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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 2014-06-08 21:17:2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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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공구님의 블로그에서 발췌한 내용으로 이렇게 고금 전래로 비판당하고 또 논파 당한 두만강 이북설을 학계에서 인정받았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그 학자 들이 대체 누구인지 물어보는 질문에 왜 답변을 못하시나요? 논문 제목이 어려우면 학자라도 알려달라는 말이 어렵습니까?
1857 2014-06-08 21:16:1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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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두만강 이북설을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

성을 철수할 때에는 당연히 먼 땅에서부터 시작한다. 길주가 맨 북쪽이기 때문에 먼저 철수한 것이다.
이것으로 보면 9성의 땅은 모두 길주이내 서남쪽의 땅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설자(說者)들은 매양, “9성은 마땅히 두만강 안팎의 땅에 있다.”
하니, 이것은 《고려사》 지리지와 《여지승람》의 공험진에 대한 설에 의해 말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두 설대로 한다면 함주에서 공험진까지는 1천 8백여 리나 멀다.
대저 성읍(城邑)을 창건하는 목적은 변경을 튼튼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
이처럼 1천 8백 리나 먼 땅에다 9성을 설치하였다면 어떻게 능히 성원할 수가 있었겠는가?
반드시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사로 증거하면,
“여진이 길주를 포위하니 오연총(吳延寵)이 왕명을 받아 와서 구원하였다. 공험진에 이르니 적이 길을 막고 엄습하였다.”
하였으니, 그것이 길주 서남쪽에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또 임언(林彦)의 구성기(九城記)에,
“여진이 개마산 동쪽에 모여사는데, 지방이 3백 리로서 동쪽은 대해(大海)에 이르고, 서북쪽은 개마산을 끼고, 남쪽은 장주(長州)ㆍ정주(定州)에 접했다.”
하였으니, 이것으로 보면 9성의 땅이 또한 3백 리 안팎의 땅을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종(睿宗)이 윤관에게 준 교서(敎書)에,
“1백 리의 땅을 개척하여 9주(州)의 성을 쌓았다.”
하였으니, 만일 땅을 개척하여 두만강 북쪽 1천 8백 리나 먼 땅에 이르렀다면, 어찌 1백 리의 땅을 개척했다고 말하였겠는가?
공민왕 5년에 쌍성(雙城) 지금의 영흥(永興)이다. 을 격파하니, 조소생(趙小生)이 이판령(伊板嶺) 북쪽 입석(立石)의 땅으로 도망해 들어갔다 한다. 이판령은 지금의 마천령(磨天嶺)지금의 단천(端川) 동쪽 66리, 길주(吉州) 서쪽 1백 30리에 있다. 으로 단주(端州)ㆍ길주(吉州) 사이에 있다. 여기에 말한 입석이란 필시 윤관이 세운 것이리라.
공험진이 이미 길주의 서남쪽에 있으니, 그가 세운 비가 틀림없이 이 사이에 있을 것이다.
1856 2014-06-08 21:15:4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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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는 대동지지에서 두만강 이북설을 이렇게 말합니다.

○公嶮鎭
麗史吳延寵傳女眞復圍吉州城幾滔王復遣延寵救之行至公嶮鎭賊遮路掩擊我師大敗散入諸城
據此則公峻鎭當在吉州界矣
一云今慶源府
一云在先春嶺東南白頭山東北
一云在松花江濱者皆誤也
其時尹瓘兵力僅及於鬼門關以南矣
先春嶺一云在豆滿江北七百里
尹瓘拓地至此城公嶮鎭遂立碑嶺上刻曰高麗之境
一云在慶源東北七百餘里有尹瓘定界碑二說俱誤

○공험진(公嶮鎭)
고려사(高麗史) 오연총(吳延寵) 전(傳)에 여진(女眞)이 다시 길주성(吉州城)을 포위(圍)하여 거의 넘치게 되자,
왕(王)이 다시 연총(延寵)을 보내 구원(救)하게 하였는데,
공험진(公嶮鎭)에 이르러서 적(賊)이 차로(遮路/길을 막음)하여 엄격(掩擊/습격)하니,
아사(我師/우리의 군대)가 대패(大敗)하여 제성(諸城)에 산입(散入/흩어져 들어감)하였다.
이에 근거(據)하면 곧 공험진(公嶮鎭/공준진公峻鎭은 영인 오류로 보임)은 당연히 길주(吉州)의 경계(界)에 있는 것이다.
일부에서 일컫기를 지금의 경원부(慶源府)라 하고,
일부에서 일컫기를 선춘령(先春嶺) 동남(東南)과 백두산(白頭山) 동북(東北)에 있다고 하고,
일부에서 일컫기를 송화강(松花江) 물가에 있다고 하는 자가 있는데 모두 잘못된 것이다.
그 당시 윤관(尹瓘)의 병력(兵力)은 겨우 귀문관(鬼門關) 이남(以南)에 미친 것이다.
선춘령(先春嶺)은 일부에서 일컫기를 두만강(豆滿江) 북(北) 700 리(里)에 있고,
윤관(尹瓘)의 탁지(拓地/개척한 땅)가 이 성(城) 공험진(公嶮鎭)에 이르렀으며,
마침내 영상(嶺上/재의 꼭대기)에 입비(立碑)하고 새기여 말하길 고려지경(高麗之境/고려의 국경)이라 하였다 한다.
일부에서 일컫기를 경원(慶源) 동북(東北) 700여 리(里)에 윤관(尹瓘)의 정계비(定界碑/경계를 정한 비)가 있다고 하나
두 설(說) 또한 모두 잘못된 것이다.

○按睿宗時用兵不出乎端吉二州而高麗女眞界以都連浦則自都連至鬼門關七百里摩天嶺五百里則定界之碑不出此二處矣
若以豆滿江北七百里爲是則公嶮先春俱在於寧古塔以北應不必如是矣
當作都連浦北七百里爲是
○생각해 보면 예종(睿宗) 당시 (고려의) 용병(用兵)은 단길(端吉/단천과 길주) 두 주(州)에서 불출(不出/나가지 않음)하였고
그리고 고려(高麗)와 여진(女眞)의 경계(界)는 도련포(都連浦/정주 인근)로써,
곧 도련(都連)에서부터 700 리(里)인 귀문관(鬼門關)과 500 리(里)인 마천령(摩天嶺)에 이르렀으며,
곧 정계(定界)의 비(碑)가 이 두 곳을 불출(不出/나가지 않음)한 것이다.
만약 두만강(豆滿江) 북(北) 700 리(里)리가 옳다고 한다면,
곧 공험(公嶮) 과 선춘(先春) 모두 영고탑(寧古塔) 이북(以北)에 있어야 하는데 응당 반드시 이와 같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당연히 도련포(都連浦) 북(北) 700 리(里)를 옳다고 하여야 한다.
1855 2014-06-08 21:14:0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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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이나 학자를 알려달라는게 어려운 주문입니까? 두만강 이북설을 학계에서 인정받은 그 학자들이 대체 누구냐니 학설을 배워오라는 엉뚱한 이야기를 하십니까? 존재 하기는 하는거 맞아요?
1854 2014-06-08 20:55:51 0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오해에 관한 글입니다. [새창]
2014/06/06 11:48:52
얼른꺼져라님.. 1. 네 그 두가지 사례는 근대화에 대한 가정이지 실제로 일어난 혹은 일어날 일도 아닐뿐더러 지금 님께서 그렇게 주장했다는 말도 아닙니다,

2. 일제에 의하여 근대화가 되었다고 누가 주장을 했던가요? 3. 근대화가 일어난 것과 그러한 기틀이 마련된 것은 분명하게 다릅니다, 우리가 근대화를 스스로 행하였다면 그 것을 인정하지 못할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우주님.. 글쎄요, 답변 드리기가 아까운 답글이라 따로 답변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우주 여행자님.. 근거가 나왔다고 비판받아야 한다면 자본주의 경제는 어떻습니까? 그러한 논거를 제시할수 있었다는 이유로 비판 받는다면 괜찮은 이론이 없을텐데 말이지요, 아무튼 음 한국 전쟁 등으로 인한 단절성에 관하여 견해가 다른 것 같습니다만 글쎄요, 제 생각은 이영훈 씨의 맨파워 이론보다는 다른 분의 갑자기 이름이 생각이 안나는데 단절성은 존재 하지 않는다는 쪽에 가깝습니다, 어쨌거나 말씀대로 경제 발전에 직접적이고 주요한 원인은 아니겠습니다만 이미 그러한 경제적인 가치 판단이라고 표현을 해야할까요? 그 흐름에 따라 경제적인 부분에 대한 관념과 바탕이 자리잡았기 때문에 해방 이후 엄밀하게 말하자면 한국 전쟁 이후의 경제 발전에 대한 원인이 아니라 보기는 좀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1852 2014-06-08 18:45:5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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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논지를 보자면 요동정벌도 말이 안됩니다, 위화도는 거기에 있으면 안되요, 작성자님의 논리를 따르자면 말입니다. 어떻게 서경에서 출발한 병력이 음력 4월 18일에 출발한 5만여명의 병력이 음력 5월 7일에 도착할수 있었을까요?

여진정벌의 17만 대군도 만주 일대를 가뿐하게 넘었는데 말입니다.
1851 2014-06-08 18:34: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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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런 말입니다, 작성자 님의 주장에 따르자면 우리 나라의 역사는 중국에 있다고 봐야 하는것이지요, 저기 장춘시 위로 천리 장성이 지나간다고 하는데, 장춘역은 말그대로 함경도 정주와 장주에 들어있는 작은 지역일테 정주와 장주가 얼마나 클지는 상상도 안가네요.
1850 2014-06-08 18:28:3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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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학계의 인정을 받았다는 만주에 위치한 동북 9성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누구인지 궁금하여 답변을 기다려봅니다만 답변이 없으신데다 사실상 결론은 이미 정해지셨고 거기에 맞추어 글을 써내려 가시니 더 기다려 볼 필요도 없겠네요,

결론적으로 작성자님의 발상은 물론 틀렸다고 단언할수 있지만 방식도 잘못되었습니다, 결론은 과정을 거쳐 내리는거지 먼저 결론을 내리고 과정을 거치는게 아니니 말이지요, 작성자 님 말씀대로라면 애시당초 동방 3왕가나 몽골이 고려를 침공하기 전 역사는 존재할수도 없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고려사 등의 사료는 말도 안되는 내용이 되지요,

취사 선택이라는게 이런겁니다, 단적으로 말해 장춘역이 지금 비정하시는 그 지린성의 도시라면 대체 고려의 수군은 어디로 갔으며 여진족이 불태운 군선이 있는 타길성은 또 어디에 있습니까? 장춘역이 위치한 정주와 장주 일대는 함경도의 지명인터 이건 뭐 조선의 역사와 지리 그 자체를 비릇하여 주장하시는 완전 무장한 군인을 태우고 하루 200km를 주파할수 있다는 이야기를 보면 말의 운동능력에 관한 것을 포괄하여 세간의 사실들을 모두 뒤집어야 할 판국이네요.

달리말해 결국 이 말은 여지껏 맹신해온 세종 실록지리지를 비릇한 세간의 사료들에 대한 글쓴이 님의 근거도 같이 날아간다는 말입니다, 뭐 취사선택을 고집하시는데야 달리 신경도 안쓰시겠지만 말이지요.
1849 2014-06-08 18:14:1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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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는 그 쪽 같은 관심병 환자들이지요.
1848 2014-06-08 17:51:1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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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 어려우시면 논문 이름은 제쳐두고 학자가 누구인지만 알려주셔도 됩니다, 뒤는 정 안나오면 도서관이든 어디든 찾아볼테니 말입니다.
1847 2014-06-08 17:49:49 4
[새창]
그래요? 어느 학자들이 그렇게 주장하는지 좀 보여주시지요? 제가 아는 현재 학계의 중론은 함경도 일대인데 말입니다, 당장 riss 같은 것만 찾아보더라도 그러한 두만강 이북 만주 일대의 동북 9성 이야기는 찾아볼래야 찾아볼수가 없는데 이야기할 건덕지도 안되는 만주 일대에 관한 이 이야기를 학계에서 인정까지 받았다고 하시니 참 궁금하네요.
1845 2014-06-08 17:42:43 0
수메르 문명의 낙서 [새창]
2014/06/08 17:13:56
인터넷에 종종 돌아다니는 내용이기는 한데 실질적인 출처가 없어 신뢰를 두기 어렵지요.;
1844 2014-06-08 17:39:31 2
[새창]
문제는 그러한 의문을 제기한게 글쓴이님이 처음이 아닐뿐러 학계에 통과된 적이 아니 학계에 뭐라 말을 꺼낸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일것같나요?

말 그대로 취사 선택입니다, 본인이 사료로 인용한 사료마저 부정하고 수정하는 행태가 나올수 밖에 없어요, 이건 뭐 이야기 할 건덕지도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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