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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8 23: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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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 옮겨오신 기사를 계속 보자면
그러나 북한 출판물에 보고된 목간의 발굴로 요동·요서 존립설은 빛이 바래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게 주류 학자들의 시각이다. 윤 학예사의 말대로 “목간의 호구 통계가 평양, 서북 지방이 낙랑군 통치 지역임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며, 각 현 관리들이 중앙의 명령에 따라 통계를 보고하지 않으면 만들 수 없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목간 통계에서 낙랑군 직할 지역이 가장 인구 밀집도가 높은 것으로 나온 만큼 평양이 통치의 중심이라는 사실도 명확히 입증됐다는 것이다. 한족과 토착민을 갈라 인구통계를 냈다는 점에서, 당시 낙랑 사회는 한족이 토착 사회 속에 융화하는 단계까지 이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중략)
손형종은 논문에서 “목간의 호구 통계가 얼핏 서북한에 낙랑군이 있던 것처럼 보이나 자세히 검토하면 요동반도 천산산맥 일대에 위치했다는 확고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목간에 나온 낙랑군을 평안, 황해도 지역으로 가정할 경우 인구가 밀집한 곡창 지대인 황해도 중심에 해당하는 군 남쪽 관할(남부도위) 3개현 인구수가 6000여명에 불과한 것으로 기록된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요동반도 남단이 인구통계에 걸맞는 지리 경제적 조건을 지녔다면서, 요하 부근의 별도 낙랑군 주재설을 입증하는 근거로 뒤집어 보고있다. 목간 출토지가 평양인 것은 요동 낙랑군의 관리가 목간을 들고 도망해왔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