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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8 2014-06-22 18:08:34 0
초기 화승총엔 왜 착검이 안됐나요? [새창]
2014/06/22 17:36:38
아니 진짜 이게 상식적으로 무게 중심도 안 맞는 무기를 가지고 총검술이 되리라고 생각했던건지 참 놀랍기 그지 없습니다.
2217 2014-06-22 18:07:37 0
초기 화승총엔 왜 착검이 안됐나요? [새창]
2014/06/22 17:36:38
제가 일본 제국군의 기관총 총검술이라는 귀축영미를 무찌를 절후 무후한 비기를 이어 받은 계승자였군요 (.....)

와 이건 뭐 정신줄을 어디다 두고 만든건지 알수가 없는 무기인데, 설계자를 털면 좀 나아 졌을까 싶네요.
2215 2014-06-22 18:03:41 0
초기 화승총엔 왜 착검이 안됐나요? [새창]
2014/06/22 17:36:38
음 제가 알기로는 당시 기준으로 볼때 깡통?만으로 10kg가 넘어갈텐데 거기다 총검을 달다니 군대에서 내무부조리로 M60이나 M2로 총검술을 하던 기억을 떠올리면 실용성이 없어보이네요;

하기야 일본 제국이니까 로 납득은 가기는 합니다만 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2214 2014-06-22 17:53:39 0
2차 세계대전중 6월 22일에 일어난 일 [새창]
2014/06/22 15:36:55
소련의 인명 경시 사상은 아직도 러시아의 성별 대비 인구수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에서 그 위엄?을 엿볼수가 있지요.
2213 2014-06-22 17:50:30 0
초기 화승총엔 왜 착검이 안됐나요? [새창]
2014/06/22 17:36:38
참고로 k3나 미니미 등 기관총이 그 자체만으로 7kg 정도 나갑니다.
2212 2014-06-22 17:48:32 0
초기 화승총엔 왜 착검이 안됐나요? [새창]
2014/06/22 17:36:38
잘은 모르지만 추측을 해보자면 무게때문이 아니었을까요? 10kg에 육박하는 초창기의 화승식 머스킷에 칼날을 달아 휘두르려면 좀 힘들지요, 안그래도 단각대를 쓰지 않으면 사격이 불가능할정도인데 말입니다.
2211 2014-06-22 17:26:31 1
[새창]
사진 판독으로 털리다 뭐다 이야기 할수가 없지요, 당장 앞서 언급했지만 가령 흑백 사진으로 고구려 기와가 가지고 있는 색상이 보입니까? 아니면 사진 한장으로 비석의 상태를 꿰뜷어 볼수 있나요? 이건 뭐 말할것도 없는 문제이지요, 상식 운운 하시면서 기초적인 아주 기초적인 상식을 무시하십니까? 대체 어느 나라의 상식이 그렇습니까?

애시당초 사진으로 유물에 대한 결론을 내리는 것이 신뢰성을 가지는건 불가능하지요, 왜요 골동품 시장에서 사진만 가지고 물건의 상태를 파악해서 구입하는 사람도 있답니까? 간단한 이야기에요 그러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어요, 그러한 행동은 말도 안되는 것이고 어떠한 결론도 얻을수 없기 때문이지요.
2210 2014-06-22 17:21:11 0
[새창]
낙랑토성 이야기도 해볼까요? 낙랑토성에서 나온 와당이 고구려 것이라고 확신하려면, 일단 권운문와당인지, 연화문와당인지, 혹은 다른 종류의 고구려 와당인지 여부를 살펴봐야 했습니다, 고구려식 와당이라고 언급했던 와당의 모양 중 끝부분이 말린 형태는 고구려 것 중 권운문와당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인데 단순히 당심만 크면 된다는 단언은 틀린 이야기이고 위험한 발상이지요, 물론 이후 고구려가 그 곳을 점유했으니 고구려 와당이 나올 가능성은 높은게 사실입니다만 새겨진 문양, 색깔, 기타 특징들에 대한 추론은 전혀 없이 한식 기와가 아니라는 단순한 결론을 내려서는 안되는게 사실이지요.

또한 낙랑토성에서 나온 한식기와만 갖고 낙랑토성을 낙랑군 치지로 보는 것은 아니기때문에 그에 수반되는 낙랑토기와 같은 다른 근거들도 공파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건 전혀 없었지요, 어째서 낙랑군 치지로 거론되었고, 현재 학계의 생각은 어떠한지 정도는 방송을 만들때 참고했어야 하는데 그런 건 단 한번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가령 정인성 씨를 사석에서 만나면서 장무이묘 관련 논문은 보고, 낙랑토기 관련 논문은 참고하지 않았는지 참 이해할수가 없지요.

그리고 한식기와 중 한 무제 시기에만 사용된 것들이 출토되었다면,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나게 됐는지 유물의 출토양상과 발굴과정등의 이유를 찾아야지 그 것만으로 낙랑군이 없었다는 결론을 내릴수 있습니까? 한식기와 이외에 고구려 기와도 있었다는 식의 언급을 할 거였다면, 고구려 기와 전문가를 초빙하거나, 전문가 초빙이 방송의 취지에 맞지 않았다면, 섣부른 결론을 내리지 말았어야 했던게 사실입니다.

끝으로 앞서도 이야기 한바 있지만 어떠한 유물을 두고 얘기할 때 사진만 갖고, 그것도 흑백사진만 갖고 언급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고구려 기와 및 와당을 언급할때 색깔은 상당히 중요한 분류 기준 중 하나가 됩니다. 환원소성으로 회색 혹은 회백색을 띠는 기와 겉에 적색 안료를 칠한 흔적도 확인되기 때문에 붉은 색이 고구려의 상징색이 아닌가 하는 의견까지 나올정도이지요. 물론 단순히 산화소성한 것이 아니기는 하지만 이런 현실을 놓고 볼때 기와의 세부적인 분류 속성을 따지지 않을 바에야, 최소한 이런 부분이라도 신경을 썼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는 사진만 갖고 유물에 대해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말해주는 사례라고 할수 있겠고 전문가들이라면 모를리가 없는 일입니다,
2208 2014-06-22 17:12:29 0
[새창]
글쎄요, 방송을 보셔도 모르신다면 저도 할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방송에서 가령 점제현 신사비를 이야기 해보자면 일본 학자 역시 원본은 같지만, 탁본의 시기는 달랐을 가능성을 점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유물이 출토되면 그 출토양상을 기록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그 당시도 동일한 방식을 택했으리라고 누가 장담할수 있으며 비석의 현재 상태에 대하여 누가 명확하게 이야기를 할수 있나요? 당장 약간의 요철이나 굴곡 등이 있다 하더라도 상당히 다르게 찍혀나올 것은 자명한 터라 , 사진만으로 판독하기 힘든 직접 탁본을 떠보지 않으면 모르는 어느 정도의 왜곡현상은 인정해야 하는게 사실입니다, 교수들이 그랬으니 그럴것이다? 무조건적인 수용이 가지는 문제는 생각하지 않으시나봅니다? 어느 일반인 스탠스가 무조건적인 수용을 합니까? 또 어느 일반인 스탠스가 무조건적인 비판을 택한다고 했던가요, 폄하하는것도 분리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사진을 통해 유물을 감식하는 방식이 대체 어딨나요? 이게 요점 아닙니까? 제가 역사 전공은 아니지만 유물을 사진으로 감정한다는 이야기는 살다 처음 듣습니다, 사진으로 판독을 요청했으니 했겠지만 과연 실제 감정을 저렇게 할지는 의문이지요.

그리고 한문장씩 들고온다고요? 누가요? 자꾸 방송 시간에 집착하는데 훈제 청어 던지지 마세요, 요점은 지금 방송에서 행하는 방식의 신뢰성이고, 그러한 신뢰성은 매우 낮은 형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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