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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8 2014-06-06 13:57:2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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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키 신발의 내구성이 타 업체의 그 것보다 뒤떨어진다는게 사실인가요?
1737 2014-06-06 13:25:51 3
[익명]단둘이 휴일근무♥ 두근두근~ [새창]
2014/06/06 12:31:50
무슨 부귀 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런 글에 들어왔는지..
1736 2014-06-06 13:24:24 0/7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오해에 관한 글입니다. [새창]
2014/06/06 11:48:52
밝눈님.. 세탁할게 뭐가 있는데요?
1735 2014-06-06 11:21:2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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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리고 위에 오타가 있는데 사회정치적 구조를 갖고 있는 사회때문이지요. 가 아니라 사회정치적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지요 입니다.; 휴대폰으로 적다보니 오타가 좀 많이 나오네요;
1734 2014-06-06 11:20:0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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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끝으로 정말 얼마나 더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식민지 근대화론은 일본 덕분에 이러이러 하였다는게 아닙니다, 일본이 근대화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고, 그러한 바탕의 전제는 이견이 존재하나 공통적으로는 수탈 등의 목표가 전제되고 있음은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따른 메커니즘을 연구하고 있기도 하고 한국 전쟁으로 인한 단절성을 연구하고 있기도 합니다,

시혜론과는 분명하게 다릅니다,
1733 2014-06-06 11:17:2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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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식민지가 되면서 봉건 사회가 붕괴하고 새로운 사상, 이념등이 전파되지 않았습니까? 아니지요, 분명하게 이루어 졌습니다, 그 위에 그 목표가 어찌되었든 말씀하신 근대화적인 산업이 들어섰습니다.

2. 근대화라는게 마냥 긍정적이고 모두가 행복한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은 당장 산업 혁명의 사례만 보더라도 절대 다수의 노동자는 그러하지 못하였지요, 말씀하신바에 따른 근거가 분명하게 전제 조건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이러한 사실입니다, 아니 그걸 떠나 애시당초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식민지 라는 바탕 위에서 이루어 졌으며, 그 목표는 일단 제가 보기는 수탈이 전제입니다, 그런데 왜 식민지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단언할수 있으신지요?

식민지 중에서 자금력으로 본국의 지배를 벗어난 사례가 대체 무엇입니까?

3. 순서가 조금 뒤바뀐 감이 없지 않은데 일본은 일본은 제 1 차세계대전 당시 전쟁경기로 인해 짧은 기간 동안에만 국제 수지 상에서 무역흑자를 보았을 뿐 만성적인 국제 수지 적자에 허덕이는 국가였 으며, 일본 국내 경제는 자본의 부족으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과잉 축적으로 인한 자본의 돌파구로서 조선의 개발이 행하여진것이 아닙니다.

일제가 그러한 난제속에 식민지를 중앙집권적으로 통제하고 직간접적 투자를 일본 정부에서 보조 하면서 식민지 직접통치를 수행 했던 요인은 국가안보라는 논리로 해외 팽창의 당위성을 관철시킬 수 있었던 일본 내 군부세력의 힘과 상대적으로 낮은 비용으로 식민지을 중앙집권화 시키고 동원화시킬 수 있는 사회정치적 구조를 갖고 있는 사회때문이지요.
1732 2014-06-05 23:28:2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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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verworld (2014-06-05 23:16:54) (가입:2014-05-22 방문:15)   추천:0 / 반대:0     IP:   
글을 수정한게 아니라 님이 대충 읽었나 보지요

이게 반론이라고 하시는겁니까?
1731 2014-06-05 23:22:2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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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성적이고 제대로 된 반론이네요, 제 뜻과 다르다고 친일사관 운운하는 걸 보니 ㅇㅂ에서 민주화 부르짖는 것을 보는 기분입니다.
1730 2014-06-05 23:21:4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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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에 달았던 답변인데 글쓴이 말대로 탐험이 이미 끝나 있었다면 잘 알고 있었다면 이런 이야기가 나올까요? 당장 강밖 그러니까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에 뭐가 있는지도 잘 모르는데 말입니다.

동북 지경은 공험진(公嶮鎭)으로 경계를 삼았다는 것은 말을 전하여 온 지가 오래다. 그러나 정확하게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본국(本國)의 땅을 상고하여 보면 본진(本鎭)이 장백산(長白山) 북록(北麓)에 있다 하나, 역시 허실(虛實)을 알지 못한다. 《고려사(高麗史)》에 이르기를, ‘윤관(尹瓘)이 공험진(公嶮鎭)에 비(碑)를 세워 경계를 삼았다. ’고 하였다. 지금 듣건대 선춘점(先春岾)에 윤관이 세운 비가 있다 하는데, 본진(本鎭)이 선춘점의 어느쪽에 있는가. 그 비문을 사람을 시켜 찾아볼 수 있겠는가. 그 비가 지금은 어떠한지. 만일 길이 막히어 사람을 시키기가 용이하지 않다면, 폐단없이 탐지할 방법을 경이 익히 생각하여 아뢰라. 또 듣건대 강밖[江外]에 옛 성(城)이 많이 있다는데, 그 고성(古城)에 비갈(碑碣)이 있지 않을까. 만일 비문이 있다면 또한 사람을 시켜 등서(謄書)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아울러 아뢰라. 또 윤관이 여진(女眞)을 쫓고 구성(九城)을 설치하였는데, 그 성(城)이 지금 어느 성이며, 공험진의 어느쪽에 있는가. 상거(相距)는 얼마나 되는가. 듣고 본 것을 아울러 써서 아뢰라.”
1729 2014-06-05 23:17:4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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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하기 전에 봤습니다, 대충 읽었네 어쩌네 하지 마세요. 그런 상황이면 반론이나 했겠습니까?
1728 2014-06-05 23:17:0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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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다시피 강 밖 즉 두만강과 압록강 이북에 뭐가 어떻게 있는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지요, 그런데 무슨 탐사가 이미 끝나고 어쩌고 이야기가 나올까요?
1727 2014-06-05 23:15:3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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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수정하셨는데 정말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거 맞습니다, 21년 기사를 옮겨드리지요

동북 지경은 공험진(公嶮鎭)으로 경계를 삼았다는 것은 말을 전하여 온 지가 오래다. 그러나 정확하게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본국(本國)의 땅을 상고하여 보면 본진(本鎭)이 장백산(長白山) 북록(北麓)에 있다 하나, 역시 허실(虛實)을 알지 못한다. 《고려사(高麗史)》에 이르기를, ‘윤관(尹瓘)이 공험진(公嶮鎭)에 비(碑)를 세워 경계를 삼았다. ’고 하였다. 지금 듣건대 선춘점(先春岾)에 윤관이 세운 비가 있다 하는데, 본진(本鎭)이 선춘점의 어느쪽에 있는가. 그 비문을 사람을 시켜 찾아볼 수 있겠는가. 그 비가 지금은 어떠한지. 만일 길이 막히어 사람을 시키기가 용이하지 않다면, 폐단없이 탐지할 방법을 경이 익히 생각하여 아뢰라. 또 듣건대 강밖[江外]에 옛 성(城)이 많이 있다는데, 그 고성(古城)에 비갈(碑碣)이 있지 않을까. 만일 비문이 있다면 또한 사람을 시켜 등서(謄書)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아울러 아뢰라. 또 윤관이 여진(女眞)을 쫓고 구성(九城)을 설치하였는데, 그 성(城)이 지금 어느 성이며, 공험진의 어느쪽에 있는가. 상거(相距)는 얼마나 되는가. 듣고 본 것을 아울러 써서 아뢰라.”
1726 2014-06-05 23:10:2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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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세종때 위치를 잊어버린 것에서 볼수 있듯이 관심 외였고 세조 이후로 단 한차례도 국경을 논할때 오르고 내리지 않았던 것이나 그 이전에 공험진이 가졌던 의미를 생각하면 조선이 원래 점유하고 있던 실효 지배하고 있던 영토라는 것은 무의미한 주장일뿐입니다,

글쓴이님이야 그 논리대로 조선을 식민 사관에 찌들고 패배 주의에 물든 국가로 보시겠지만 말이지요.
1725 2014-06-05 23:09: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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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글 부터 완성하고 올리세요, 그리고 말씀드렸다시피 공험진은 공험진이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인정했다니까요, 그건 뭘로 설명하시겠습니까? 당장 행정 구역을 나눌때 제외 시킨것은 부차적으로 조선이라는 나라에 있어 간도는 실효 지배가 이루어진적이 단 한차례도 없는데요? 불법 월경을 가지고 소유권 주장할때 빼고 말입니다.
1724 2014-06-05 21:26:2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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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지대로라면 LA에 한인들이 많이 살고 영사관까지 지어 업무를 처리하니 LA도 우리 땅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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