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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 2014-06-08 22:08:12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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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지금 주장을 하면서 그냥 믿어라 입니까? 그냥 닥치고 들어라 에요? 어차피 다 같은 설이고 그 중에 학계에서 중론이다 아니다 정도로 볼수 있겠지요.

네 그런데요? 그게 반론을 하지 말아야 될 이유가 됩니까? 훈제 청어좀 그만 던지세요.
1872 2014-06-08 21:56: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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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올리신 중앙 선데이의 기사도 1차 사료의 해석은 제쳐두고 세종 실록 지리지에 매달리고 있는데 사실상 세종 실록 지리지도 명확하게 공험진의 위치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즉 모르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고 고려지경이라는게 마치 윤관이 세운 것 처럼 말하고 있지만 실제는 아무도 모른다는 점을 넘어가고 있네요, 즉 입증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1871 2014-06-08 21:54:0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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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러니까 레퍼런스 제목이나 학자 이름을 물어 보았지요? 누가 설이라는걸 부정했나요? 모른다고 했어요? 되도 않는 훈제 청어는 좀 그만 던지세요,
1870 2014-06-08 21:52:3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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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학설을 모른다고 했습니까? 레퍼런스 제목이나 학자 이름을 알려달라는데 왜 자꾸 훈제 청어를 던지세요?
1869 2014-06-08 21:51:5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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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중기 동북계 범위에 대한 고찰이라 읽어본 기억이 나네요, 좀 오래되서 그렇기는 한데 아마 고려가 상경 용천부까지 수복했다는 그러니까 발해의 영토를 50%가량 회복했다는 논지를 펼치고 있었습니다, 논거를 다소 확대 해석하는 경향이 짙은데다 실질적으로 다른 사료들과의 충돌을 설명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나네요.
1868 2014-06-08 21:45:4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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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어렵게 말을 하거나 외국어로 말한게 아니잖아요, 지금 그 학설이 없다는 것도 아니고 모른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말 한 적도 없어요.

다만 주장하시는 그 레퍼런스의 제목이나 학자가 누군지 물어보는게 왜 그렇게 어렵고 힘든가요?
1867 2014-06-08 21:45:0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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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제 청어 던지지 말고 답변이나 하세요, 아시는게 맞다면 답변 못하실리가 없지 않습니까?

대체 두만강 이북설을 주장하여 학계에서 인정 받았다는 그 레퍼런스의 제목, 어려우면 학자의 이름이 뭔가요?
1866 2014-06-08 21:44:2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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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니까 말씀하신게

학계요? ㅎㅎ 학계라는 것이 꼭 대학교의 역사학자들만 지칭하는 좁은 의미가 아니라면 제가 알아본 바로는 조금씩 학계일부 학자들이 윤관의 동북9성을 두만강이북에서 이뤄진 것일 수도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더군요 좀더 알아보시죠

이거 아닙니까? 여기에 대해서 제가 뭐라고 답글을 달았길래 한번도 모른다 뭐한다 한적도 없는 학설을 설명하고 기관 전화번호를 나열하십니까?
1865 2014-06-08 21:43:1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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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제가 뭐라고 질문드렸습니까? 어느 학자들이 주장했는지 그 레퍼런스 제목좀 알려달라고 그랬지요? 어려우면 학자 이름이라도 알려달라고 말입니다.

대체 누가 학설을 모른다고 했나요?
1864 2014-06-08 21:41: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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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뚱하게 훈제 청어 던지지 마시고 질문에 답이나 해주세요, 몇번을 질문드립니까? 대체 주장하신 그 학계에서 인정받았다는 학자의 이름이나 논문제목이 뭐냐니까요?
1863 2014-06-08 21:40:2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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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설이 뭔지 안다는 말을 몇번을 드립니까? 제가 궁금한건 지금 주장하신 그 인정받은 학자의 이름이나 논문 제목이라니까요? 아시니까 주장하신거 아니에요?
1862 2014-06-08 21:39:5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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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기면 된다? 제가 뭘 가지고 우겼는데요? 완전 무장한 기병이 하루 200km를 주파하고 곧바로 전투를 벌일수 있다? 아니면 교통 인프라나 보급의 난제를 끌어않은 17만 대군이 현대의 그것에 준하는 이동 속도를 보여야 한다? 그 것도 아니면 취사선택을 가지고 우겼나요? 대체 뭘 가지고 우겼습니까?

지금 학자 이름이나 논문 제목을 알려달라니 갑자기 발끈하시는데 참 어이없을따름이네요, 아시는건 맞으시나요?
1861 2014-06-08 21:38:1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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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 학설이 존재하였는지 모른다고 합니까? 알아요, 그런데 학계에서 중론은 함경도에 위치했다는 사실이라는 겁니다, 즉 님께서 그러한 두만강 이북설을 학계에서 인정받은 학자가 있다고 하니 그러한 학자의 논문 제목, 그게 어려우면 학자의 이름이라도 알려달라고 한 것입니다,

모르는 걸 남탓한다는건 참 우문일따름이지요.
1860 2014-06-08 21:33:4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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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문제가 적나라 하게 드러나는 것이 지금 주장하고 계시는 두만강 이북설입니다, 거기에 대하여 학계의 인정을 받은 학자가 존재한다고 하니 그 논문의 제목, 그게 어려우면 학자의 이름을 알려달라는 겁니다, 뻔히 검색하면 나오는 기관의 전화번호가 아니라 말이지요,
1859 2014-06-08 21:31:5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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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1차 사료인 고려사의 오연총 열전을 보면 지금 글쓴이 님이 하시는 비정의 문제가 적나라 하게 드러납니다,

여진이 다시 원근 모든 부락을 모아 길주(吉州)를 포위하기를 수개월 동안 하고 성(城)에서 10리(里) 거리에서 소성(小城)을 쌓아 6책(柵)을 세우고 성을 치기를 매우 급하게 하매 성이 거의 함락되는지라 병마 부사(兵馬副使) 이관진(李冠珍) 등이 군사를 독촉하여 하루 밤에 다시 거듭 성을 쌓고 지키며 싸웠으나 역사(役事)가 오래되고 형세가 궁하매 사상자가 많았다. 오연총이 이를 듣고 분연히 가고자 하거늘 왕이 다시 부월(鈇鉞)을 주어 보냈다. 행군하여 공험진(公嶮鎭)에 이르매 적이 길을 막고 덮쳐 치므로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장수와 군사가 갑옷을 버리고 제성중(諸城中)으로 흩어져 들어가니 함몰하여 사상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오연총이 장계를 올려 인책(引責)하고 윤관과 더불어 군사를 거느리고 장차 다시 길주으로 나아가려 하는데 때마침 적이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기 때문에 드디어 돌아왔다

개경에서 길주의 화급함에 원병을 끌고간 오연총이 공험진에서 전투를 벌여 패배합니다, 주장대로라면 북으로 갔다 다시 내려와야 하는데 이게 말이나 됩니까?

그리고 윤관 열전도 작성자님의 주장에 반하고 있지요,

그 지방이 300리(里)인데 동(東)으로는 대해(大海)에 이르고 서(西)로는 개마산(盖馬山)에 끼었고 남(南)으로는 장주(長州)·정주(定州) 두 주(州)에 대었으니 산천의 수려함과 토지의 기름짐은 가히 우리 백성을 살게 할만하며 본래 고구려의 소유라 그 고비(古碑)의 유적이 아직 남아 있으니 대저 고구려가 전에 잃었던 것을 지금 임금이 뒤에 이것을 얻었으니 어찌 천명(天命)이 아니리요.

윤관이 개척한 땅이 3백리입니다, 시대에 따라 리의 규격?이 조금씩 다르다지만 180km~200km를 넘지는 않겠지요, 즉 함흥에서 길주까지 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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