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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2 08:4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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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일어나 보니 필력이 좋지는 못한 상황에서 상태가 안 좋은 상황에 단 답글이 엉망이라 수정과 첨언을 할겸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고려와 금나라의 관계는 일견 여진 정벌이 영향을 주었다 볼수 있으나, 어디까지나 지정학적 요건에 따라 거란 즉 요나라와 송나라를 앞에 둔 금나라 로서는 고려에 신경을 쓸 여력이 부족했던게 사실입니다.
이 것은 본문에 언급한 보주의 문제에서 입증되는데 1032년 거란 즉 요나라는 보주를 점령하고 그 곳에 성을 증축하는데 이는 고려로서는 큰 위협이라, 여러 차례 돌려줄 것을 청원하나 당연히 요지를 내달라는 요청을 들어줄리는 없었지요.
그러한 와중에 금나라와의 전쟁이 벌어지며 보주를 향해 전선이 임박해오자 거란은 보주를 고려에게 돌려준다는 통보를 하고는 도주합니다, 사실상 금나라의 영토나 다를바 없는게 사실이나 고려는 시쳇 말로 빈집 털이를 하며 보주 성 2개를 얻어냈고 이후 1126년 부터 1130년까지 지리한 외교전이 벌어지나 포기한 건지 뒤에는 언급되지 않게 되는데, 이는 고려의 국력이 강대했다기 보다는 말 그대로 요나라와의 전쟁에 있어 전선을 증가시킬 이유를 찾지 못한 것에 가깝습니다,
고려로서도 요나라 혹은 금나라와의 전쟁이나 외교전으로 득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양국의 대치 국면에 있어 우연찮게 득한 것이라 고려의 국력을 이야기 하기는 좀 그렇지요.
두번째로 9성을 돌려준것이 1109년이고 금이 건국된 시기가 1115년입니다, 불과 10년도 안되는 시기에 여진이 어떠한 국력을 급성장시켜 국가를 건국했다 보기는 어렵습니다, 사실 여진 정벌 자체가 이미 비대할정도로 급 성장한 완안부의 세력에 놀란 여진인들이 귀부를 신청하며 벌어진 일인데, 이 과정에서 고려의 대응은 후대의 제 시각이나마 일견 참으로 아쉽기 그지 없는 부분이 많습니다,
물론 긍정적인 측면도 찾아볼수야 있겠으나 고려를 상국으로 인정하고 서로간의 관계 개선에 앞장선 이들을 공격하다 패퇴하여 굴욕적인 강화 조약을 맺고, 그 것을 원통하게 여겨 신께 맹세까지 할 정도로 이를 갈며 시작한 이후의 원정에서 친 고려에 가까웠던 지금의 함경도 일대의 여진 추장을 몰살하는 등, 관계 개선이나 유지에 손을 놓은듯한 모습은 어디까지를 좋게 봐야 할지 의문이지요.
거기다 당장 고려사 등의 기록을 보면 문 무 산관이서로부터 장사하는 사람, 종 및 주 부 군 현에 이르기까지 모든 말을 가진 자를 신기(神騎)로 삼는 한편 나이 20 이상의 남자로 과거 응시자가 아니며 말 없는 자를 신보(神步)로 삼고 승도 즉 스님들을 데려다 항마군(降魔軍)으로 삼아 병력을 충원하는 한편 이 외에 궁병이나 노병 등을 끌어다 넣기도 했던 것에서 볼수 있듯이 총 동원령을 내리고 온 나라의 국력을 끌어모아 전쟁을 벌였고 동원된 정규군만 고려 총 병력의 1/4, 여기에 수반 되는 군호와 물자를 밀어 넣었지만 당장 고려가 얻은게 뭐가 있을까요,
비옥한 토지도 명분도, 그 무엇도 남지 않은게 여진 정벌의 뒷모습입니다, 도리어 이러한 무리한 원정과 이주 실패으로 국가의 생산성 등 국력에 타격을 안겨주지 않았을지 여진의 단합에 큰 명분와 이해 관계를 제공하지는 않았을까 싶을 따름이지요.
그리고 몇가지 잘못된 부분이 있는데, 가령 연환마라는건 금나라의 중기병은 다른 중기병이 1이라 할때 3~4까지 중갑을 덧대었다 봐도 좋을 정도로 준둥한 이들이라 진형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자, 억지로 진형을 유지시키고자 한 것이었지, 결사의 각오를 다지고 이런건 아닙니다,
고려의 기동력을 이야기 하신 부분도 우야소 즉 오야속은 사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사냥을 하고 있었고, 여진인들이 당시에 물론 이후로도 그렇습니다만 모두가 하나된 어떠한 단합된 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 는 것과 통신 수단의 한계점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고려가 본격적인 침공을 한 시기가 12월 중순이고 오야속이 완안부로 돌아가 부족회의를 연 시기가 12월 말이라는 것에서 볼수 있지만 빈집 털이를 들어간거라 봐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