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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3 2014-06-28 23:29:3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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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아편전쟁 이전의 경우 은본위제를 실시하고 있는 중국의 은 보유액이 1793년 7000만 냥에서 1820년에는 약 1000만 냥으로 줄어들 정도로 심각한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중국측 기록을 보면 20~55세의 남성들 중 1% 400만 명이 중독자로 추산되었는데 말 그대로 추산이라 실제 숫자는 알수가 없습니다.

더불어 영국측 기록을 보면 1836년 중국에 수입된 아편은 1200만명 이상의 중독자들에게 공급할 수 있는 양이었는데 아편 밀수가 빈번히 일어나고 외국인들과의 접촉이 많았던 광둥성과 푸젠성에서는 성인 인구의 90%가 중독되어 있었으며 외국인 여행자들과 선교사들은 아편 상점과 끽다실이 런던의 진 판매 상점 그러니까 술집만큼 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청나라 8대 황제인 도광제의 아들 셋이 아편 중독으로 인하여 죽었으니 뭐 말할것도 없겠지요.
2352 2014-06-28 23:25:5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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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하트님.. 사료나 고고학적 발굴 모두 고대의 숙박시설에 관한 정보는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터라 이렇다 할 정보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나 통신, 교통 등의 측면에서 고려와 같이 잘 정비된 교통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는가도 미지수라 말이지요.;
2351 2014-06-28 23:15:0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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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목간 출토지가 평양인것은 들고 도망온것이라 하는데 왜 멀고 먼 이 곳까지 도망 왔는지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군요, 무엇을 가지고 이게 사실이라 보시는지 도망 온 이유를 좀 설명해주시지요?
2350 2014-06-28 23:13:0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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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윤 학예사를 비롯한 남한 연구자들은 황당하고, 설득력이 떨어지는 가설이라고 이를 반박하고 있다. 영남대 사학과 권오중 교수는 “목간이 나온 장소를 우선 감안하지 않고, 거리가 먼 요서 쪽에 낙랑군 위치부터 비정하는 것은 북한 학설의 비현실적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윤 학예사는 “북한 스스로 낙랑군의 요동·요서 존재설을 부인하는 자료를 공개한 셈”이라며 “목간 정보의 전모에 대해 북한 쪽이 침묵하는 것은 이런 배경이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2349 2014-06-28 23:12:2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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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 옮겨오신 기사를 계속 보자면

그러나 북한 출판물에 보고된 목간의 발굴로 요동·요서 존립설은 빛이 바래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게 주류 학자들의 시각이다. 윤 학예사의 말대로 “목간의 호구 통계가 평양, 서북 지방이 낙랑군 통치 지역임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며, 각 현 관리들이 중앙의 명령에 따라 통계를 보고하지 않으면 만들 수 없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목간 통계에서 낙랑군 직할 지역이 가장 인구 밀집도가 높은 것으로 나온 만큼 평양이 통치의 중심이라는 사실도 명확히 입증됐다는 것이다. 한족과 토착민을 갈라 인구통계를 냈다는 점에서, 당시 낙랑 사회는 한족이 토착 사회 속에 융화하는 단계까지 이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중략)

손형종은 논문에서 “목간의 호구 통계가 얼핏 서북한에 낙랑군이 있던 것처럼 보이나 자세히 검토하면 요동반도 천산산맥 일대에 위치했다는 확고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목간에 나온 낙랑군을 평안, 황해도 지역으로 가정할 경우 인구가 밀집한 곡창 지대인 황해도 중심에 해당하는 군 남쪽 관할(남부도위) 3개현 인구수가 6000여명에 불과한 것으로 기록된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요동반도 남단이 인구통계에 걸맞는 지리 경제적 조건을 지녔다면서, 요하 부근의 별도 낙랑군 주재설을 입증하는 근거로 뒤집어 보고있다. 목간 출토지가 평양인 것은 요동 낙랑군의 관리가 목간을 들고 도망해왔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2348 2014-06-28 22:55:0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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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에서 이미 다른 분이 이야기 하신 내용이지만 중국에서 건너온 이들이고 중국에서 벌어진 일이면 중국인이고 중국의 역사이지, 그게 왜 우리의 역사인지 이해가 가질 않네요, 좋아보이면 우리꺼 아니면 남의꺼 뭐 그런건가요?
2347 2014-06-28 22:46:3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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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들만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겸사 겸사였지요, 대략 12km 하나씩 총 525개의 역이라 하는 숙박을 겸하는 통신 시설이 존재했고, 그 중에는 혜음원이라 하는 행궁을 겸하는 거대한 숙박시설도 존재했습니다.
2346 2014-06-28 22:33:4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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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주막이라고 하는 주점과 숙박업을 겸업하는 형태의 민간 업소가 등장하는 것은 조선 시대에 접어들면서 생기는 일인데, 그 이전에는 둘을 겸업하는 사례가 보편적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행간 숙소는 어떻게 처리를 했는가 보자면 절에서도 숙박업을 시행하기도 했고, 왠만큼 인심이 각박하지 않은 이상 민가에서 재워주는 게 보통이었고 또 보통 여행객들이 맨몸으로 다니는게 아니라 식량이나 땔깜 등을 가지고 다니기에 얼마든지 요금?을 지불할수 있어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동네 유지 그러니까 양반들이 품위 유지?를 위하여 식객을 유치하기도 했고 말이지요.
2345 2014-06-28 22:28:0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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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언을 하자면 지역별로 이미 근절 시킨 사례가 존재합니다, 가령 임칙서가 전권대신이 된 이유가 후난성에서 아편 무역을 성공적으로 근절시킨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아편의 근절에 실패한 궁극적인 원인은 임칙서의 정책 실수도 있지만 자희태후 그러니까 우리가 서태후라고 부르는 동치제의 생모께서 아편 중독자이셨습니다, 뭐 가장 높으신 분부터 이러니 답이 없지요.
2344 2014-06-28 22:22:3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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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 하게 영국에서는 돈이 없는 가난한 노동자들이 술 대신 택하거나 육아 용품으로 쓰던 것이 바다를 건너니 있는 사람들의 고상한 취미 생활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던게 점점 하층민으로 번져 나갔지요.
2343 2014-06-28 06:14:59 2
백두산에 대해.. [새창]
2014/06/28 00:30:59
그러고 보면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이유로 삼는 분들중 원나라 시기의 상황을 생각하시거나 말씀하시는 분들도 없었지요.
2342 2014-06-27 20:40:46 2
'악의적 사실 왜곡'…문창극이 그린 조선말 풍경 [새창]
2014/06/27 15:26:20
고니시님..언급하신것들을 평가 절하 생각은 없습니다만 특별히 우리가 타민족보다 우월한 민족이라는 증거는 아닌데 말입니다, 신기전이 최초의 로켓 병기이거나 거북선이 현대 전함의 시초도 아니고 말이지요.
2341 2014-06-27 15:28:4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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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이야기 해주셨지만 어떤 하나의 문화권으로 정의 내릴수가 없어요, 이러한 문화권에 대한 기준은 동북 공정의 사업 내용에 포함되지도 않고 있지요.
2340 2014-06-27 15:12:0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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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몽블랑이나 에베르스트 산을 각 나라에서 다르게 부른다고 어떤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냥 부르는게 다를 뿐이지요, 마찬가지로 백두산을 어찌 부르든 문제는 없습니다.
2339 2014-06-27 15:11:1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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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차례 올라온 글이지만 중국이 어떻게 부르든 상관없습니다, 동북공정과도 무관한 부분이고, 그냥 자기들이 여지껏 불러오던게 장백산인것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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