04-09 10:39:57 2
이병도 친일파글에 반대테러가 많은이유 [새창]
2014/04/09 09:19:54
긴 말 할것 없고 소설이나 음모론이 아니라면 논거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게 뭔가요? 대체 뭘 가지고 이병도가 식민 사학자라고 하시는지, 그 학문적 성과를 좀 보고 싶네요.
1076 2014-04-09 10:13:47 3/5
이병도 친일파글에 반대테러가 많은이유 [새창]
2014/04/09 09:19:54
애시당초 사관의 정의를 전혀 모르시는 것 같으니 물어보나 마나 인듯 싶지만 여쭤보자면 이병도의 식민 사관적인 그러한 학문적 성과가 대체 무엇인가요?
1074 2014-04-09 10:12:42 3/5
이병도 친일파글에 반대테러가 많은이유 [새창]
2014/04/09 09:19:54
해당 글들에서 친일파라는 사실을 부인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친일 행적은 행적이고 식민 사관은 사관입니다, 이 두가지를 혼동하시니 무슨 말이 될까싶네요.
1073 2014-04-09 09:37:43 4/4
이병도 친일파글에 반대테러가 많은이유 [새창]
2014/04/09 09:19:54
입증된 혹은 입증 가능한 주장을 하시던가 맥락을 정확하게 짚으시는게 좋으실것 같네요.

누가 이병도의 친일 행적을 두둔하던가요? 아니면 식민사관이나 카르텔 형성을 입증하실수 있으세요?

여기는 역사 게시판이지 소설, 미스테리 게시판이 아닙니다.
1072 2014-04-09 07:54:42 2
[새창]
참 이런 밑도 끝도 없는 망상을 볼때 마다 늘 궁금한데 그 카르텔의 독점 운운하시는거 입증은 가능하세요?

그리고 누가 이병도의 친일 행적을 부인했나요?
1071 2014-04-08 10:22:36 5
이병도의 친일은 모함이다? 그럼 이 글은 어떻게 보시나요. [새창]
2014/04/08 09:26:42
이병도 이완용 친척설에 관해서 답글에서 이야기가 덜한것 같아 할 필요도 없지만 부연 설명을 해보자면 손이 귀한탓인지 별다른 변동없이 내려오던 우봉이씨는 7세손 이교와 이주 형제에서 각각 크게 갈라지는데 이완용과 이병도의 가문은 이후의 세부적인 파가 아니라 바로 이 500여년전 조선 초기의 우봉이씨의 7세손 형제들의 큰 가지에서 나뉘었습니다.

좋게 말해 친척이지 보통 이런걸 남이라 하지요.

1070 2014-04-08 10:16:09 4
이병도의 친일은 모함이다? 그럼 이 글은 어떻게 보시나요. [새창]
2014/04/08 09:26:42
이러니 저러니 해도 조선사 편수회에 이름을 올린 것은 사실이지요, 비단 이름만 올렸을뿐 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증언이나 이후에 요시찰인으로 지목된 점, 무엇보다 조선사 편수회에서 사실상 조선인의 역할은 철저하게 자료 수집 및 정리에만 국한되어 있었다는 점을 제하더라도 말입니다.

어쨌거나 친일 부역을 했다는 논란은 벗어날수 없는게 사실입니다만 이게 식민 사학과 연결될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당장 어떤 학문적 성과를 창출했는가를 놓고 말해야 하는데, 친일이라는 것은 그에 대한 답안은 될수 없지요.
1069 2014-04-08 08:12:19 3/5
낙랑에 관한 동북아역사재단의 간행도서 [새창]
2014/04/07 21:40:40
식민사학 운운하시는 음모론은 참 그칠줄은 모르네요.
1068 2014-04-08 08:10:03 6
이병도요 친일사학자인가요 아니면 역사학자인가요? [새창]
2014/04/08 04:03:11
간단한 이야기에요, 이병도의 식민 사학적인 그러한 학문적 성과가 무엇인가요? 결국 그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이것 저것 끌어다 붙인 것에 불과하지요.
1067 2014-04-05 18:44:45 1
[새창]
그 다음 경로인 폴란드..도 상황이 좋지는 못했습니다, 1241년 얼어붙은 비스툴라 강을 건넌 이래 폴란드 공국들이 모여 대항을 벌이나 괴멸당하고 전장은 이제 슐레지엔 공국으로 옮겨오는데, 보헤미아 왕국과 신성로마 제국의 제후들, 그리고 튜튼 기사단이 모인 이 연합군은 몽골의 예비대마저 끌어내는등 나름 선전을 벌였으나 결국 괴멸당하고 폴란드는 몽골의 손아귀에 떨어지나 싶었지만 요행이도 기억이 맞다면 모리비아에서 저항에 가로 막혀 더 이상의 진군은 하지 못하고 헝가리의 본대에 합류하게 되지요.

사요강 전투는 넘어가고 아무튼 쿠만 족을 받아들인 헝가리를 진군하던 몽골군은 주민들을 안심시켜 피난지 등에서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그 뒤에 마을을 지워버리거나, 포로들을 화살받이로 쓰거나, 심지어는 탈취한 벨라 4세의 옥새로 위조 포고문과 화폐를 찍어내는등 정리 작업에 들어 갑니다만 결국 벨라 4세는 잡지 못했습니다, 42년에 다시 한번 군대를 보내어 크로아티아 일대를 휩쓸었지만 그는 끝끝내 몽골로 부터 살아남았습니다.
1066 2014-04-05 18:37:01 1
[새창]
아무튼 이러한 쿠만족과 러시아 공국들과 몽골인들의 인연은 7년여를 넘기도록 별 다른 일이 없었습니다, 대략 7년후 불가 불가르가 우구데이 칸에 의하여 우랄 산맥 일대를 상실하게 되지만 전체적으로는 큰 일은? 아니었지요.

그러나 14년쯤 뒤인 1236년 몽골 연합군이 출진하며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총 병력 7~15만, 바투를 총 사령관으로 구육과 뭉케, 수부타이등 백전 노장들과 왕족들이 포함된 이 대규모 원정군은 출진한 그 해 불가 불가르를 괴멸시키고 수도를 도성합니다, 말 그대로 남녀노소 누구 하나 없이 지워버린 것이지요.

이후에는 쿠만 족을 공격하는 데 대 다수는 죽거나 노예로 아랍 등지에 팔려나갔습니다만 일부는 유럽으로 도주했습니다, 바로 헝가리로 간 것인데, 몽골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헝가리의 제후들은 그 들을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그 자비의 댓가는 처절했습니다.

원정은 여기서 그치는게 아닙니다, 블라디미르 수즈달 공국을 침공 말 그대로 학살을 벌입니다, 라잔, 콜롬나, 모스크바 등 진로상의 모든 도시들이 괴멸당했는데 가령 교회로 도주한 시민들을 쫓아 그 들을 교회에 가두고 불을 질렀으니 무엇을 더 말할까요? 거기다 전략의 실패 아닌 실패로 결전을 벌이기 위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수도 블라디미르 마저 불타올랐고, 결전을 벌이기 위해 친정을 벌인 유리 2세와 그의 군대 마저도 괴멸당하며 사실상 블라디미르 수즈달 공국은 멸망당하고 맙니다.

이후로는 말해야 입이 아픈 수준입니다, 가장 강대했던 블라디미르 수즈달 공국외에는 도토리 키재기나 다름 없었으니 말이지요, 예외라면 라스푸티챠에 구원받은 노브고르드 정도가 있겠네요, 물론 이 들도 공물을 바치며 무릅을 끓어야 했습니다.
1065 2014-04-05 18:28:14 1
[새창]
일단 칭 기스칸에 대한 사견을 제쳐두고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좀 더 써보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쿠만족과 러시아 일대의 공국들이 처음 몽골과 만난 것은 호라즘에 대한 공격이 이제는 뒷정리에 접어들던 시기입니다, 그때 도주한 샤 무하마드를 뒤쫓던 제베와 수부타이가 이끄는 약 2만여명의 병력은 칭기스칸의 명령에 따라 카스피 해 북쪽을 돌아 본대에 합류하기 위해 이동중이었지요, 그 와중에 조지아 왕국군이 전멸당하는 등의 일이 있었지만 여기에서는 넘어가고 카프카스 산맥을 넘는 와중에 일련의 원주민들과 쿠만족의 습격을 받습니다.

물론 그에 대한 응당한? 조치를 벌여 그 들을 격파하는데, 여기에서 쿠만족은 애증 어린 관계?를 유지하던 러시아 일대의 공국들에 대하여 자기들 다음은 너희들이라는 진심어린 충고를 섞은 구조 요청을 합니다, 이를 받아들여 진군한 러시아 공국들의 연합군은 초기에 기습을 벌여 승리를 거두나 이후에는 별 다른 재미를 보지 못하고 고립되어 항거하다 몽골군의 안전 보장 약속을 믿고 후퇴를 합니다,

다만 몽골군은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고 바로 짓쳐들어가 러시아 공국의 연합군은 약 3만여명의 막대한 희생자를 내게 되었지요, 그러나 패배만 겪은 것은 아니고 직후에 확전을 염려한 몽골군은 후퇴하다 볼가 불가르와 모르도바인의 연합군에 의하여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1064 2014-04-04 22:02:13 2
[새창]
끝으로 하나 덧 붙이자면 바투의 러시아 원정은 볼가 불가르 부터 남부 러시아의 키예프까지 물경 3년이 걸렸습니다, 바투 불가르에 대한 원정에 앞선 공격을 생각한다면 첫 접촉으로 부터 10여년이 걸림셈이지요.

또한 몽골군의 유럽 원정은 우구데이 칸이 죽기 전에 이미 중지된 상황입니다, 심각한 내분에 휩싸인 상황에서 바투와 동등한 지위에 있던 구육이 우구데이 칸의 부름을 받고 원정을 일시적으로 중단한체 돌아가게 되었지요, 물론 그 와중에 우구데이 칸이 죽기는 하였습니다.

끝으로 저 지도가 좀 틀린게 당시에는 현대의 그 것에 준하는 통일 국가라는게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신성 로마제국이나 보헤미아 왕국등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다수의 공국으로 분할되어 있는 상황이었지요.

그러한 상황에서 구태여 주력 부대와 비 주력 부대를 양분하여 각기 다른 진격로를 택한것은 어떠한 전략적 식견이 아니라 쿠만족 때문입니다, 앞서 칭기스칸의 명을 받아 카스피해 북쪽을 돌아 진군하며 조지아 왕국군을 격파한 제베와 수부타이의 군대를 습격한 즉 몽골과 적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던 이 들로 이 들이 헝가리 일대로 도주하였고 그 곳의 왕과 영주들이 몽골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그 들을 받아주었기 때문이지요.

물론 그 들은 왕실과 귀족들을 한바탕 뒤엎고 사라진 터라 좀 억울하다면 억울할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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