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유인페이지
개인차단 상태
Lemonade님의 개인페이지입니다
회원가입 : 12-06-21
방문횟수 : 1328회
닉네임 변경이력
일반
베스트
베오베
댓글
2488 2014-07-05 09:47:17 1
식민 사관이 무섭긴 무섭네요.... [새창]
2014/07/04 22:26:50
대륙에우리의 역사가 있다거나 환단고기는 언젠가 진실로 밝혀 지리라던가 혐한에서 주어만 혐일로 바꾼 이야기라던가 답정너에 트롤링 조롱 비하 정신승리를 반복하는 글들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글일까요?

아 그리고 이병도 친일 행적을 누가 부정하던가요?
2487 2014-07-04 22:09:24 7
[새창]
연관성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니까 근래의 증산도에서 자신들의 교리에 입맛에 맞기에 완역이라는 미명하에 나무를 학대하고 있지요.

물론 환단고기가 어떠한 종교의 특정 목적하에 출간된 서적은 아닙니다, 그냥 입맛에 맞는 것 뿐으로 쿠투넷 등의 성지에서는 민족의 성서를 돈벌이, 종교 장사에 쓴다고 싫어할 정도입니다.
2486 2014-07-04 22:07:36 3
한권으로 읽는 고구려실록 읽고 있는데요. 백제 대륙 진출설 신뢰할만한가요 [새창]
2014/07/04 19:59:12
글쎄요, 뻥쟁이라고 하시는데 저게 제가 말하고 있는 제대로 된 신뢰할수 있는 그러한 기록이던가요? 그냥 정신승리하시는 모양새가 아주 볼만하네요.
2485 2014-07-04 22:05:11 4
한권으로 읽는 고구려실록 읽고 있는데요. 백제 대륙 진출설 신뢰할만한가요 [새창]
2014/07/04 19:59:12
반론은 안되고 이기고는 싶다는게 어떤 모습인지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는 상황이네요, 장황할게 무엇이고 복잡한 논리는 또 무엇입니까?

프로파간다적인 성향의 편지, 혹은 대화를 가져다 사료라고 들고 있고, 누가 처들어가고 어떠한 상황인지 전무한 도리어 요서 경략설을 들때 찬성측이 꼭 들고 나오는 남제서에 북위군의 대선을 빼앗은 공으로 광위장군 면중후에 제수된 동성왕 당시의 기록까지 나오기에 요서 지역이 아닌 백제에서 벌어진 전쟁이라고 볼수 있는 것을 요서 경략설의 논거로 들고 나오는데 논리의 문제가 있는 쪽은 누구일까요.
2484 2014-07-04 21:53:52 4
한권으로 읽는 고구려실록 읽고 있는데요. 백제 대륙 진출설 신뢰할만한가요 [새창]
2014/07/04 19:59:12
그게 왜 관련 기록인지부터 설명을 해주시지요? 북위로 건너가 싸웠다는 논거는 무엇이고 상대사시중장(上大師侍中狀)의 프로파간다를 왜 사료로 보는지요?
2483 2014-07-04 21:49:48 6
한권으로 읽는 고구려실록 읽고 있는데요. 백제 대륙 진출설 신뢰할만한가요 [새창]
2014/07/04 19:59:12
그냥 그렇게 강력한 힘을 가진 너희들이 우리를 좀 봐달라는 글로서 백제와 고구려의 내용은 아무리봐도 사실을 기록했다기 보다는 과장하여 기록된 양념으로 끼얹어진 내용인데요?
2482 2014-07-04 21:48:30 6
한권으로 읽는 고구려실록 읽고 있는데요. 백제 대륙 진출설 신뢰할만한가요 [새창]
2014/07/04 19:59:12
상대사시중장(上大師侍中狀) 전문입니다, 이게 시쳇 말로 딸랑거리는 글일까요? 아니면 정밀하게 기록된 사료일까요?
2481 2014-07-04 21:47:52 3
한권으로 읽는 고구려실록 읽고 있는데요. 백제 대륙 진출설 신뢰할만한가요 [새창]
2014/07/04 19:59:12
삼가 아룁니다. 동해(東海) 밖에 세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마한(馬韓)과 변한(弁韓)과 진한(辰韓)이었는데, 마한은 곧 고구려요 변한은 곧 백제요 진한은 곧 신라입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강한 군사가 100만이나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남쪽으로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를 침범하고 북쪽으로 유주(幽州)와 연주(燕州) 및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의 지역을 동요시키는 등 중국에 커다란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황(隋皇 수 양제(隋煬帝))이 실각한 것도 요동(遼東)을 정벌한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정관(貞觀) 연간에 우리 태종황제가 직접 육군(六軍)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천토(天討)를 삼가 행하였는데, 고구려가 위엄을 두려워하여 강화를 청하자 문황(文皇 태종)이 항복을 받고 대가(大駕)를 돌렸습니다.

우리 무열대왕(武烈大王)이 견마(犬馬)의 성의를 가지고 한 지방의 환란을 평정하는 데에 조력하겠다고 청하면서 당나라에 들어가 조알(朝謁)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부터였습니다. 그 뒤에 고구려와 백제가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악행을 일삼자 무열이 입조(入朝)하여 향도(鄕導)가 되겠다고 청했습니다. 그리하여 고종황제(高宗皇帝) 현경(顯慶) 5년(660)에 소정방(蘇定方)에게 조칙을 내려 10도(道)의 강병(强兵)과 누선(樓船) 1만 척을 이끌고 가서 백제를 대파하게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그 지역에 부여도독부(扶餘都督府)를 설치하여 유민(遺民)을 안무(按撫)하고 중국 관원을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였는데, 취미(臭味)가 같지 않은 까닭에 누차 이반의 보고가 올라오자, 마침내 그 사람들을 하남(河南)으로 옮기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총장(總章) 1년(668)에는 영공(英公) 이적(李勣)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격파하게 하고 그곳에 안동도독부(安東都督府)를 두었는데, 의봉(儀鳳) 3년(678)에 이르러서는 그 사람들도 하남의 농우(隴右)로 옮기게 하였습니다. 고구려의 잔당이 규합하여 북쪽으로 태백산(太白山) 아래에 의지하면서 국호를 발해(渤海)라고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개원(開元) 20년(732)에 천조(天朝)에 원한을 품고서 군대를 이끌고 등주(登州)를 엄습하여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죽였습니다. 이에 현종황제(玄宗皇帝)가 크게 노하여 내사(內史)인 고품(高品)ㆍ하행성(何行成)과 태복경(太僕卿)인 김사란(金思蘭)에게 명하여 군대를 동원해서 바다를 건너 공격하게 하는 한편, 우리 왕 김모(金某)를 가자(加資)하여 정태위(正太尉)에 임명한 뒤에 절부(節符)를 쥐고 영해군사(寧海郡事) 계림주대도독(雞林州大都督)의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습니다.그러나 겨울이 깊어 가면서 눈이 많이 쌓여 번방(蕃邦)과 중국의 군사들이 추위에 괴로워하였으므로 칙명을 내려 회군하게 하였습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300여 년 동안 한 지방이 무사하고 창해(滄海)가 편안한 것은 바로 우리 무열대왕의 공이라 할 것입니다.

지금 치원이 유문(儒門)의 말학(末學)이요 해외의 범재로서, 외람되게 표장(表章)을 받들고 낙토에 조회하러 왔으니, 마음속으로 간절히 말씀드릴 내용이 있으면 모두 토로하여 진달하는 것이 예의상 합당할 것입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원화(元和) 12년(817)에 본국의 왕자(王子) 김장렴(金張廉)이 표풍(飄風)으로 명주(明州)에 와서 상륙하였는데, 절동(浙東)의 모 관원이 발송하여 입경(入京)하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또 중화(中和) 2년(882)에 입조사(入朝使) 김직량(金直諒)이 반신(叛臣)의 작란(作亂) 때문에 도로가 통하지 않자 마침내 초주(楚州)에 상륙하여 이리저리 헤매다가 양주(楊州)에 와서야 성가(聖駕)가 촉(蜀)으로 행차하신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때 고 태위(高太尉)가 도두(都頭) 장검(張儉)을 차출해서 그를 감호하여 서천(西川)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예전의 사례가 분명하니, 삼가 원하옵건대 태사시중께서는 굽어살피시어 은혜를 내려 주소서. 그리하여 특별히 수륙(水陸)의 권첩(券牒)을 내리시어 가는 곳마다 주선(舟船)과 숙식(熟食)과 먼 거리 여행에 필요한 마필(馬匹)과 초료(草料)를 공급하게 하시고, 이와 함께 군대 장교를 차출하여 어가(御駕) 앞까지 보호해서 이르게 해 주시면 더 이상의 다행이 없겠습니다.”
2480 2014-07-04 21:42:15 5
한권으로 읽는 고구려실록 읽고 있는데요. 백제 대륙 진출설 신뢰할만한가요 [새창]
2014/07/04 19:59:12
알고 있어요, 뭐 답변을 하나 마나 불리하다 싶으면 무조건 친일파니 뭐니 비하에 비아냥 조롱이나 할줄 아시는 분께 뭘 기대합니까? 폭탄? 글쎄요, 미진한 독해력을 자랑하실게 아니라면 하실 말씀이 아닐텐데요?
2479 2014-07-04 21:41:36 6
한권으로 읽는 고구려실록 읽고 있는데요. 백제 대륙 진출설 신뢰할만한가요 [새창]
2014/07/04 19:59:12
최치원의 상태사시중장이라 이걸 논거로 내민 정인보 선생의 말을 빌자면 제와 노 지방 즉 산동반도 일대를 공격했다는 기록도 있고, 이 지역에 백지래왕의 사당이 있는데 백지는 백제니까 여기도 백제의 땅일것이다가 전부입니다,

거기다 상태사시중장은 그 토록 강력했던 고구려와 백제를 물리친 상대를 칭찬하며 이득을 꾀하는 프로파간다적인 기록인데 이걸 사료라고 보라는 말인가요?

동성왕? 역시 정인보 선생의 주장인데 황현 인근에 백지래왕百支萊王 이라는 사당이 있는데, 일찍이 자신의 중신의 책봉을 요청하면서 이들을 면중왕, 팔중후 등으로 임명했으니 백제가 이 동래를 점령하고 그 지역의 태수를 두었고 그의 책봉명이 래왕이라는 것이지요, 물론 논거는 전혀 없습니다.

306년에 토벌된 동래군 황현 현령의 반란 이후에 점령하였고 그 이전부터 근거지는 있다는데 이미 한서 지리지에 백지래왕사百支萊王祠가 나오지요.

얼어죽을 대놓고 뻥이네 뭐네 하는데, 그냥 난 반론할 능력도 무엇도 없기는 하지만 나는 정의로운 투사이니 닥치고 내 말 들어라 일따름인 논리에 무슨 신뢰성이 있을까요?

아아 그리고 동성왕이 북위랑 싸워서 이겼다는 기록으로 요서 경략설을 주장할지 모르지만 목간나 라는 장수가 북위군의 대선을 빼앗는 군공을 세웠다는 기록은 어쩌시겠습니까? 누가 바다를 건너왔는지 너무나 명백한데 말이지요.

친일파 친일파 아주 그냥 라면 스프마냥 마법의 단어네요.
2476 2014-07-04 20:46:17 4
[새창]
이게 진짜 신의 한수군요, 우와.....
2475 2014-07-04 20:34:04 0
모든 프랑스 병사들은 탄약통에 원수봉을 넣고 다닌다. [새창]
2014/07/04 11:32:47
그래서 나오는 말이 이제 유럽에서의 패권을 중시하는 귀족들의 구 엘리트적인 사고가, 신대륙과 상업적 이익의 수호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성향을 낳았다 라는 것일텐데 뭐 그러한 것을 떠나 영국과 프랑스의 상황은 좀 달랐던 것이 해군의 문제로 프랑스로서는 나폴레옹 시대까지 제대로된 관리나 통제등에 있어 심한 고충을 겪어야 했습니다, 가령 프렌치 - 인디언 전쟁 당시의 북미 대륙의 상황이라던가, 혁명 정부 당시 미국이 지원한 식량 원조를 안전하게 지켜내기 위하여 남은 전력을 거의 모두 쏟아부어야 했던 것 등을 들수 있겠지요.

예컨데 식민지 들과 큰 어려움 없이 선이 닿았고 프렌치 - 인디언 전쟁을 거치며 오히려 식민지를 증식시킨 영국과 그러하지 못한 그나마도 목 좋은 노른자위는 전부 빼았겼지만 남은 것 마저도 위태위태했던 프랑스는 다소 차이가 있다는 말로 아무래도 식민지의 대다수를 온전히 지켜낼수 있었더라면 if이지만 그러한 식민지의 산업적인 능력은 기대하기 힘들었다고는 하지만 부담은 덜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2474 2014-07-04 20:28:18 2
한권으로 읽는 고구려실록 읽고 있는데요. 백제 대륙 진출설 신뢰할만한가요 [새창]
2014/07/04 19:59:12
근거 있는 반대는 보지 못했다는 말은 거울을 보시고 하신게 확실하네요,
<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
< 431 432 433 434 435 >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