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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 2014-06-09 17:53:52 3
프랑스 혁명사 연재 - 5 [새창]
2014/06/09 17:09:14
음 제가 오해를 끼쳐드린것 같은데 제가 설명 드린 부분은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해군, 해운 사업의 구성원들 더 나아가 선박의 소유주와 운영 주체의 문제입니다,간략하게나마 몇자 적어보자면 아시겠지만 이 시기의 해군이라는 것은 왕실이 필요시 적절한 댓가를 지불하고 징발하는 것으로, 왕실 소유의 선박들도 있었으나 평시에는 대개 임대 형식으로 불하가 되어 운용되었습니다.

그러한 배의 선장이나 항해사 등은 일반 선원을 제한 전문직종들은 대개 귀족들이나 부르주아였고 말입니다, 문제는 영국의 경우는 앞서 헨리 8세의 치적으로 해군에 있어 군정과 민정의 분리가 이루어졌고 또한 찰스 1세 당시 왕권의 붕괴에 따른 전문직의 계층 확대 등을 거쳐 이러한 문제에 대한 파급효과가 매우 적었던 것에 반하여 프랑스는 여전히 그러한 측면에 관한 약점을 끌어 안고 있었습니다.

그 것이 터진게 이제 프랑스 혁명이며 여기서 프랑스 해군이나 해운 사업은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간신히 긁어모은 재건의 첫 발을 내딛었던 상황을 나폴레옹이 유럽을 상대로 전쟁을 펼치며 다시금 붕괴시키기도 하고말입니다.;
1886 2014-06-09 17:31:36 2
프랑스 혁명사 연재 - 5 [새창]
2014/06/09 17:09:14
한솥매니아님.. 맞는 말씀입니다만 사실상 재해권을 상실하는 것이나 다를바 없는 상황에 내몰린 것은 상당한 문제 였다고 봅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해군 제도나 수운의 상황을 보면 어쩔수 없는 상황이었겠지만 말이지요.
1885 2014-06-09 17:22:14 2
프랑스 혁명사 연재 - 5 [새창]
2014/06/09 17:09:14
여담이지만 정말 프랑스 혁명은 본문의 재정, 정치등 다양한 측면에서 프랑스 해운 사업과 해군에 돌이킬수 없는 타격을 주어 영국과 네덜란드에게 자리를 내주게 만들었고 더 나아가 나폴레옹이 영국을 넘지 못하게 만들었고 프랑스의 국력을 깎아 내렸지요, 근대화라는게 참 긍정적인 측면만을 안겨주는 일은 아니라는게 여실히 보이는 사례가 아닐까 합니다.
1884 2014-06-09 16:50:46 2
조상님 이야기가 나와서 [새창]
2014/06/09 16:40:34

그 분의 주장대로 라면야 함경도가 여기이니 평안도는 베이징이나 혹은 장안이나 낙양 어딘가로 봐야 하겠지요;

동방 3왕가는 연해주나 시베리아로 갈테고 말입니다, 참 뭐랄까 본인이 두만강 이북설을 따른다고 주장하면서 제시한 석사 논문도 본인의 주장을 논파하는 상황이고 본인이 논거로 제시한 조선 초기 기록이나 1차 사료들도 본인의 주장을 부정하는 상황이니 신뢰성을 가진다는게 무리입니다만 아무튼 보면 볼수록 미궁으로 들어가네요.
1883 2014-06-09 10:58:15 127
오유인 90%는 모르는 한글 상식.jpg [새창]
2014/06/09 10:51:54
영국 목사였던 존 로스는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중에 1876년 압록강을 건너 온 한약 장수 이응찬을 만나 한국어를 배웠습니다. 그는 한국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1877년에는 Corean Primer를 펴냈습니다. 이 책에는 평안도 사투리가 그대로 표현되어 있으며 1과와 3과에는 띄어쓰기를 하고 있지만, 2과에는 띄어쓰기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최초로 띄어쓰기 한 문헌으로는 1882년 박영효가 쓴 ‘사회기략(史話記略)’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일관성이 없어 제대로 된 띄어쓰기라고 보기는 어렵고, 본격적으로 띄어쓰기가 이루어진 것은 ‘독립신문’이 발간되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이후 띄어쓰기가 정착되면서 1933년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에서 띄어쓰기를 공식적으로 규정해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라고 하는군요, 답글은 정부 대표 블로그 정책공감의 작년 한글날 기념 게시물에서 가져왔습니다.
1881 2014-06-09 10:49:20 1
글이 완성본에 가깝다고 판단되면 게시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네요. [새창]
2014/06/09 10:36:08
이런 말은 뭐한데 그냥 글에서 묻어나는 본심 그대로 다른 사람의 의견은 듣기 싫다 나만이 진리고 너희가 틀렸다 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말로는 이성적이고 균형잡힌 역사관을 견지하네 어쩌네하지만 정작 본인이 답변할수 있을것 같으면 이성적인 답글이고 아니다 싶으면 비 이성적이고 틀린 주장이며 잘못된 생각이라니 대체 기준은 어디에 있는지 말입니다, 거기다 균형잡힌 역사관 운운하면서 하는건 나한테 반대하면 비이성적인 친일이고 식민사학이며 조작을 업으로 삼는 알바인 사람이고, 그러한 자신의 주장은 혐한에서 주어만 바꾼 극우에 결론부터 내리고 자료를 끌어모으는 취사선택이요, 근거없는 본인의 상상을 고집하는 것이니 뭐하러 이성이니 역사관이니 하는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1880 2014-06-09 07:18:00 0
[새창]
취사선택이라는 사실에서 이미 이야기가 끝난거죠, 당장 아래글만 봐도 신뢰하는 조선 초기 기록들에서 주장에 반하는 논거가 나온걸요;

뭐 그런걸 고민할 것 같으면 레퍼런스나 학자의 이름을 묻는데 가서 학설이 뭔지 알고나 오라고 전화번호를 던지거나 자기 논거를 까뒤집는 석사 논문을 끌고 오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1879 2014-06-09 07:13:39 1
[새창]
그리고 애시당초 취사선택이라 결국은 본인의 논거 마저 부정해야 할 판국인데 그 건 어쩔 건가요? 그런 주장이 신뢰성 있다고 볼수나 있나 모르겠습니다.

레퍼런스라고 던진 석사 논문부터 본인의 주장을 까 뒤집고 들어가는 마당에 구태여 그런걸 고민하는건 무리겠지만 자화자찬 한번 끝내주네요.
1878 2014-06-09 07:10:10 1
[새창]
누가 그 쪽의 주장을 모른다고 했나요? 아니면 그쪽의 주장이 없는 거라 했나요? 레퍼런스의 제목 아니면 학자 이름이라도 알려 달라고 했더니 왠 훈제 청어 질입니까? 한국말 모르세요? 어려워요?

뭔 글인가 봤더니 처음 부터 끝까지 시원하게 자위질하시네요, 본인이 답변이 가능할것 같으면 이성적인 답변이고 불가능하면 생각없는 짓거리인가요? 참 기준한번 끝내주시네요.
1877 2014-06-08 23:04:11 0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오해에 관한 글입니다. [새창]
2014/06/06 11:48:52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제가 해방 이후의 경제적 발전에 관해서는 특히나 모자란터라 큰 도움이 되었네요;
1876 2014-06-08 22:25:28 2
[새창]
4. 이 논문의 핵심은 마행도인데 꼭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크게 작성자의 추정을 용천과 마행도를 중심으로 동북 9성의 전개를 곁들이며 그 논거로서 귀화하는 여진인의 숫자로 미루어 볼때 북진 정책이 활발하게 전개되지 않았겠냐는 것으로 주장에만 그치는 점이 많은 터라 반론의 자료로서 쓰기에는 좀 부적합 측면이 많습니다.

아무튼 더 드릴말씀이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의람님 말씀처럼 추정과 결과에 기인하여 논지를 전개하시는 분께 이 이상으로 무슨 말씀을 더 드려봐야 들으실리도 없다는건 여지껏 동일한 논지 전개 방식을 보여주신 분들이 여실히 잘 알려주셨기 때문이지요,
1874 2014-06-08 22:21:29 2
[새창]
일단 대강 읽어본 결과를 두서는 없지만 말씀드리자면 1. 작성자님이 가지시는 공험진, 두만강 이북설의 주된 논거인 조선 초기 기록에 대한 신뢰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아 거기에 작성자 님이 주장하시는 완정 군장 기수를 태운 군마가 200km를 하루만에 주파 할수 있다는 설도 부정되네요.

2. 1차 사료에 대한 반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전체적으로 확신이라기 보다는 추정에 그친다고 봐야 할것입니다, 때문이다, ~로 보인다, 그럴것이다, 가 반복되고 있는데...이게 중요한게 아니라 반대되는 그러니까 반론에 대한 답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모순이나 문제점에 대한 고찰이라고 해야할까요? 거기에 대한 반론이 없습니다.

물론 영토에 대한 인식이 당시에 미비하였고 행정구역으로 확실하게 편입하였느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말이지요.

3. 위와 겹치는 사유인데 북진 정책은 귀화 사례가 급증하는 것에서 원인을 찾을수 있다 라고 하는데 사실상 농업 국가인 고려가 북방 한계선이라고 볼수 있는 강 건너의 영토를 몽골 강점기 이전까지 점유하여야 할 사유를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4. 이 논문의 핵심은 마행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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