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유인페이지
개인차단 상태
Lemonade님의 개인페이지입니다
회원가입 : 12-06-21
방문횟수 : 1328회
닉네임 변경이력
일반
베스트
베오베
댓글
1813 2014-06-08 11:34:24 7/12
1929년 독일의 기술수준 [새창]
2014/06/07 03:22:25
음 제가 공학도가 아니라 깊게 설명 드리기는 어려우나 당시 기준으로는 독일이나 미국이나 기술력을 놓고 보면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 합니다, 아니 미국이 좀 더 낫다고 하는데 2차 세계 대전을 사례로 들어본다면 새로운 시도를 생산성이나 신뢰성을 고려 하지 않고 하는게 독일이라면 미국은 그러한 생산성과 신뢰성을 깊게 고려한다고 해야할까요, 당장 독일이 자랑하는 판터를 놓고 보더라도 셔먼과 교환비는 크지 않고 도리어 경우에 따라 셔먼이 우세한 경향을 보이기도 합니다만 신뢰성 그 자체를 볼때는 판터는 셔먼을 어찌 할수 없을 정도이지요.
1811 2014-06-08 10:16:48 1
[새창]
밑에 똑같은 글이 있네요;
1810 2014-06-08 08:31:08 1
[새창]
기록상 보이는 국경선이 압록강 두만강을 넘은 적이 단 한차례도 없지만 그 것과 별개로 조선의 영토라면 무언가 실효 지배를 행하였음을 입증할 것이 있어야 하는데 있기는 있습니까?
1809 2014-06-08 01:02:13 0
임진왜란 때 조선수군이 갑옷을 입었나요? [새창]
2014/06/07 21:47:09
삼국 시대부터 생산 공정은 제품이나 과정만 달라졌지 그 방식이나 규모 자체는 크게 변화하지는 않았습니다, 즉 수공업의 한계는 명확한 법이지요,

딱히 대량 생산의 필요성도 못 느꼈지만 소 품종 소량 생산의 상황 아래에서는 가격을 낮출 어떠한 요인도 없는게 사실입니다.
1808 2014-06-08 00:50:51 2
[새창]
조선이 생각 했던 영토가 본문의 그것도 그렇지만 절대적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했다는 사실을 떠나 단 한차례도 강 건너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사유 등에 대한 어떠한 의욕도 없고 실행을 행한적이 없는데 무엇을 근거로 실효 지배를 행한 자국의 영토라 봐야할지 모르겠습니다.
1807 2014-06-07 23:35:55 0
[새창]
일단 일기토라는 환상이 큰것 같습니다, 일본에서 전투가 벌어지기전에 장수들이 나와 자신의 이름, 가문, 공적, 무용담을 늘어놓고 부딪히던 그 것을 고스란히 옮겨놓았지요;
1806 2014-06-07 23:34:22 0
임진왜란 때 조선수군이 갑옷을 입었나요? [새창]
2014/06/07 21:47:09
가령 세종 18년의 기사의 병조 에서 보고한 4군책의 시행만 보더라도 당시의 주력은 지갑과 같은 종이 갑옷이나 엄심갑과 같은 대체 방어구 임을 알수가 있고 이후로도 크게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를 통해 볼때 수군이 갑주를 챙겨 입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입더라도 지갑이나 엄심갑에 그쳤을거라 볼수가 있습니다.

(상략)

함길도의 새로 설치한 4진에는 정군(正軍) 외에 남은 장정이 상당히 많으나 다만 군기(軍器)가 넉넉하지 못합니다. 강원도 영서(嶺西)2712) 의 방어가 긴요하지 않은 각 고을의 쇠 투구[鐵胄] 1백 부, 비단 투구[帛胄] 5백 부, 종이 갑옷[紙甲] 4백 부, 화살 4만 9천 개, 편전(片箭) 2만 개와 경기도 각 고을의 가슴을 가리는 갑옷[掩心甲] 2백 부, 군기감의 편전 1만 개를 〈패를〉 나누어 수송할 것이며,

(상략)
1805 2014-06-07 23:31:49 0
임진왜란 때 조선수군이 갑옷을 입었나요? [새창]
2014/06/07 21:47:09
가령 아래의 기사에서 볼수 있듯 조선 초에는 철갑과 두구를 상납치 말고 보관하라 되어 있지만 실제 수군에서는 아무래도 당시 기조에 따라 갑주를 소홀히 한것 같습니다만 입더라도 지갑이나 엄심을 위주로 한것 같습니다.

인조 16권, 5년(1627 정묘 / 명 천계(天啓) 7년) 5월 12일(정축) 2번째기사
갑옷을 많이 준비하도록 하교하다

상이 하교하기를,
“예로부터 전쟁을 치르는 나라는 모두 갑옷과 병기의 마련에 힘썼는데, 근래 우리 나라의 장사(將士)들은 갑옷을 입으려 들지 않으니, 이는 반드시 패하게 되는 원인이다. 이번에도 도처에서 패배한 것이나 이희건(李希健)이 화살을 맞고 죽은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가 갑주(甲胄)를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 군사를 조련할 때에 용사(勇士)를 정선하고 갑주를 많이 준비하여 공수(攻守)의 쓰임으로 삼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이다. 그러니 비국으로 하여금 잘 헤아려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물력이 탕갈되어 마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감사들로 하여금 각 고을에 저장하고 있는 갑주를 조사해서 파괴된 것은 수선(修繕)하여 수효를 계산해 계문(啓聞)하게 하소서. 그리고 지갑(紙甲)과 면갑(綿甲)도 화살을 막을 수 있으니 체신(體臣) 및 군기 별조청(軍器別造廳)과 각도의 감사·병사에게 많은 수효를 제조하게 하소서. 철갑(鐵甲)은 통영(統營) 및 각도의 감영(監營)·병영(兵營)·수영(水營)과 대소 군현의 힘에 따라 배정하여서 제조하여 갖추게 하면 조금씩 모인 것이 많은 수효를 이룰 것이니 어찌 도움이 없겠습니까.

그리고 지난번 호양보(胡良輔)가 가지고 온 칙유(勅諭)를 보건대, 중국에서 보낸 투구와 갑옷이 무려 5만 부에 이르는데, 모영(毛營)의 현재 군병으로 그 많은 갑주를 어찌 다 쓰기야 하겠습니까. 필시 쓸모없이 쌓아두고만 있을 듯싶으니, 사세를 보아가며 자문(咨文)을 보내어 빌려주기를 청하거나 값을 주고 사들이되, 우선 접반사로 하여금 저들의 뜻을 탐지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804 2014-06-07 23:29:56 0
임진왜란 때 조선수군이 갑옷을 입었나요? [새창]
2014/06/07 21:47:09
태종 14권, 7년(1407 정해 / 명 영락(永樂) 5년) 9월 27일(정축) 2번째기사
풍해도 도관찰사가 군기와 갑옷을 새로 만들어 변란에 대비하도록 청하는 장계

풍해도 도관찰사(豊海道都觀察使)가 군기(軍器)와 의갑(衣甲)을 저장하여 불우(不虞)의 변(變)에 대비하도록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장계(狀啓)는 이러하였다.
“각 고을에 저장한 지갑(紙甲)과 엄심(掩心)은 만든 지가 오래 되어 반수 이상이 쓸 수 없으니, 만일 방어(防禦)하는 일이 있으면 군용(軍容)이 허소(虛疎)합니다. 도내(道內)의 3진(鎭)에서 제조하는 월과(月課)의 철갑(鐵甲)과 두구(頭具)를 상납(上納)하지 말게 하고, 각각 그 진(鎭)에다 저장하게 하여, 방어할 일이 있을 때에 진속(鎭屬) 군관(軍官)과 병선(兵船)에 이를 나누어 주어, 불우의 환(患)에 대비하도록 하소서.”

일단 갑주는 갖추어 입었으되 그 것은 지갑과 엄심과 같은 대체 방어구나 가죽과 종이로 된 갑옷에 그쳤던 것 같습니다,
1803 2014-06-07 21:30:06 0
뉴라이트가 비틀고 있는 역사 [새창]
2014/06/07 17:20:25
아 엄밀하게 식민지 근대화 이론을 설명하자면 보통 근대화라는 것은 '근대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나 단순하게 정책 및 사상의 도입 등으로 단기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사회체제가 변화하는 그 전체적인 과정이죠. 물리적/경제적 변화로 인해 구체제로써는 봉합할 수 없는 문제들이 발생하고, 그것으로 인해 발생한 사회적 모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강렬한 폭력을 통해 구체제를 깨부수든, 아니면 보다 온건하고 지속적인 개혁으로 구체제를 꼬드겨 변화시키든간에 어쨌든 하나의 정석적인 인과관계에 의한 현상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민족주의가 발생하고, 근대국가이념이나 시민개념이 생겨나고, 민주적 제도가 도입되는 것이나,

식민지 근대화는 그 인과의 역전입니다. 앞서 근대화를 이룩한 국가들의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인해 희생이 된 식민지는 그 상황으로 인해 복합적 모순을 경험합니다. 한 편으로는 독립을 상실하고 외세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어 착취와 수탈의 대상이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식민지화가 되는 과정에서 자력으로는 아직 깨부술 수 없었던 구체제가 해체되어 버리는 진보적/해방적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식민지 경험이 가혹할 수록 구체제가 사리져버린 이념의 공백을 재빠르게 채우는 것은 엄청나게 가속된 민족주의이고, 자생적으로는 아직 근대화로 나아가기를 기대할 수 없는 물리적, 물질적 기반의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인들은 그 의식이 먼저 목적론적으로, 필요에 의해, 생존을 위해 근대화에 도달하게 되는 바, 이것이 바로 식민지 근대화의 요체입니다.

이러한 생존적 차원에서 근대화의 필요성에 눈을 떴기 때문에, 이후의 과정은 자연적/자생적인 근대화의 코스를 밟지 않고, 엄청나게 단축되고 축약된 형태로,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부분들에서 근대화가 계획적이고 인위적이고 집약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그 전체의 과정을 뜻한다는 것이며 단순하게 말씀드리자면 식민지 시기에 벌어진 근대화를 이야기 하는 것이고 더 깊게 보자면 식민지 경험이 어떠한 근대화의 유형을 이끌어냈느냐"에 대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일본 덕분에 근대화를 이룰수 있다는 그러니까 일본이 주체가 되며 그러한 수탈이나 착취를 목표로 하는 일본의 정책을 옹호하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 시혜론과는 분명하게 다르지요.
1801 2014-06-07 21:25:32 0
뉴라이트가 비틀고 있는 역사 [새창]
2014/06/07 17:20:25
식근론이 대체 왜 나오는지 모르겠네요, '일본 덕분에 근대화를 이룰수 있었다' 라는 시혜론하고 '어디까지나 일본은 영향을 끼친 수준이며 근대화의 목표는 수탈과 착취에 근거한다' 는 식근론하고 분명하게 다른데 말이지요, 무엇보다 식근론을 연구하시던 분들이 뉴라이트에 들어간 것이지 뉴라이트에서 식근론을 연구한게 아니지 않습니까,

도요타 재단 이야기도 참 그런게 도요타 재단에서 연구비를 지원해 나온 근대 조선 수리 조합 연구의 내용이 뭘까요? 지속적으로 수리조합사업에서의 일본인과 총독부의 영향력은 축소하고 있고, 조선인은 능동적 주체로 변화해간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는데요, 그게 문제일까요?
1800 2014-06-07 21:22:22 0
임진왜란 시대 교과서에서는 잘 안알려주는 내용.txt [새창]
2014/06/07 21:20:11
정철의 문학 작품을 가만히 생각하면 좀 손발이 오그라들지요; 딸랑딸랑 아주 그냥 (....)
1799 2014-06-07 20:56:32 0
닥반 반성합니다 [새창]
2014/06/07 18:09:45
트롤러에게 먹이를 주지 마세요.
<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
< 476 477 478 479 480 >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