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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8 2014-06-08 15:27:5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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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본문에 덧붙인것은 답변이 될수가 없습니다, 하루만에 이동을 하면 물론 교통 환경이나 보급 체계상 불가능한 문제이지만 퍼질게 분명한 여분의 군마는 어디에서 수급합니까? 후속 병력은 어떻하지요?

답글을 반복하는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기병이 단독으로 진격시 벌어지는 참상은 고금 전래를 통틀어 수도 없이 입증된바 있습니다, 이건 기마민족으로 이름을 떨친 몽골도 안하는 짓이에요,

더욱이 하루 전에 수백의 요인들을 잔치를 벌여가며 안심시키고 도륙을 낸 다음 이튿날 바로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건 뭘로 설명을 하시겠습니까? 아니 그 이전에 후속 병력과의 만남이라는게 어디에 나오는 말인가요?
1827 2014-06-08 15:23:2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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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도 언급했지만 경상도 선산에서 한양까지 잘 정비된 교통 환경과 보급 체계를 업고서도 31일입니다, 혼자서 말이지요, 그런데 17만이나 되는 대군이 그러한 것을 기대하기 힘든 환경에서 이동을 했는데, 대체 그 기간동안 어디까지 갈수가 있겠습니까?
1826 2014-06-08 15:21:0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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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하루만에 주파를 한다고 하시는데 그거 비 전투를 감안한 이야기이고 말을 버린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역과 참이 있다면 얼마든지 갈아타거나 쉬어가며 이동할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 거리는 어떻습니까? 여진의 영역에 도착하기 하루 전에 완안부의 사신 일행과 갈라전 일대의 추장 등 400여명을 초청 잔치를 벌여 방심한틈을 타 도륙하고 이튿날 바로 여진의 영역에서 전투를 벌이기 시작합니다.

이건 불가능한 이야기이지요.
1825 2014-06-08 15:15:5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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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다 같이 이동한게 맞습니다, 본군 윤관 53,000명 중군 김한충 36,700명 좌군 문관 33,900명 우군 김덕진 43,800명에 더하여 수군 2,600명을 포함하여 총 병력이 17만이나 되는 4로군 동시 출정이고 분산 하여 출발하였고 뒤에 합류를 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더욱이 따로 갔다고 가정해도 이건 오래 걸린 기간이 아니지요.
1824 2014-06-08 15:13:1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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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조선 시대 과행길 즉 과거 시험을 보러 올때를 생각해 볼까요? 기록을 보면 경상도 선산에서 한양까지 혼자 가는데 꼬박 31일이 걸렸습니다, 역과 참이라 하는 각종 보급? 시설과 잘 개통된 도로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이 정도인데 17만명이나 되는 인원이 그러한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채 이동한겁니다, 이건 오래 걸린게 아니지요.
1822 2014-06-08 15:09:0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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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생각해보니 13일이 맞겠네요, 1일날 출발해서 14일날 도착했고 하루는 이런 저런 사정으로 넘겼으니 말이지요.
1821 2014-06-08 15:07:2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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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는 이성있게 이의를 제기 하지 않았습니까? 친일파, 식민사학, 훈제 청어 던지기, 귀막고 눈가리기 이게 작성자님이 보여주신 반론들인데 이성있는 행동들인가요?

아무튼 같은해 12월 13일 함경남도 정평군에 도착하여 완안부의 사신과 추장 등 4백여명을 몰살 시킨 것으로 볼때 걸린 시간은 12일 정도라 볼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건 오래 걸린게 아니지요, 지금처럼 도로가 완비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보급 체계가 원활히 잘 되어 있던가요? 거기다 운송 수단은 또 어떻습니까? 오히려 빠르다면 빠르다고 볼수 있는 시간이지요.
1820 2014-06-08 15:04:15 0
조선이 사막지대와 접했다?? 이거 뭔가요. 궁금합니다. [새창]
2014/06/08 14:33:38
뒤의 문맥으로 보면 그 사막이 사하라 사막은 아닌게 분명하네요,

'신이 또 보면 평안도(平安道)와 영안도(永安道) 지방은 사막(沙漠) 지대와 접하였기 때문에 인물(人物)이 쇠잔한데도 오히려 이엄(耳掩)을 만든 털과 몸을 따스하게 하는 모물(毛物)을 수없이 구색하여 끝없이 징렴(徵斂)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권관(權管)·만호(萬戶) 등이 날마다 갈퀴질을 일삼고 있으므로 깃털 하나만 떨어져도 그것을 기화(奇貨)로 여기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므로 내지(內地)의 군졸은 궁마(弓馬)와 갑주(甲胄)를 죄다 갖추고 있었지만, 갈려 돌아올 적에는 허리에는 빈 전대만 차고 엉금엉금 기어서 돌아오는 형편입니다. 신은 본시 무인의 아들로서 아버지를 따라 관서 지방(關西地方)에 가서 몸소 겪고 보고 들었습니다. 전일 야인(野人)을 몰아낼 때에 조정에서 의논하여 큰 일을 일으키는데도 귓속으로 서로 말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모르게 했습니다. 이래서 평안도 사람들은 호령(號令)을 몰라서 반신 반의 하면서 추위를 막는 도구를 전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야인을 몰아내게 되자 인마(人馬)가 추위와 주림에 지쳐 삼대처럼 쓰러졌고 그 중 살아서 돌아온 사람도 손가락이 끊어지고 피부가 터져서 모두 병자[病夫]가 되었습니다.'
1819 2014-06-08 14:58:2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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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그 시대 뿐만 아니라 오래전부터 여진인들은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는 것을 넘어 원정이라고 하면 좀 그렇고 바다를 건너가 약탈 전쟁이 가능할정도였습니다, 덕분에 고려에서는 진명도부서라 하는 수군을 관할 하는 기구를 신설하고 각지에 성곽을 축조하는등 온갖 대비를 해야 했습니다.
1818 2014-06-08 14:56:2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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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잘 생각하셔야 하는게 여진 정벌 출정식은 1107년 4월 이고 서경에서 4로군이 출정한 날은 같은 해 12월 1일입니다, 여진의 영역에 들어선 날은 12월 14일이지요, 또한 12월 15일 부터 24일까지 여진의 영역 전체를 휩쓰는데 이때 고려의 전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윤관이 이끄는 본군 - 대내파지촌 등 37촌 정벌, 2,120명 사살,포로 500명 획득, 일부를 돌려 이위동을 공격함락시켜 1,200명을 사살

김한충의 중군 - 고사촌 등 35촌을 정벌, 380명 사살, 포로 230명 획득

문관의 좌군 - 심곤등 31촌을 정벌 950명 사살

김덕진의 우군 - 광탄등 32촌을 정벌, 290명 사살 포로 300명 획득

총 136개촌 정벌, 4,940명 사살 포로 1,030명 획득

위치가 비정하신 곳이라면 도저히 나올수 없는 속도이지요.

아 그리고 이 걸빠뜨릴뻔했는데 1108년 1월에 여진인들이 반격을 시작한 이래 선봉 아도한이 30명을 이끌고 타길성을 함락시키는 한편 고려 수군의 함선을 전소시켜버린 일이 있습니다, 만일 타길성에 바다가 인접해 있지 않다면 가능할까요?
1817 2014-06-08 14:49:0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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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 조건이 틀린게 지금 글을 올리신 것을 기준으로 여진족이 바다를 모른다는 것은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당장 몽골의 역사서들만 보더라도 여진인들의 삶이 기마 민족에 국한되지 않는 것도 그렇지만 작성자님의 논지를 따라가자면 한일 양국에 이름을 널리 알린 여진 해적을 설명할 길이 없어지지요. 비단 고려의 동해안 일대를 초토화 시킨 것을 넘어 일본에는 도이의 입구라 해서 이키, 쓰시마 섬 및 지쿠젠을 쑥대밭으로 만든 유명한 사건이 기록될 정도인데 말이지요.
1816 2014-06-08 12:32:30 0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오해에 관한 글입니다. [새창]
2014/06/06 11:48:52
제가 가져온 이 글을 읽어보셨으니 아시겠지만 이 글은 if나 maybe로 이루어진 가상의 세계를 탐구하는 글이 아닙니다, 따라서 간략하게 이루어진 근대성만으로 이루어진 미래의 가상의 세상이나 언급하신 분단 국가냐 통일 국갸냐, 국민 소득이 얼마이고 사회 불평등이 얼마인가 하는 이 글에 있어 크게 중요하지 않은 자잘한 사례에 집중할 필요성은 적어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글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독립운동의 의의나 영향이 아닙니다, 그러하기에 언급하신 문제를 조명하는 것은 이 글이 아닌 다른 글에서 그 문제를 주제로 다루어도 충분해보이네요.
1815 2014-06-08 12:15:00 11/8
1929년 독일의 기술수준 [새창]
2014/06/07 03:22:25
가령 페이퍼 클립 작전을 사례로 제시할지 모르나 전체적인 과학 기술이 아니라 몇몇 분야에 그 것도 몇년의 차이 정도이며 이는 투자로 얼마든지 그 간극을 메울수 있는 상황의 기술에 대한 포섭이었습니다, 전반적인 측면을 놓고 볼때 미국은 결코 독일의 아래가 아니었지요.
1814 2014-06-08 12:10:05 7/24
1929년 독일의 기술수준 [새창]
2014/06/07 03:22:25
그거 루머입니다, 실제로 독일의 과학자들을 통해 기술력이 폭증하였다는 사실에 대한 어떠한 논거도 부족한게 현실입니다, 당장 2차 세계 대전의 상황만 보더라도 미국이 독일에 기술력이 뒤떨어진다는 사실이 틀렸음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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