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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8 21: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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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두만강 이북설을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
성을 철수할 때에는 당연히 먼 땅에서부터 시작한다. 길주가 맨 북쪽이기 때문에 먼저 철수한 것이다.
이것으로 보면 9성의 땅은 모두 길주이내 서남쪽의 땅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설자(說者)들은 매양, “9성은 마땅히 두만강 안팎의 땅에 있다.”
하니, 이것은 《고려사》 지리지와 《여지승람》의 공험진에 대한 설에 의해 말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두 설대로 한다면 함주에서 공험진까지는 1천 8백여 리나 멀다.
대저 성읍(城邑)을 창건하는 목적은 변경을 튼튼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
이처럼 1천 8백 리나 먼 땅에다 9성을 설치하였다면 어떻게 능히 성원할 수가 있었겠는가?
반드시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사로 증거하면,
“여진이 길주를 포위하니 오연총(吳延寵)이 왕명을 받아 와서 구원하였다. 공험진에 이르니 적이 길을 막고 엄습하였다.”
하였으니, 그것이 길주 서남쪽에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또 임언(林彦)의 구성기(九城記)에,
“여진이 개마산 동쪽에 모여사는데, 지방이 3백 리로서 동쪽은 대해(大海)에 이르고, 서북쪽은 개마산을 끼고, 남쪽은 장주(長州)ㆍ정주(定州)에 접했다.”
하였으니, 이것으로 보면 9성의 땅이 또한 3백 리 안팎의 땅을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종(睿宗)이 윤관에게 준 교서(敎書)에,
“1백 리의 땅을 개척하여 9주(州)의 성을 쌓았다.”
하였으니, 만일 땅을 개척하여 두만강 북쪽 1천 8백 리나 먼 땅에 이르렀다면, 어찌 1백 리의 땅을 개척했다고 말하였겠는가?
공민왕 5년에 쌍성(雙城) 지금의 영흥(永興)이다. 을 격파하니, 조소생(趙小生)이 이판령(伊板嶺) 북쪽 입석(立石)의 땅으로 도망해 들어갔다 한다. 이판령은 지금의 마천령(磨天嶺)지금의 단천(端川) 동쪽 66리, 길주(吉州) 서쪽 1백 30리에 있다. 으로 단주(端州)ㆍ길주(吉州) 사이에 있다. 여기에 말한 입석이란 필시 윤관이 세운 것이리라.
공험진이 이미 길주의 서남쪽에 있으니, 그가 세운 비가 틀림없이 이 사이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