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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8 21:3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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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1차 사료인 고려사의 오연총 열전을 보면 지금 글쓴이 님이 하시는 비정의 문제가 적나라 하게 드러납니다,
여진이 다시 원근 모든 부락을 모아 길주(吉州)를 포위하기를 수개월 동안 하고 성(城)에서 10리(里) 거리에서 소성(小城)을 쌓아 6책(柵)을 세우고 성을 치기를 매우 급하게 하매 성이 거의 함락되는지라 병마 부사(兵馬副使) 이관진(李冠珍) 등이 군사를 독촉하여 하루 밤에 다시 거듭 성을 쌓고 지키며 싸웠으나 역사(役事)가 오래되고 형세가 궁하매 사상자가 많았다. 오연총이 이를 듣고 분연히 가고자 하거늘 왕이 다시 부월(鈇鉞)을 주어 보냈다. 행군하여 공험진(公嶮鎭)에 이르매 적이 길을 막고 덮쳐 치므로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장수와 군사가 갑옷을 버리고 제성중(諸城中)으로 흩어져 들어가니 함몰하여 사상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오연총이 장계를 올려 인책(引責)하고 윤관과 더불어 군사를 거느리고 장차 다시 길주으로 나아가려 하는데 때마침 적이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기 때문에 드디어 돌아왔다
개경에서 길주의 화급함에 원병을 끌고간 오연총이 공험진에서 전투를 벌여 패배합니다, 주장대로라면 북으로 갔다 다시 내려와야 하는데 이게 말이나 됩니까?
그리고 윤관 열전도 작성자님의 주장에 반하고 있지요,
그 지방이 300리(里)인데 동(東)으로는 대해(大海)에 이르고 서(西)로는 개마산(盖馬山)에 끼었고 남(南)으로는 장주(長州)·정주(定州) 두 주(州)에 대었으니 산천의 수려함과 토지의 기름짐은 가히 우리 백성을 살게 할만하며 본래 고구려의 소유라 그 고비(古碑)의 유적이 아직 남아 있으니 대저 고구려가 전에 잃었던 것을 지금 임금이 뒤에 이것을 얻었으니 어찌 천명(天命)이 아니리요.
윤관이 개척한 땅이 3백리입니다, 시대에 따라 리의 규격?이 조금씩 다르다지만 180km~200km를 넘지는 않겠지요, 즉 함흥에서 길주까지 라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