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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3 2014-06-05 08:14:4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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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인식하고 있는 자국의 영토는 백두산 이남이었지요, 물론 고조선과 통일 신라 시대의 지도를 논거로 던지시던 영토를 좁게 보면 식민 사관에 패배 주의라 강변 하는 어느 분의 논리라면야 조선도 식민 사관에 패배 주의 에 물든 국가가 됩니다만 아무튼 애시당초 간도는 조선과 무관했지요.
1692 2014-06-05 08:11:4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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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과 함경 감사(咸鏡監司) 이선부(李善溥)가 13일에 치계(馳啓)하기를,
 
“총관(摠管)이 경유(經由)하는 산천(山川)의 지명(地名)과 도리(道理)16150) 를 하나하나 지적하며 자세히 물었으니 기록하는 일이 있는 듯하며, 일행 중에 또 화수(畫手)16151) 가 있었으니 필시 도면(圖面)을 그릴 계획입니다. 그리고 문위사(問慰使)의 예단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고, 접반사와 도신이 뒤쳐질 수 없다는 뜻으로 재삼 굳게 청하였으나 끝내 기꺼이 허락하지 않았으며, 나무를 찍어 길을 열어 장차 검천(劒川)으로 향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날 또 치계(馳啓)하기를,
 
“총관이 압록강(鴨綠江) 상류에 이르러 길이 험하여 갈 수가 없게 되자, 강을 건너 그들의 지경(地境)을 따라 갔으며 늘 천리경(千里鏡)16152) 을 가지고 산천을 보았습니다. 또 양천척(量天尺)이 있으니, 하나의 목판(木板)으로 길이는 1자 남짓, 넓이는 몇 치였습니다. 등에 상아(象牙)를 씌워 푼과 치를 새겼는데, 치가 12금이고 푼이 10금이며 위에 윤도(輪圖)16153) 를 설치하고 한가운데에 조그만 널을 세웠으니, 측량(測量)하는 기구(器具)인 듯하였습니다. 역관(譯官)이 백산(白山) 지도(地圖) 1건(件)을 얻기를 원하니, 총관이 말하기를 ‘대국(大國)의 산천은 그려 줄 수 없지만, 장백산은 곧 그대의 나라이니 어찌 그려 주기 어려우랴.’ 하였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백두산 이남은 땅을 다툴 염려가 없을 듯합니다.”
1691 2014-06-05 01:53:0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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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들 입으로 물론 중국측도 그렇지만 두만강과 압록강, 백두산 이남이라고 하는게 안보이시나요?

사료를 들고와 반론하는 것도 아니고 취사 선택에 답없는 소설, 음모론이면 곤란하지요.
1690 2014-06-05 01:51:1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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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말하는 강이 뭐냐 하면 위에서도 가져다 드렸지만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이 치계하기를,

“총관(摠管)이 백산(白山) 산마루에 올라 살펴보았더니, 압록강(鴨綠江)의 근원이 과연 산 허리의 남변(南邊)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미 경계(境界)로 삼았으며,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은 백두산 동변(東邊)의 가장 낮은 곳에 한 갈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렀습니다. 총관이 이것을 가리켜 두만강(豆滿江)의 근원이라 하고 말하기를, ‘이 물이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나뉘어 두 강(江)이 되었으니 분수령(分水嶺)으로 일컫는 것이 좋겠다.’ 하고, 고개 위에 비(碑)를 세우고자 하며 말하기를, ‘경계를 정하고 비석을 세움이 황상(皇上)의 뜻이다. 도신(道臣)과 빈신(貧臣)도 또한 마땅히 비석 끝에다 이름을 새겨야 한다.’고 하기에, 신 등은 이미 함께 가서 간심(看審)하지 못하고 비석 끝에다 이름을 새김은 일이 성실(誠實)하지 못하다.’는 말로 대답하였습니다.”

하였다.
1689 2014-06-05 01:49:5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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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관리와 국경을 가지고 논의할때 어떻게 대처 해야 하나 이야기가 오고 가는 부분입니다,

접반사(接伴使) 박권이 청대(請對)하여 임금에게 아뢰기를,

“청(淸)나라 차관(差官)이 넘어 온 뒤에 연변(沿邊)의 길이 끝나면 응당 백두산 위를 경유하여 갈 것인데, 생각건대, 반드시 험준(險峻)하여 가기 어려울 듯하고, 저 사람들이 만약 억지로 다른 길을 묻는다면 비록 산 남쪽의 길이 연변에서 조금 떨어진 깊은 곳이라 하더라도 또한 장차 지시(指示)하려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처음에는 험준한 곳을 지시하겠지만 억지로 묻는다면 형세상 장차 그렇게 지도(指導)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박권이 말하기를,

“저 사람들이 정계(定界)한다고 말을 하고 있는데, 백두산 남쪽의 텅 빈 곳은 우리 나라 백성이 들어가 거접(居接)하고 있지 않으니, 저 사람들이 만약 그 곳을 가리켜 그 지경 안이라고 이른다면 근거로 삼아 다툴 만한 문적(文籍)이 없습니다.”

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유(李濡)가 말하기를,

“이미 두 강(江)을 경계로 삼았으면 중간의 육지도 또한 마땅히 강물의 발원(發源)하는 곳을 가로로 끊어 한계(限界)로 삼아야 하니, 이것으로 쟁집(爭執)하되, 저 사람들이 만약 듣지 않는다면 따로 대신(大臣)을 보내는 것도 또한 안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강역(疆域)은 지극히 중요하니 반드시 힘써 다투되, 대단한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반드시 즉시 장문(狀聞)하라.”

하였다. 박권이 또 말하기를,

“장문의 왕복(往復)에 언제나 여러 날이 소요되니, 사기(事機)를 점점 그르치게 됩니다. 큰일 외의 사소한 절목(節目)은 남병사(南兵使)·북병사(北兵使)와 더불어 서로 의논하여 적절하게 일을 처리할 것을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1688 2014-06-05 01:47:4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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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때 기록들에서 뭐라고 말하고 있나 좀 보세요, 두만강으로 갈거 토문강으로 잘못 측정한거 가지고 안절부절하는게 토문강으로 맺은 합의로 보입니까?

이건 뭐 실록을 가져다 드려도 이러시니 참..
1687 2014-06-05 01:43:5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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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 사관과 친일 사관? 어이구야 조선을 아주 나락으로 던지시네요,

당초 청차가 백두산에서 내려와 수원(水源)을 두루 찾을 때 이 지역에 당도하자 말을 멈추고 말하기를, ‘이것이 곧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이라.’고 하고, 다시 그 하류를 찾아보지 않고 육지(陸地)로 해서 길을 갔습니다. 두 번째 갈래에 당도하자, 첫번째 갈래가 흘러와 합쳐지는 것을 보고 ‘그 물이 과연 여기서 합쳐지니, 그것이 토문강의 근원임이 명백하고 확실하여 의심할 것이 없다. 이것으로 경계(境界)를 정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이 여러 수원의 갈래로 경계를 정하게 된 곡절의 대략입니다.

신(臣)이 여러 차사원(差使員)들을 데리고 청차가 이른바 강의 수원이 도로 들어가는 곳이란 곳에 도착하자, 감역(監役)과 차원(差員) 모두가 하는 말이 ‘이 물이 비록 총관(摠管)이 정한 바 강의 수원이지만, 그때는 일이 급박하여 미처 그 하류(下流)를 두루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푯말을 세우게 되었으니 한 번 가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허(許)와 박(朴)【거산 찰방(居山察訪) 허양(許樑)과 나난 만호(羅暖萬戶) 박도상(朴道常)이다.】 두 차원을 시켜 함께 가서 살펴보게 했더니, 돌아와서 고하기를, ‘흐름을 따라 거의 30리를 가니 이 물의 하류는 또 북쪽에서 내려오는 딴 물과 합쳐 점점 동북(東北)을 향해 갔고, 두만강에는 속하지 않았습니다. 기필코 끝까지 찾아보려고 한다면 사세로 보아 장차 오랑캐들 지역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며, 만약 혹시라도 피인(彼人)들을 만난다면 일이 불편하게 되겠기에 앞질러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청차(淸差)는 단지 물이 나오는 곳 및 첫 번째 갈래와 두 번째 갈래가 합쳐져 흐르는 곳만 보았을 뿐이고, 일찍이 물을 따라 내려가 끝까지 흘러가는 곳을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본 물은 딴 곳을 향해 흘러가고 중간에 따로 이른바 첫 번째 갈래가 있어 두 번째 갈래로 흘러와 합해지는 것을 알지 못하여, 그가 본 것이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인 줄 잘못 알았던 것이니, 이는 진실로 경솔한 소치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미 강의 수원이 과연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청차가 정한 것임을 핑계로 이 물에다 막바로 푯말을 세운다면, 하류(下流)는 이미 저들의 땅으로 들어가 향해간 곳을 알지 못하는데다가 국경의 한계는 다시 의거할 데가 없을 것이니, 뒷날 난처한 염려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1686 2014-06-05 01:42:3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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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문강이 맞다면 왜 조선에서 잘못측정한거 가지고 안달일까요? 가서 실록을 좀 보시지요?
1685 2014-06-05 01:41:3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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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뒤에 실록을 까보면 조선에서 잘못 측정한 사실에 대하여 우려를 표하고 있는 부분이 나옵니다, 휴대폰이고 길이가 길어서 옮겨 오기 뭐한데

“목차(穆差)가 정한 수원(水源)은 이미 잘못된 것인데, 차원들이 감사(監司)에게 말하지도 않고 평사(評事)의 지휘도 듣지 아니한 채 멋대로 푯말을 세웠으니, 일이 지극히 놀랍습니다. 청컨대 잡아다 추문(推問)하고, 감사도 또한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형조 판서 박권(朴權)이 아뢰기를,

“홍치중의 상소에 보건대, 수원(水源) 중에 최초의 한 갈래는 곧 목차가 정한 것인데, 이번에 세우는 푯말은 안쪽으로 거의 20리 가량 옮겨 세웠다고 했습니다. 만일 뒷날 그들이 와서 보고 멋대로 옮긴 까닭을 묻는다면 무슨 말로 답하겠습니까. 목차가 정한 물이 비록 북쪽으로 뻗어나갔다 해도 진장산(眞長山) 밖을 굽어 돌아 흘러내려 가는 것인 듯하고, 그 사이의 연무(延袤)16360) 가 비록 넓다 하지만 이미 목차가 정한 것이니 이대로 한계를 작정해도 진실로 해로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끝내 과연 북쪽으로 뻗어나가 두만강에 속하지 않는 것이라면 목차에게 말을 전하되, ‘당초에 정한 것은 잘못 안 것 같다.’고 한다면, 그들이 마땅히 답변하는 말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이유가 아뢰기를,

“그들이 이미 경계(境界)를 정하고 돌아간 뒤 이러한 잘못이 있음을 우리 쪽에서 발단(發端)하여 그들을 견책(譴責)받게 하는 것은 또한 불편한 데 관계됩니다. 우선 목차에게 연유를 묻고 답변을 얻어 본 다음에 요량하여 처리하는 것이 옳겠는데, 시급하게 다시 간심(看審)하지 않을 수 없으니, 도내(道內)의 수령(守令)들 중에서 일을 잘 아는 사람을 차원(差員)으로 택정(擇定)하여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1684 2014-06-05 01:40:06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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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도 끝도 없는 음모론으로 비약 하기에 앞서 우선 답글 좀 읽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청나라 차사가 찾으려한 곳이 어딜까요?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은 백두산 동변(東邊)의 가장 낮은 곳에 한 갈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렀습니다. 총관이 이것을 가리켜 두만강(豆滿江)의 근원

앞뒤는 상기 답글에 있으니 생략하고 두만강과 압록강의 상류로 정계비의 동위토문은 두만강이 맞습니다.
1683 2014-06-05 01:15:3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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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참 조선은 글쓴이 말대로 식민 사관과 패배주의의 국가네요? 그저 웃지요.
1682 2014-06-05 01:14:2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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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이 치계하기를,“총관(摠管)이 백산(白山) 산마루에 올라 살펴보았더니, 압록강(鴨綠江)의 근원이 과연 산 허리의 남변(南邊)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미 경계(境界)로 삼았으며,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은 백두산 동변(東邊)의 가장 낮은 곳에 한 갈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렀습니다. 총관이 이것을 가리켜 두만강(豆滿江)의 근원이라 하고 말하기를, ‘이 물이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나뉘어 두 강(江)이 되었으니 분수령(分水嶺)으로 일컫는 것이 좋겠다.’ 하고, 고개 위에 비(碑)를 세우고자 하며 말하기를, ‘경계를 정하고 비석을 세움이 황상(皇上)의 뜻이다. 도신(道臣)과 빈신(貧臣)도 또한 마땅히 비석 끝에다 이름을 새겨야 한다.’고 하기에, 신 등은 이미 함께 가서 간심(看審)하지 못하고 비석 끝에다 이름을 새김은 일이 성실(誠實)하지 못하다.’는 말로 대답하였습니다.”하였다.
 
1681 2014-06-05 01:13:5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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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때의 기록으로 조선은 백두산 이남이 자국의 영토임을 밝히고 있지요.
1680 2014-06-05 01:13:2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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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과 함경 감사(咸鏡監司) 이선부(李善溥)가 13일에 치계(馳啓)하기를,
 
“총관(摠管)이 경유(經由)하는 산천(山川)의 지명(地名)과 도리(道理)16150) 를 하나하나 지적하며 자세히 물었으니 기록하는 일이 있는 듯하며, 일행 중에 또 화수(畫手)16151) 가 있었으니 필시 도면(圖面)을 그릴 계획입니다. 그리고 문위사(問慰使)의 예단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고, 접반사와 도신이 뒤쳐질 수 없다는 뜻으로 재삼 굳게 청하였으나 끝내 기꺼이 허락하지 않았으며, 나무를 찍어 길을 열어 장차 검천(劒川)으로 향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날 또 치계(馳啓)하기를,
 
“총관이 압록강(鴨綠江) 상류에 이르러 길이 험하여 갈 수가 없게 되자, 강을 건너 그들의 지경(地境)을 따라 갔으며 늘 천리경(千里鏡)16152) 을 가지고 산천을 보았습니다. 또 양천척(量天尺)이 있으니, 하나의 목판(木板)으로 길이는 1자 남짓, 넓이는 몇 치였습니다. 등에 상아(象牙)를 씌워 푼과 치를 새겼는데, 치가 12금이고 푼이 10금이며 위에 윤도(輪圖)16153) 를 설치하고 한가운데에 조그만 널을 세웠으니, 측량(測量)하는 기구(器具)인 듯하였습니다. 역관(譯官)이 백산(白山) 지도(地圖) 1건(件)을 얻기를 원하니, 총관이 말하기를 ‘대국(大國)의 산천은 그려 줄 수 없지만, 장백산은 곧 그대의 나라이니 어찌 그려 주기 어려우랴.’ 하였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백두산 이남은 땅을 다툴 염려가 없을 듯합니다.”
1679 2014-06-05 01:12:5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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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때의 기록으로 두만강이 국경임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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