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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14 22:4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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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이지만 이 대회는 이렇다 할 통일된 이름이 없었지요, 우리야 1차 원동 민족 대회 혹은 1차 극동 민족 대회, 극동 인민 대회 내지는 제1차 극동 피압박 인민 대회 등으로 불렀습니다만 개최국?인 소련은 극동 민족 대회, 제1회 극동 공산 주의 단체 및 혁명 단체 대회 등으로 불렀습니다,
이 극동 민족 대회 음 뭐라 불리든 아무튼 이 대회에는 조선 노동 대회, 고려 공산 청년회 상해회, 신한 청년당, 화동 한국 학생 연합회, 고려 혁명군, 조선 기독교 연맹, 고려 공산당, 이팔 구락부 등의 단체에서 56명의 한인 대표가 참가하여 결의권을 가진 국가 가운데 가장 많은 인원을 파견한바 있습니다,
이렇게 당시 중국이나 일본 등 보다도 압도적인 인원을 파견한 까닭은 이 당시의 국제 관계 때문인데, 미국을 일본과 다를바 없는 제국 주의 국가로 인식하여, 사실상 우리를 도와줄 유일 무이한 동지는 오로지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임시 정부와 각 단체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앞서 열린 태평양 회의에서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하고, 애시당초 예견 된 바 처럼 1차 세계 대전 전승국들의 이해 관계와 우호 관계, 네 아직까지 일본과 미국은 손을 잡고 있었고, 임시 정부는 그 노력에 비하여 참담한 실적으로 거둔 덕분인데, 여러모로 생각해볼 거리가 많은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