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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8 2014-06-05 01:12:32 1
[새창]
(생략)
 
신이 허(許)와 박(朴)【거산 찰방(居山察訪) 허양(許樑)과 나난 만호(羅暖萬戶) 박도상(朴道常)이다.】 두 차원을 시켜 함께 가서 살펴보게 했더니, 돌아와서 고하기를, ‘흐름을 따라 거의 30리를 가니 이 물의 하류는 또 북쪽에서 내려오는 딴 물과 합쳐 점점 동북(東北)을 향해 갔고, 두만강에는 속하지 않았습니다. 기필코 끝까지 찾아보려고 한다면 사세로 보아 장차 오랑캐들 지역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며, 만약 혹시라도 피인(彼人)들을 만난다면 일이 불편하게 되겠기에 앞질러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청차(淸差)는 단지 물이 나오는 곳 및 첫 번째 갈래와 두 번째 갈래가 합쳐져 흐르는 곳만 보았을 뿐이고, 일찍이 물을 따라 내려가 끝까지 흘러가는 곳을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본 물은 딴 곳을 향해 흘러가고 중간에 따로 이른바 첫 번째 갈래가 있어 두 번째 갈래로 흘러와 합해지는 것을 알지 못하여, 그가 본 것이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인 줄 잘못 알았던 것이니, 이는 진실로 경솔한 소치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미 강의 수원이 과연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청차가 정한 것임을 핑계로 이 물에다 막바로 푯말을 세운다면, 하류(下流)는 이미 저들의 땅으로 들어가 향해간 곳을 알지 못하는데다가 국경의 한계는 다시 의거할 데가 없을 것이니, 뒷날 난처한 염려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생략)
 
형조 판서 박권(朴權)이 아뢰기를,“홍치중의 상소에 보건대, 수원(水源) 중에 최초의 한 갈래는 곧 목차가 정한 것인데, 이번에 세우는 푯말은 안쪽으로 거의 20리 가량 옮겨 세웠다고 했습니다. 만일 뒷날 그들이 와서 보고 멋대로 옮긴 까닭을 묻는다면 무슨 말로 답하겠습니까. 목차가 정한 물이 비록 북쪽으로 뻗어나갔다 해도 진장산(眞長山) 밖을 굽어 돌아 흘러내려 가는 것인 듯하고, 그 사이의 연무(延袤)16360) 가 비록 넓다 하지만 이미 목차가 정한 것이니 이대로 한계를 작정해도 진실로 해로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끝내 과연 북쪽으로 뻗어나가 두만강에 속하지 않는 것이라면 목차에게 말을 전하되, ‘당초에 정한 것은 잘못 안 것 같다.’고 한다면, 그들이 마땅히 답변하는 말이 있을 것입니다.”
 
(생략)
 
8월 초순에 순찰사(巡察使)가 비국(備局)의 관문(關文)에 따라 다시 백두산에 푯말을 세우는 차원(差員)으로 차출했기 때문에 경성(鏡城)으로 달려가서 북평사(北評事)와 함께 역군들을 데리고 역사할 곳으로 갔는데, 데리고 간 장교(將校) 손우제(孫佑齊)와 박도상(朴道常) 및 무산(茂山) 사람 한치익(韓致益) 등과 함께 가서 30여 리를 가며 찾아보니, 수세(水勢)가 점점 커지며 북쪽을 향해 흘러갔고 두만강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30리를 오가는 동안 피인(彼人)들이 다닌 자취가 있었기 때문에, 손우제는 혹 피인들과 서로 만나게 될까 염려하여 나아가지 않으려고 하며 번번이 뒤쳐졌고, 한치익은 또한 ‘저는 변방 국경에서 생장한 사람이기에 피차(彼此)의 지형을 잘 알고 있는데, 이 물은 분명히 북쪽으로 흘러가고 두만강으로는 들어가지 아니합니다. 만일 혹시라도 두만강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한다면 뒷날에 제가 마땅히 터무니없이 속인 죄를 입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1677 2014-06-05 01:12:00 2
아래에 간도질문이요 [새창]
2014/06/05 00:49:56
선조 38년인가의 기록으로 역시나 두만강을 기점으로 국경이 나뉘는걸 볼수 있지요.
1676 2014-06-05 01:11:17 2
아래에 간도질문이요 [새창]
2014/06/05 00:49:56
(생략)
 
신이 허(許)와 박(朴)【거산 찰방(居山察訪) 허양(許樑)과 나난 만호(羅暖萬戶) 박도상(朴道常)이다.】 두 차원을 시켜 함께 가서 살펴보게 했더니, 돌아와서 고하기를, ‘흐름을 따라 거의 30리를 가니 이 물의 하류는 또 북쪽에서 내려오는 딴 물과 합쳐 점점 동북(東北)을 향해 갔고, 두만강에는 속하지 않았습니다. 기필코 끝까지 찾아보려고 한다면 사세로 보아 장차 오랑캐들 지역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며, 만약 혹시라도 피인(彼人)들을 만난다면 일이 불편하게 되겠기에 앞질러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청차(淸差)는 단지 물이 나오는 곳 및 첫 번째 갈래와 두 번째 갈래가 합쳐져 흐르는 곳만 보았을 뿐이고, 일찍이 물을 따라 내려가 끝까지 흘러가는 곳을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본 물은 딴 곳을 향해 흘러가고 중간에 따로 이른바 첫 번째 갈래가 있어 두 번째 갈래로 흘러와 합해지는 것을 알지 못하여, 그가 본 것이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인 줄 잘못 알았던 것이니, 이는 진실로 경솔한 소치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미 강의 수원이 과연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청차가 정한 것임을 핑계로 이 물에다 막바로 푯말을 세운다면, 하류(下流)는 이미 저들의 땅으로 들어가 향해간 곳을 알지 못하는데다가 국경의 한계는 다시 의거할 데가 없을 것이니, 뒷날 난처한 염려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생략)
 
형조 판서 박권(朴權)이 아뢰기를,“홍치중의 상소에 보건대, 수원(水源) 중에 최초의 한 갈래는 곧 목차가 정한 것인데, 이번에 세우는 푯말은 안쪽으로 거의 20리 가량 옮겨 세웠다고 했습니다. 만일 뒷날 그들이 와서 보고 멋대로 옮긴 까닭을 묻는다면 무슨 말로 답하겠습니까. 목차가 정한 물이 비록 북쪽으로 뻗어나갔다 해도 진장산(眞長山) 밖을 굽어 돌아 흘러내려 가는 것인 듯하고, 그 사이의 연무(延袤)16360) 가 비록 넓다 하지만 이미 목차가 정한 것이니 이대로 한계를 작정해도 진실로 해로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끝내 과연 북쪽으로 뻗어나가 두만강에 속하지 않는 것이라면 목차에게 말을 전하되, ‘당초에 정한 것은 잘못 안 것 같다.’고 한다면, 그들이 마땅히 답변하는 말이 있을 것입니다.”
 
(생략)
 
8월 초순에 순찰사(巡察使)가 비국(備局)의 관문(關文)에 따라 다시 백두산에 푯말을 세우는 차원(差員)으로 차출했기 때문에 경성(鏡城)으로 달려가서 북평사(北評事)와 함께 역군들을 데리고 역사할 곳으로 갔는데, 데리고 간 장교(將校) 손우제(孫佑齊)와 박도상(朴道常) 및 무산(茂山) 사람 한치익(韓致益) 등과 함께 가서 30여 리를 가며 찾아보니, 수세(水勢)가 점점 커지며 북쪽을 향해 흘러갔고 두만강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30리를 오가는 동안 피인(彼人)들이 다닌 자취가 있었기 때문에, 손우제는 혹 피인들과 서로 만나게 될까 염려하여 나아가지 않으려고 하며 번번이 뒤쳐졌고, 한치익은 또한 ‘저는 변방 국경에서 생장한 사람이기에 피차(彼此)의 지형을 잘 알고 있는데, 이 물은 분명히 북쪽으로 흘러가고 두만강으로는 들어가지 아니합니다. 만일 혹시라도 두만강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한다면 뒷날에 제가 마땅히 터무니없이 속인 죄를 입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1675 2014-06-05 01:10:25 2
아래에 간도질문이요 [새창]
2014/06/05 00:49:56
숙종 38년의 기록입니다, 보시다시피 조선에서 인지하고 있던 자국의 영토는 백두산 이남이지 이북이 아니었지요.
1674 2014-06-05 01:09:46 2
아래에 간도질문이요 [새창]
2014/06/05 00:49:56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과 함경 감사(咸鏡監司) 이선부(李善溥)가 13일에 치계(馳啓)하기를,
 
“총관(摠管)이 경유(經由)하는 산천(山川)의 지명(地名)과 도리(道理)16150) 를 하나하나 지적하며 자세히 물었으니 기록하는 일이 있는 듯하며, 일행 중에 또 화수(畫手)16151) 가 있었으니 필시 도면(圖面)을 그릴 계획입니다. 그리고 문위사(問慰使)의 예단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고, 접반사와 도신이 뒤쳐질 수 없다는 뜻으로 재삼 굳게 청하였으나 끝내 기꺼이 허락하지 않았으며, 나무를 찍어 길을 열어 장차 검천(劒川)으로 향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날 또 치계(馳啓)하기를,
 
“총관이 압록강(鴨綠江) 상류에 이르러 길이 험하여 갈 수가 없게 되자, 강을 건너 그들의 지경(地境)을 따라 갔으며 늘 천리경(千里鏡)16152) 을 가지고 산천을 보았습니다. 또 양천척(量天尺)이 있으니, 하나의 목판(木板)으로 길이는 1자 남짓, 넓이는 몇 치였습니다. 등에 상아(象牙)를 씌워 푼과 치를 새겼는데, 치가 12금이고 푼이 10금이며 위에 윤도(輪圖)16153) 를 설치하고 한가운데에 조그만 널을 세웠으니, 측량(測量)하는 기구(器具)인 듯하였습니다. 역관(譯官)이 백산(白山) 지도(地圖) 1건(件)을 얻기를 원하니, 총관이 말하기를 ‘대국(大國)의 산천은 그려 줄 수 없지만, 장백산은 곧 그대의 나라이니 어찌 그려 주기 어려우랴.’ 하였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백두산 이남은 땅을 다툴 염려가 없을 듯합니다.”
1673 2014-06-05 01:08:4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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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수정하면서 고조선과 통일신라 시대의 지도를 논거라고 던진것에서 웃고 가면 됩니까? 실록 숙종 연간에 국경을 두고 뭐라 말하는지 보고 오세요.
1672 2014-06-05 01:04:19 3
아래에 간도질문이요 [새창]
2014/06/05 00:49:56
실록에도 그렇고 명시되어 있지만 단 한 차례도 우리의 영토였던 사실은 존재하짙않습니다, 그러던게 이제 중국측 사정이 안 좋아지니 침탈을 했습니다.
1671 2014-06-05 01:01:3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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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실록을 패배주의, 식민사관의 산물로 만드는 패기에 감탄하고 갑니다.
1670 2014-06-05 00:36:3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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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에 그것도 빙하기로 아시아가 분리 고립되어 인종간 분화가 생기는 상황에서 수 만리에 이르르는 광범위한 근대 서구의 정치 사회 구조를 가진 근대의 언어를 비릇하여 후대의 도량형, 사회 문화 체제를 갖춘 농업 국가가 존재했다는 걸 믿으라고 하시면 그저 웃지요.

대체 진지하게 할 소리인가요? 이걸 이론으로 받아들이라고 하는게 말입니다.
1669 2014-06-05 00:32:4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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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부터 위서에 ~론이라 하는 존칭을 붙여주게 되었나요? 환빠가 비하의 의미를 가진 멸칭은 맞지만 하나의 이론으로 봐줄 구석은 전무한데 말이지요.
1668 2014-06-05 00:29:5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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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전에 참회하는 거랑 사실도 아닌 거짓 주장이랑 무슨 연관성이 있나요?
1667 2014-06-05 00:23: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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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뭔 소리인지 모르겠네요, 글을 쓰고 올리는게 상식적인 일 아닌가요? 올린 글에 답글을 달았다고 역정 내는 것을 보는 건 또 처음이네요, 이래 저래 비상식적인 인물이신건 알았습니다만 참 그러네요.
1666 2014-06-05 00:04:2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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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건 뭐 빼도 박도 못하고 이전의 이성적 반론 운운하시는 글에 이은 자아비판 2탄이네요.
1665 2014-06-05 00:03: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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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균형잡힌 역사관이란 작성자님처럼 민족의 자긍심 운운하는 허울 좋은 핑계로 역사 조작을 정당화 한다거나 자신의 의견에 반대한다는 사유로 무조건 상대를 친일, 조작을 업으로 삼는 알바등으로 내몰지 않으며 어떠한 논거도 견지하지 않은채 타인에 대한 비난 비하를 우선시하지도 않음은 물론이거니와 아집이 아닌 상호간의 이해를 근간으로 합니다.
1664 2014-06-04 23:43:26 1
역사게시판 분들은 대외적 상황을 어떻게 보시나요? [새창]
2014/06/04 22:36:55
그렇다고 베트남이 중국에 숙이고 들어갈 것이냐 하면 그건 아닌게 군사, 경제적으로 많은 부분이 종속되고 또 아래인 상황에서도 그네들 외교적 입장은 언제나 중국과 대등하다는 상황입니다, 친중 성향이 짙은 라오스나 캄보디아, 당근과 채찍을 휘두르면 꺾일 태국이나 미얀마 등과는 상황이 다르지요,

앞서 설명했지만 좀더 살을 붙여보자면 미국은 중국의 경제 제제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라 최대한 마찰을 피하기 위한 노력인지 대륙 연안의 동남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관심은 크지 않은 실정입니다, 하려고 해도 베트남 등에 대한 국민 여론이 호감도 있게 나올 상황도 아니지만 아무튼 결국 베트남에 대한 중국의 무력 조치는 가로 막을게 없다는 말과 같지요.

이러한 실정속에서 중국이 우리나라에게 할 것은 솔직하게 마땅히 없습니다, 경제 제제나 군사적 압박 모두 효율성이 매우 저조한 실정으로 근래의 십 수년의 외교적 군사적 상황을 보더라도 일본과 한국에 대한 외교 정책의 차이를 두어 관계를 벌려 놓으려는게 고작입니다.

남는 것은 이제 북한..인데 여기도 솔직하게 까놓고 말씀드려 전쟁 가능성은 크지 않습니다, 사실상 적화 통일이라는게 말이 좋아 적화 통일이지 전력의 차가 벌어진 상황에서 온전하게 남한의 생산력과 그 기반을 삼킨다는 말인데, 현재 상황은 일단 며칠 안에 평양이 지워지는 건 고사하고 말 그대로 전멸전으로 흐르기 마련일수 밖에 없어 북한이 전쟁을 벌일 경우 얻을 이득은 저조한 상황입니다.

물론 일본은 전쟁을 일으킬리가 없는게 당장 중국에 대한 가장 효율적이고 좋은 방책은 동맹국의 공조로서 한국이라는 파트너를 버릴수가 없거든요, 미국은 차지하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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