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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8 2014-06-16 22:51:2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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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 대신 인신 공격은 너무 식상하지 않나요?
2067 2014-06-16 22:16:46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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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의 후예들 이라고 불리기에는 저는 색이 검은색과 녹색이라 맞지 않는 부분이 다분한데다, 전공도 다릅니다.

아무튼 취사선택은 좀 자제해주시지요?
2066 2014-06-16 22:14:4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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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의 학설을 들고오네 마네 하시더니 엉뚱한걸 들고오셨네요, 그나저나 기사의 앞뒤를 잘라 가져오시면 어떻합니까? 중요한 부분이 사라졌네요.

파장의 진원지는 지난 4월14일 낮 충남대에서 열린 한국고대사학회 정기발표회장. 첫 발제자인 윤용구 인천시립박물관 학예사는 ‘새로 발견된 낙랑 목간’이라는 제목으로 북한의 최신 발굴 유물을 갈무리한 소개글을 발표했다. 기원전 45년(한나라 연호로는 초원 4년) 낙랑군 내 25개 현의 현별 호구와 인구, 전체 인구 28만여 명을 기록한 당시 공문서 목간이 평양 낙랑 구역의 옛 귀틀무덤에서 발굴됐다는 내용이었다. 북한 사학자 손영종이 지난해 북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학술지 <력사과학> 198~200호의 논문들을 통해 보고한 이 유물은 기원전 108년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군을 설치한 뒤 60여 년 지난 시점에 나온 유일한 통계 사료다.

평양 일대는 낙랑군 통치 지역?

윤 학예사는 손영종의 논문을 분석한 결과, 목간은 낙랑군 25개 현의 현별 호구 수를 적은 통계표라고 소개했다. 목간 목록, 사진, 수효, 서체, 판독 글자 전문 등은 언급이 없으나 낙랑군 남쪽 관할인 남부도위 7개 현, 동쪽 관할인 동부도위 7개 현, 중심부인 직할 11개 현의 일부 인구와 호구 수가 기록돼 있다. 목간 통계를 보면, 고조선 도읍이었고 낙랑군의 핵심부인 조선현(평양)의 호구 수가 근 1만 호에 이르는 등 직할지 11개 현의 인구가 17만9천여 명, 남부도위 대방현 이하 7개 현이 5만1167명 등 모두 4만5956호에 28만여 명이 낙랑군에 살았던 것으로 파악됐다. 윤 학예사는 <후한서> <한서> 등 기원후 한나라 사서의 인구통계와 비교한 결과 연평균 인구 증가율이 0.8%로 중원 다른 지역의 정상적인 증가율과 거의 일치한다고 밝혔다.

또 조선현 등 직할지 11개 현은 인구밀도가 높아 대부분 2천 호를 넘었다. 반면 동부도위나 남부도위는 1천 호 미만의 작은 현이 각각 3개, 6개였다. 동부도위의 동이현(함남 안변으로 추정)은 279호 2030명의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 또 목간은 전체 인구의 14%인 4만 명을 한족(중국인), 86%는 토착민으로 분류해 꽤 많은 중국 사람들이 흘러들어온 사실도 보여준다.

주류학계는 목간의 이런 통계 내용들을 한반도 서북 지역에 낙랑군이 설치됐음을 새삼 확증하는 결정적 증거로 받아들이고 있다.

일제시대부터 사학자 이병도 등이 통설로 제기한 낙랑군의 한반도 주재설은 80년대 이후 거센 반론에 부딪혀왔다. 북한 학계와 재야 학자들은 평양에 낙랑군과는 다른 ‘낙랑국’이란 토착 독립 국가가 기원후까지 존속했다가 후한에 복속되었으며, 313년 고구려에 흡수됐다고 주장해왔다. 기원후 32년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인 호동왕자가 낙랑왕 최이의 딸 낙랑 공주와 결혼하면서 내통해 낙랑국을 멸망시켰다는 <삼국사기> 기록, 이곳의 중국계 출토 유물들이 기원후 후한 계통이라는 것이 주된 근거였다. 이는 중국 왕조가 경영한 낙랑군은 요동벌의 요하 부근이나 더 서쪽인 요서 대릉하 일대에 있었다는 두 개 낙랑 병립설로 이어졌다.

그러나 북한 출판물에 보고된 목간의 발굴로 요동·요서 존립설은 빛이 바래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게 주류 학자들의 시각이다. 윤 학예사의 말대로 “목간의 호구 통계가 평양, 서북 지방이 낙랑군 통치 지역임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며, 각 현 관리들이 중앙의 명령에 따라 통계를 보고하지 않으면 만들 수 없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목간 통계에서 낙랑군 직할 지역이 가장 인구 밀집도가 높은 것으로 나온 만큼 평양이 통치의 중심이라는 사실도 명확히 입증됐다는 것이다. 한족과 토착민을 갈라 인구통계를 냈다는 점에서, 당시 낙랑 사회는 한족이 토착 사회 속에 융화하는 단계까지 이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북한 학설의 비현실적 한계 드러내”

북한 쪽은 왜 자기네 주장과 맞지 않는 목간 자료를 공개한 것일까. 손형종은 논문에서 “목간의 호구 통계가 얼핏 서북한에 낙랑군이 있던 것처럼 보이나 자세히 검토하면 요동반도 천산산맥 일대에 위치했다는 확고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목간에 나온 낙랑군을 평안, 황해도 지역으로 가정할 경우 인구가 밀집한 곡창 지대인 황해도 중심에 해당하는 군 남쪽 관할(남부도위) 3개현 인구수가 6000여명에 불과한 것으로 기록된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요동반도 남단이 인구통계에 걸맞는 지리 경제적 조건을 지녔다면서, 요하 부근의 별도 낙랑군 주재설을 입증하는 근거로 뒤집어 보고있다. 목간 출토지가 평양인 것은 요동 낙랑군의 관리가 목간을 들고 도망해왔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윤 학예사를 비롯한 남한 연구자들은 황당하고, 설득력이 떨어지는 가설이라고 이를 반박하고 있다. 영남대 사학과 권오중 교수는 “목간이 나온 장소를 우선 감안하지 않고, 거리가 먼 요서 쪽에 낙랑군 위치부터 비정하는 것은 북한 학설의 비현실적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윤 학예사는 “북한 스스로 낙랑군의 요동·요서 존재설을 부인하는 자료를 공개한 셈”이라며 “목간 정보의 전모에 대해 북한 쪽이 침묵하는 것은 이런 배경이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생략)
2065 2014-06-16 22:03:5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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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리고 조선사 편수회가 20만권의 서적을 압수 강탈했다는 논거로 그 쪽에서 유일하게 제시하는게 사업 개요에 서적의 절멸을 강구한다는 것인데 실제 앞뒤 내용을 보면 그런거 소용없으니 할 필요 없다는 내용입니다, 결국 지금 말하고 있는 비판하고 계시는 조작을 행하시는 것이고 간단하게 보자면 취사 선택이지요.

조선인은 다른 식민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야만 미개의 민족과 달리 독서 속문屬文에 있어서 결코 문명인에 뒤떨어지지 않으면 고래로부터 사서가 많고 또한 새로이 저작한 것도 적지 않다. 그런데 전자의 것은 독립시대의 저술로 현대와의 관계를 결하고 함부로 독립국의 옛꿈을 추상케 하는 폐가 있으며, 후자의 것은 근대 조선에 있어서의 일청, 일로의 세력 경쟁을 서술하여 조선이 취할 향배를 오도하고, 혹은 [한국통사]라고 칭하는 재외 조선인의 저서와 같이 사실의 진상을 구명하지 않고 막연히 망설을 멋대로 늘어놓고 있다.

이와 같은 사적들이 인심을 고혹케 하는 해독은 참으로 말로 다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이와 같은 사적들의 절멸을 강구한다는 것도 도로徒勞일 뿐 아무런 효과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와 같은 사적의 전파를 격려하는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차라리 구사舊史를 금압하는 대신 공명, 적확한 사서를 만드는 것이 첩경이며 또한 그 효과가 새롭게 현저할 것이다.
2064 2014-06-16 21:57:5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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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관보가 얼마나 높은 직위라고 생각하십니까? 수사관도 아니고 그 보조입니다, 밑에서 두번째에요.
2063 2014-06-16 21:56:1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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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사학자가 학문의 성과나 그 결과물을 놓고 말하는 것이 아닌 곧 식민 사학자 라면 찰스 다윈은 진화론자가 아니라 창조론자이지요.
2062 2014-06-16 21:55:4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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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전 108년에 조선의 수도 왕검성(평양)이 함락되자, 한제국은 조선을 말살하고 자국의 군현제를 실시하여 사상史上에 저명한 동방4군을 설치하였다. (중략) 현도군의 최초의 위치를 압록강의 상류지역과 동가 유역에 비정하는 나의 신설은...(하략)

- 한국 고대사 연구 , 이병도
2061 2014-06-16 21:53:0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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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를 드려도 안보여 안들려 하시며 출전을 비웃으시는 걸 보니 어떤 분인지 감이 오네요.
2060 2014-06-16 21:52:06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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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데 그 이병도가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았다는 증언도 반대의 경우와 다르게 존재하고 있으며, 실제 조선사 편수회 내에서 집필을 담당한 이들은 일본인이지 조선인이 아닙니다, 물론 직위도 자료 수집등에 국한되는 매우 낮은 직위였고 말이지요.
2059 2014-06-16 21:51:0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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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8 2014-06-16 21:50:4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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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조선총독부 관보 69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처는 초록불님 블로그입니다.
2057 2014-06-16 21:47:3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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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반도 설이 구라로 판명난 적 없습니다, 물론 강단사학이니 뭐니 카르텔이 참 역사를 가리고 있다는 유사 역사 관련에서는 적극적으로 부인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2056 2014-06-16 21:46:4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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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그 사라졌다던 서적들이 최근 다시 발견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나 실제 남은 서류로 보나 고대사, 상고사 서적도 아니고, 20만권은 양입니다, 종류가가 아니라 말이지요, 물론 주체는 조선사 편수회도 아니며 이 조선사 편수회는 천황 직속 기구도 아닙니다, 목적도 역사 조작이 아니었지요.
2055 2014-06-16 21:38:0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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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게시판에 어울릴법한 주제는 아닌 것 같네요.;
2054 2014-06-16 14:54:47 1
동양척식회사에 우리 황실이 엄청난 거액을 투자햇네요. [새창]
2014/06/16 14:23:32
우리나라의 LH 공사와는 중첩되는 분야가 있기는 하지만 업무나 규모가 다릅니다, 우리나라, 일본, 만주, 중국은 물론이거니와 동남아 까지 진출하였고 비단 부동산 관련뿐만 아니라 이주 지원, 투자 개발, 금융, 광공업, 수산업, 농업, 임업, 수리 사업 심지어는 발전소에까지 여러 분야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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