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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3 2014-06-08 17:23:0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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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에 보면 동계에 이르러 장춘역에 주둔하였는데 이는 빼앗긴 천리장성의 내지인 정주와 장주를 되찾는다는 1차 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입니다, 글쓴이 말대로라면 천리장성이 만주 일대에 조성되었고 고려의 동계 역시 만주에 있다는 말인데, 그럼 지명의 문제가 다시 불거지게 되며 더 나아가 고려사를 비릇한 사료들의 충돌이 불거지게 됩니다, 아무리 봐도 취사선택이 너무 과하시네요.
1842 2014-06-08 17:16: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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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춘역은 본디 장주에 속하는 곳이며 정주 부근입니다, 즉 어딘지는 명확한 사실이고 딱히 그 지역의 위치에 대하여 의문을 가질 이유가 없지요.
1841 2014-06-08 17:08:2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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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하고 싶으시다면야 강제할수는 없습니다만 취사선택을 해가며 구태여 사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역사라 보시는 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네요.
1840 2014-06-08 17:07:1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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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백도 아니고 자그만치 17만명이 이동하는 것입니다, 그 것도 제대로 된 교통 인프라나 보급 체계를 기대하기 힘든 환경속에 말이지요, 그 것을 생각하면 10여일의 거리라는 것은 오히려 적게 걸린것이라 볼수 있을텐데요? 백두산 저 너머라면 이 정도 속도가 나올수 있을까요? 당장 몽골과 같은 유래없는 속도를 자랑한 이들도 그러한 속도는 절대 나온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1839 2014-06-08 17:05:2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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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린 것 맞습니다, 말이 평균적으로 달릴수 있는 거리를 생각해볼때 또 한반도 내에서의 이동 조차 역마다 말을 갈아타며 달릴수 있는 이유를 그 것도 맨몸이나 다를바 없는 기수를 생각해보면 간단해요, 말은 그 정도 거리를 완전 무장한 인원을 태우고 단독으로 달릴수 없습니다, 필연적으로 말을 갈아 타야지요.

또한 고금 전래를 통틀어 어떠한 경우에도 원정시에 기병만 끌고 가지는 않습니다, 기병의 효용성만큼이나 명확한 한계를 보이는 병과를 가지고 단독으로 뭘 어쩌겠습니까? 아니 그 것을 떠나 후속 부대와의 합류를 이야기 하는 기록이 있나요?

또한 그렇게 강경한 짤방 까지 써가며 의아함을 표시한 지명은 어떻습니까? 함경도에도 정주는 있으며 기록을 놓고 볼때 이 쪽이 합리적인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고려의 수군이 대파 당한 것은 또 어떻게 설명을 하시겠습니까? 백두산 너머의 평원에 고려의 수군이 정박한 곳이 있나요?
1838 2014-06-08 16:55:1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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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본인이 틀렸다는 사실을 잘못된 내용을 주장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기 싫은 건 알겠는데, 당장 조선 시대만 보더라도 경상도에서 한양까지 31일이 걸리는 상황에서 그러한 교통 시설과 보급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길을 17만 대군이 이동한것입니다, 이건 결코 이상한게 아니에요,

기병만 따로 간다는 가정도 역마나 그렇게 아무것도 갖추지 않고 맨몸으로 말을 갈아탈때다 주파가 가능한거지 이런 상황에서 그게 가능할것같습니까? 더욱이 기병 혼자 달려가서 뭘 어쩌게요?

이건 그냥 정신줄 놓은게 아니면 시도할수 없는 행동이에요, 그런걸 가정이라고 볼수가 있을까요?
1837 2014-06-08 16:52:1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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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을 달고 보니 이야기를 덧붙이셨는데 지명 차이 안나요, 충돌? 그런거 없습니다, 그냥 이름만 바뀐거지 없는 이름 붙인게 아니라니까요.
1836 2014-06-08 16:41:2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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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몰라서 세종 실록 지리지의 정평 도호부의 기록을 가져옵니다, 졸라 이상할거 없습니다.

고려 정종(靖宗) 7년 신사【송나라 인종(仁宗) 경력(慶曆) 원년.】에 비로소 성(城)·보(堡)를 쌓고 정주 방어사(定州防禦使)로 하였다가, 공민왕(恭愍王) 5년 병신에 도호부로 고쳤다. 본조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정평(定平)으로 고쳤으니, 평안도 정주목(定州牧)과 이름이 같음을 피해서였다. 별호(別號)는 중산(中山)이다. 속현(屬縣)이 1이니, 장곡(長谷)이다. 고려 현종(顯宗) 3년 임자【송나라 진종(眞宗) 대중상부(大中祥符) 5년.】에 성(城)을 쌓고, 9년 무오【천희(天禧) 2년.】에 장주 방어사(長州防禦使)라 일컫다가, 뒤에 장주현(長州縣)으로 고쳐서 본부(本府)의 임내(任內)를 삼았고, 금상(今上) 4년 임인【명나라 영락(永樂) 20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keyword=장주

보시다시피 정주를 이름이 겹쳐 정평으로 바꾸고 뒤에 장주를 편입시켜 하나로 묶었음을 말하고 있지요.
1835 2014-06-08 16:35:5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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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장주는 어디냐고 하시면 여기도 정평군이에요, 무슨 말이냐면 장주는 지금의 정평군 사수리? 그 일대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정평군이라는게 어떤 하나의 지명만을 안고 있는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cybernk.net/infoText/InfoAdminstList.aspx?mc=AD0101&ac=A08

국가 지역 포럼 북한 지역 정보넷입니다, 보시다 시피 편입했다는 말이 분명하게 나오지요.
1833 2014-06-08 16:30:1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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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략)

고려 정종(靖宗) 2년(1036)에 동계(東界)라 일컬었고, 10년에는 삼관문(三關門)을 설치했고정주(定州)·선덕(宣德)·원흥(元興)이다. 장성을 쌓아 여진을 방비하였다. 고려 문종(文宗) 원년(1047)에 동북면(東北面)으로 일컬었다.혹은 동면(東面)·동로(東路)·동북로(東北路)·동북계(東北界)라 일컬었다.

고려 예종(睿宗) 2년(1107)에 여진의 성(城)을 공격하여 몰아내고는 9성(九城)을 설치하였고, 같은 왕 4년에는 여진에 돌려주고 다시 도련포로 경계를 삼았다. 고려 인종(仁宗) 3년(1125)에 금(金) 나라 사람이 오로지 웅거하며 갈라(曷懶)·휼품(恤品)의 2로(二路)를 두었다.함흥(咸興)에서 경성(鏡城)까지이다. 금나라의 치세가 끝날 때까지 바꾸지도 고치지도 않았는데, 금나라가 멸망하게 되자 원(元) 나라 사람이 계속 이어갔다.

고려 고종(高宗) 45년(1258)에 화주(和州)의 남북은 원 나라의 수중에 들어갔다. 공민왕(恭愍王) 5년(1356)에 강릉삭방도(江陵朔方道)로 고쳤다.화주(和州)·등주(登州)·정주(定州)·장주(長州)·예주(預州)·고주(高州)·문주(文州)·의주(宜州)의 8주와 선덕(宣德)·원흥(元興)·영인(寧仁)·요덕(耀德)·정변(靜邊)의 5진(鎭)을 수복하였다. 수춘군(壽春君) 이수산(李壽山)을 도순문사(都巡問使)로 삼아 파견하여, 강역을 정하고 다시 동북면으로 불렀다. 몽고에 몰락한 지 무릇 99년만에 비로소 수복한 것이다.

(생략)

- 문화 콘텐츠 닷컴 발췌

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10&cp_code=cp0233&index_id=cp02330043&content_id=cp023300430001&print=Y
1832 2014-06-08 16:28:0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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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내용을 추가로 걸어주셨는데, 이상할게 없는데요? 함경도에도 정주가 있습니다, 정평군으로 아마 조선 태종때인가 평안도의 그 것과 구별 짓기 위해 이름을 바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찾아보니 조선 태종때가 맞네요.
1830 2014-06-08 15:32: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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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진 정벌은 잘 정비된 교통 환경위에서 벌이는게 아닙니다, 지금 처럼 도로며 휴게소가 잘 깔린 상황이라면야 2백 km는 하루만에 주파하지요, 하지만 당시는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경상도에서 한양까지 31일이나 걸릴 정도로 매우 열악한 교통 환경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걸린 기간에 대하여 이상할게 전혀 없어요, 오히려 빠르다면 빠른 이동일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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