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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3 2015-03-23 23:24:22 3/4
윤관의 여진정벌이 귀주대첩이상가는 업적일수도 있다네요(펌) [새창]
2015/03/21 20:55:40
네 그러한 부분에 있어 찾아보시고 결론을 그러니까 의문을 가지게 되셨다고 하셔서 사원의 경제 활동에 대한 연구들을 찾아보실것을 말씀드린것입니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살펴보시면 지금 가지신 궁금증과 답글에 대한 의문들이 충분히 해소될테니 말이지요.
4002 2015-03-23 23:06:58 3/4
윤관의 여진정벌이 귀주대첩이상가는 업적일수도 있다네요(펌) [새창]
2015/03/21 20:55:40
아 위에 잘못 쓰여진 부분이 있는데 전공자의 논문이나 연구는 원문위에 작성되는게 맞습니다, 글이 뒤섞이고 잘려나가서 이런 문제가 생겼는데, 전공자의 논문이나 연구를 일견 경계를 해야하는 것은 맞으나 그 것을 원문을 배제하고 거칠게 표현하자면 무시할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일반 역사 게시판인만큼 접근성 측면에서 원문 원 사료보다는 이 쪽이 더 간결하기도 하고 말입니다.
4001 2015-03-23 22:32:37 4/4
윤관의 여진정벌이 귀주대첩이상가는 업적일수도 있다네요(펌) [새창]
2015/03/21 20:55:40
음 우선적으로 늦게나마 답글을 달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말씀에 대하여 답글을 달자면 사실 제 답변은 상기와 대동 소이 하기에 별 의미가 없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달아보자면 우선적으로 수원승도나 항마군이 하는 일과 구성에 대하여 저를 비릇하여 다른 분들이 답변을 달아 드렸고, 이러한 부분에 있어 당시의 농민들과 다를바 없다는 사실을 답변하여 드렸습니다, 그에 대하여 해가람님께서는 본인의 느낌과 결과는 모르겠습니다만 나름 찾아본 경험 바탕으로 수원승도가 일반 농민과 다르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셨지요.

자 여기에 있어서 수원승도나 항마군이 왜 다른지를 우선적으로 지금 지적해주셨다 시피, 일반 농민과 다르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필요가 있었습니다, 느낌을 우선시 하시는게 아니라 말입니다, 그러한 부분에 있어 나름 찾아보셨다고 하셨기에 단정할수 있는 사료 등의 출처에 바탕하여 저술되어진 보다 다양한 측면에서 조명할수 있는 제가 답글에서 언급한 바 대로 사원에 속한 농민 혹은 노비들이 곧 수원승도다 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지할수 있는 그러한 폭 넒은 관련 내용을 담고 있는 사원의 경제 활동에 대한 연구들을 찾아보실것을 권장드린것입니다.

단정할수 있는 사료는 분명 중요하나 전공자의 논문이나 연구가 그에 벗어난 존재일수도 없고, 사실상 접근성을 놓고 볼때나 말씀하시는 일반의 범주 즉 일반인의 인식 범위에 가까운 것은 논문이나 연구가 보다 가깝기도 할테지요, 가령 조선왕조실록 등이 지금과 같이 인터넷 상에서 번역되지 않았던 시기에 어느 정도의 범주를 일반인으로 놓고 말씀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비 전공자에 가까운 일반인이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게 될때 무엇을 먼저 찾게되었을까요? 또한 전공자의 논문이나 연구 등이 과연 어떠한 바탕 위에 저술되어 질까요?

그 것은 절대로 원문일수는 없을테지요, 지금도 물론 번역되지 않은 수 많은 원서들은 연구 결과와 논문을 토대로 그 존재 가치와 내용을 보이고 있습니다, 접근성 면에서 절대로 원서에 뒤떨어진다고 볼수야 없지요, 물론 내용에 있어 간혹 작성자들의 시각차는 존재하겠지만 말입니다.
4000 2015-03-23 09:13:05 3/4
윤관의 여진정벌이 귀주대첩이상가는 업적일수도 있다네요(펌) [새창]
2015/03/21 20:55:40
고려사 병지를 찾아보는 것이나 사원의 경제 활동에 관한 연구를 찾아보는 것이나 접근성에서 얼마나 차이가 있을지는 의문입니다만사원의 경제 활동에 대한 연구를 보라고 말씀 드린 것은 이미 관련 내용을 찾아보셨다 라고 말씀하셨던데다 느낌을 근거로 삼아 그 것은 아닌 것 같다 라고 하시니 드린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납득할수 있는 구절이나 추론을 원한다 라고 하시는데 사실 그 들이 평시에 맡고 있는 일을 생각해본다면 그 들이 일반 농민과 어떤 부분에서 다른 지는 일단 해가람님 입장에서는 나름 찾아보신 결과 다르다고 느끼신 것 같은데, 그게 어떤 부분에서 그러한지 제 입장에서는 잘 납득이 안되는 부분이라 찾아보시는 김에 좀 더 찾아보시기를 권장 드린 것이며, 일반의 범주를 넘어선 이야기는 이미 고려사 병지를 원하시는 순간 넘어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아 물론 직접 찾아다 드리는게 일반적인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다면야 할말은 없습니다만 말이지요;
3999 2015-03-22 23:44:05 4/4
윤관의 여진정벌이 귀주대첩이상가는 업적일수도 있다네요(펌) [새창]
2015/03/21 20:55:40
논점이 흐려진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수원 승도가 일반 농민들과 다르지 않다 라는 것은 그 들이 평시에 맡고 있는 일에서 증명이 되며 무엇보다 어떤 집단인가를 배제하고 그 집단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를 알수 있지는 않으니 그 들이 어떠한 집단인지 아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또한 수원승도나 항마군이라는 칭호는 칭호일뿐입니다, 실질적으로 앞서 사원의 경제 활동에 대한 연구를 보라는 말씀을 드린 것은 그러한 수원승도가 평시에 하는 일을 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 들은 그냥 사원에 매여진 노동자일뿐이지 일반인과 다른 어떠한 가령 일반적인 승려와 마찬가지로 수행을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항마군이라는 명칭도 그럴듯한 칭호일뿐이지 다른 일반 징집병들과 하는 일이 다르지 않습니다.
3998 2015-03-22 22:10:23 5/5
윤관의 여진정벌이 귀주대첩이상가는 업적일수도 있다네요(펌) [새창]
2015/03/21 20:55:40
덧붙이자면 隨 따를 수 院 집 원 僧徒 즉 승려의 무리에서 볼수 있듯이 말 그대로 사원을 따르는 승려들로 별다른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군에서 따로 일군을 형성한 이유는 일견의 해석에 따르자면 국가의 질서에 편입시키려는 정책의 일환이라 할만큼 말 그대로 전국 각지의 비대한 사원들에게 속한 인력이 일군을 형성할 정도로 많았기 때문이고, 이 들이 일반 농민과 다를바 없다는 건 사원의 경제 활동에 대한 연구를 보시면 됩니다.;

이게 일견 기분 나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말 그대로 수행과는 거리를 두고 사원의 순수한 경제 활동을 전문적으로 담당한 것이 이제 사원의 최하층이라 할수 있는 수원승도인데, 이 들이 왜 다른 승려들과 다르냐 농민과 무엇이 같으냐 라고 반문하신다면야 어떻게 설명 드릴 방도가 없습니다.
3996 2015-03-22 21:53:40 5/6
윤관의 여진정벌이 귀주대첩이상가는 업적일수도 있다네요(펌) [새창]
2015/03/21 20:55:40
따로 특별한 부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해인사의 비문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모습에서 알수 있듯이 비대해진 사원을 보호해줄 인력이 필요했고, 그 인력을 기존의 사원이 가진 경제적 기반 그러니까 사원전 즉 토지 경작 부터 염업 심지어는 고리대까지 그 모든 것에 임하였던 사원에 속했던 사원에 역을진 노비들에게서 찾는게 보다 효율적이었을뿐입니다, 그러한 노동력의 주체들을 달리 부르는게 수원승도일뿐이지요.

이 들이 일반 농민, 백성들과 다르다고 생각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다를게 없습니다, 노비냐 아니냐 그 정도의 차이일뿐이지요, 애시당초 사원이 왠만한 호족, 군벌 그 이상으로 비대해진 상황에서 달리 순수한 승려들이 경제 활동에 뛰어들 이유가 없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3995 2015-03-22 08:47:06 8/6
윤관의 여진정벌이 귀주대첩이상가는 업적일수도 있다네요(펌) [새창]
2015/03/21 20:55:40
자고 일어나 보니 필력이 좋지는 못한 상황에서 상태가 안 좋은 상황에 단 답글이 엉망이라 수정과 첨언을 할겸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고려와 금나라의 관계는 일견 여진 정벌이 영향을 주었다 볼수 있으나, 어디까지나 지정학적 요건에 따라 거란 즉 요나라와 송나라를 앞에 둔 금나라 로서는 고려에 신경을 쓸 여력이 부족했던게 사실입니다.

이 것은 본문에 언급한 보주의 문제에서 입증되는데 1032년 거란 즉 요나라는 보주를 점령하고 그 곳에 성을 증축하는데 이는 고려로서는 큰 위협이라, 여러 차례 돌려줄 것을 청원하나 당연히 요지를 내달라는 요청을 들어줄리는 없었지요.

그러한 와중에 금나라와의 전쟁이 벌어지며 보주를 향해 전선이 임박해오자 거란은 보주를 고려에게 돌려준다는 통보를 하고는 도주합니다, 사실상 금나라의 영토나 다를바 없는게 사실이나 고려는 시쳇 말로 빈집 털이를 하며 보주 성 2개를 얻어냈고 이후 1126년 부터 1130년까지 지리한 외교전이 벌어지나 포기한 건지 뒤에는 언급되지 않게 되는데, 이는 고려의 국력이 강대했다기 보다는 말 그대로 요나라와의 전쟁에 있어 전선을 증가시킬 이유를 찾지 못한 것에 가깝습니다,

고려로서도 요나라 혹은 금나라와의 전쟁이나 외교전으로 득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양국의 대치 국면에 있어 우연찮게 득한 것이라 고려의 국력을 이야기 하기는 좀 그렇지요.

두번째로 9성을 돌려준것이 1109년이고 금이 건국된 시기가 1115년입니다, 불과 10년도 안되는 시기에 여진이 어떠한 국력을 급성장시켜 국가를 건국했다 보기는 어렵습니다, 사실 여진 정벌 자체가 이미 비대할정도로 급 성장한 완안부의 세력에 놀란 여진인들이 귀부를 신청하며 벌어진 일인데, 이 과정에서 고려의 대응은 후대의 제 시각이나마 일견 참으로 아쉽기 그지 없는 부분이 많습니다,

물론 긍정적인 측면도 찾아볼수야 있겠으나 고려를 상국으로 인정하고 서로간의 관계 개선에 앞장선 이들을 공격하다 패퇴하여 굴욕적인 강화 조약을 맺고, 그 것을 원통하게 여겨 신께 맹세까지 할 정도로 이를 갈며 시작한 이후의 원정에서 친 고려에 가까웠던 지금의 함경도 일대의 여진 추장을 몰살하는 등, 관계 개선이나 유지에 손을 놓은듯한 모습은 어디까지를 좋게 봐야 할지 의문이지요.

거기다 당장 고려사 등의 기록을 보면 문 무 산관이서로부터 장사하는 사람, 종 및 주 부 군 현에 이르기까지 모든 말을 가진 자를 신기(神騎)로 삼는 한편 나이 20 이상의 남자로 과거 응시자가 아니며 말 없는 자를 신보(神步)로 삼고 승도 즉 스님들을 데려다 항마군(降魔軍)으로 삼아 병력을 충원하는 한편 이 외에 궁병이나 노병 등을 끌어다 넣기도 했던 것에서 볼수 있듯이 총 동원령을 내리고 온 나라의 국력을 끌어모아 전쟁을 벌였고 동원된 정규군만 고려 총 병력의 1/4, 여기에 수반 되는 군호와 물자를 밀어 넣었지만 당장 고려가 얻은게 뭐가 있을까요,

비옥한 토지도 명분도, 그 무엇도 남지 않은게 여진 정벌의 뒷모습입니다, 도리어 이러한 무리한 원정과 이주 실패으로 국가의 생산성 등 국력에 타격을 안겨주지 않았을지 여진의 단합에 큰 명분와 이해 관계를 제공하지는 않았을까 싶을 따름이지요.

그리고 몇가지 잘못된 부분이 있는데, 가령 연환마라는건 금나라의 중기병은 다른 중기병이 1이라 할때 3~4까지 중갑을 덧대었다 봐도 좋을 정도로 준둥한 이들이라 진형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자, 억지로 진형을 유지시키고자 한 것이었지, 결사의 각오를 다지고 이런건 아닙니다,

고려의 기동력을 이야기 하신 부분도 우야소 즉 오야속은 사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사냥을 하고 있었고, 여진인들이 당시에 물론 이후로도 그렇습니다만 모두가 하나된 어떠한 단합된 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 는 것과 통신 수단의 한계점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고려가 본격적인 침공을 한 시기가 12월 중순이고 오야속이 완안부로 돌아가 부족회의를 연 시기가 12월 말이라는 것에서 볼수 있지만 빈집 털이를 들어간거라 봐도 좋습니다.
3994 2015-03-22 00:46:44 1
[새창]
데일리 메일이면 더 썬과 자웅을 겨루는 찌라시 계의 대부이지요; 너무 확신을 가지시고 믿으시기에 앞서 다른 논거는 무엇이 있는지 더 찾아보시는게 좋을듯 합니다.
3993 2015-03-21 21:54:32 14
윤관의 여진정벌이 귀주대첩이상가는 업적일수도 있다네요(펌) [새창]
2015/03/21 20:55:40
하나 더하자면 애시당초 통교를 맺고 잘 지내보자고 손을 내민 상대를 두들겨 패다 도리어 대패를 당한게 이 여진 정벌의 시작입니다, 뭐 그 이전부터 변방의 이민족들과의 관계는 좋지 못했다고는 하나 애시당초 고려를 상국으로 인정하고 서로간의 관계 개선에 앞장선 이를 또 호의적인 이들을 몰아내고자 무리하게 전쟁을 벌였고, 정규군의 1/4과 이를 지탱할 물자, 셀수 없는 군호, 초기의 무리한 원정 인력 등 나라의 국력을 있는데로 부었지만 그 이면에는 현지 사정이나, 현실, 외교적 관계에 무지했음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이 전쟁에 높은 평가를 줘야 할지는 개인적으로 의문이기는 합니다, 애시당초 일어나지 않았을 전쟁일수도 있던게 사실이고, 이 전쟁으로 무 엇을 얻을수 있었는지는 글쎄요, 뭐가 고려의 손안에 남았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3992 2015-03-21 21:47:41 13
윤관의 여진정벌이 귀주대첩이상가는 업적일수도 있다네요(펌) [새창]
2015/03/21 20:55:40
아 그리고 처음 정벌에 나선 부대는 정예군은 아닙니다, 고려사 등의 기록을 보면 문 무 산관이서로부터 장사하는 사람, 종 및 주 부 군 현에 이르기까지 모든 말을 가진 자를 신기(神騎)로 삼는 한편 나이 20 이상의 남자로 과거 응시자가 아니며 말 없는 자를 신보(神步)로 삼고 승도 즉 스님들을 데려다 항마군(降魔軍)으로 삼아 병력을 충원하는 한편 이 외에 궁병이나 노병 등을 끌어다 넣기도 했던 것에서 볼수 있듯이 숫적인 열세를 극복하려 노력한 것을 알수 있고,

에...그리고 금나라의 중장기병 이야기는 사실 무근입니다, 연환마라는건 너무나 둔중해진 중기병이 진형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자, 억지로 진형을 유지시키고자 한 것이었지, 결사의 각오를 다지고 이런건 아닙니다;
3991 2015-03-21 21:45:03 11/9
윤관의 여진정벌이 귀주대첩이상가는 업적일수도 있다네요(펌) [새창]
2015/03/21 20:55:40
일단 고려와 금나라의 관계는 여진 정벌과는 무관합니다, 당장 눈 앞에 요와 송이라는 굴지의 강대국들이 우글거리는데, 고려에 신경을 쓸 여력은 없었지요,

그리고 보주의 반환은 그 보다 앞서 고려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갔다는 사실을 살펴봐야 합니다, 즉 고려의 반환 요구에 있어 시쳇말로 가져가 보던가 라는 말을 던질정도로 여유 있던 것을 생각해보면 일종의 댓가성 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입니다,

애시당초 9성을 돌려준것이 1109년이고 금이 건국된 시기가 1115년입니다, 불과 10년도 안되는 시기에 나라를 세울 만큼 국력을 모았다고 보기는 어렵지요, 이미 성장할대로 성장하여 무르익어가던 시기에 도리어 내부의 단합을 도와줬다고 보여질정도로 여진 정벌은 어떻게 본다면 고려에 큰 이득이 전무한 상황입니다,

두서 없는 답글이었는데 예컨데 여진 정벌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도리어 무리한 원정으로 국력을 갉아먹을데로 갉아먹어 나라의 위기를 자초한 상황이었지요.
3990 2015-03-21 19:12:37 0
[새창]
음식을 찾기 위해 세계를 정복했다는 말은 사실 영국 음식의 참담함을 가지고 하는 본문에 언급하신바와 같이 우스갯 소리일뿐입니다, 딱히 국가적으로 국가의 식문화의 개선을 위하여 어떠한 노력을 한 적은 없습니다.
3989 2015-03-20 23:03:55 0
훌륭한 조상님을 둔 어떤 가문. [새창]
2015/03/20 22:19:13
여담이지만 원래는 다수의 문인을 배출하기로 유명했던 덕수이씨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덕분에 능성구씨, 인동장씨, 전주이씨, 전의이씨 등과 더불어 다수의 무인을 배출하기로 유명한 경화 세족으로 자리 잡았지요, 숫자로 버자면 전주 이씨, 전의 이씨 다음이니 유명하신 조상님 덕이 대단했음을 알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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