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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3 2015-04-25 21:47:45 1
일제시대 의무교육? [새창]
2015/04/25 18:16:10
음 그렇군요, 제가 인터넷 자료로, 오프라인은 지금은 좀 힘든터라 일단 인터넷 자료로 찾아본 바로는 아래와 같습니다.

https://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1170
4122 2015-04-25 21:16:24 1
일제시대 의무교육? [새창]
2015/04/25 18:16:10
첨언을 하나 해보자면 제4차 조선교육령에 의무 교육에 해당되는 내용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4차 조선교육령은 이전의 그 것을 그러니까 교육에 대한 차별 철폐니 뭐니 하던 것을 철저하게 전시 체제로 돌려 놓는 것에 주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의무 교육은 따로 조선교육령으로 공표된 것이 아니라 3차 조선교육령때 나온 이러한 교육에 대한 차별 철폐에 따른 이야기로 그 것도 소학교 그러니까 국민학교에 국한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4121 2015-04-25 11:04:27 0
태평양 전쟁 개전직전 일본 제국의 경제상황을 아시는분 계시나요? [새창]
2015/04/24 01:45:08
뒤늦게 첨언을 하나 더 하자면 일본과 미국이 전쟁을 벌인 배경에는 상호간의 자산 압류와 미국측의 대 일본 자원 수출 금지등 상호간의 경제 제제가 수반되었습니다, 무슨 말 인가 하면 돈이 있어도 못사는 상황이라는 것이지요; 일본은 중일 전쟁을 통하여 이미 석유, 철강등 필수적인 자원을 대부분 소모해 버린 것은 둘째치고 말입니다.
4120 2015-04-24 19:07:52 1
태평양 전쟁 개전직전 일본 제국의 경제상황을 아시는분 계시나요? [새창]
2015/04/24 01:45:08
마크 해리슨의 2차 세계 대전의 경제the Economic of world war 2에서 인용하자면 38년 기준으로 GDP를 보면 1,690억 달러로 추축국 세 나라중 가운데에 속합니다, 이 때 미국은 8,000억 달러를 찍었지요, 자원 생산량을 놓고 보더라도 십 수배는 족히 차이가 나던게 사실이고 말입니다.
4119 2015-04-24 18:20:55 1
아래 노몬한 관련 이야기를 보고 글을 적습니다, [새창]
2015/04/23 22:49:45
1. 독일의 기술력 문제는 후대에 각색된 바가 큽니다, 미국 역시 수없는 희생을 거친 뒤에야 전술을 패러다임을 정립할 수 있었고, 소련의 경우는 랜드리스로 일어났다고 봐야 합니다, 문제는 일본 제국군 그 들이 가지고 있던 교리 그 자체이지, 무능한 인재를 이야기 할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당장 자원도 무엇도 부족한 판국에 더욱이 언급하신 기술력 문제까지 겹친 상황에서 제병 합동 편제를 완편할수 있을리가 없지요,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만 그 들의 시쳇말로 형편을 생각한다면 그 들이 정립한 교리 그 자체는 문제가 없습니다, 타 병과와의 공조와 보다 원활한 지휘 통제를 위한 통신 수단의 구비와 지원 화력과 백병전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할수 있는 야간전의 강조, 그리고 각 지휘관들의 이를테면 임무형 지휘 체계를 기본 조건을 깔고 들어간다는게 잘못된 문제는 아니지요.

그 들도 분명하게 충분한 화력을 정신력을 뒷받침하는 요소로 삼았습니다만 현실은 달랐다는 것입니다.

2. 육군이 항공 모함과 수송선을 운용하기 시작한 것은 남방 작전 이후 하루 한척 수준으로 수송선이 격침당하여 출항을 꺼리게 된 해군 덕분에 보급을 이행할수 없게 된 배경이 존재합니다, 단순히 해군이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말이지요, 또한 야소로쿠 제독이 암살을 피해 해군 대장직에 머무른 이야기는 루머이지 확인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미드웨이 해전과 필리핀 해전 등 여러 해전에서 정보 취득이나 전파가 늦은것도 육군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늦은겁니다, 이건 뭐 누굴 탓할 문제가 아닌게 기밀 보호가 취약한 점이나 정찰이 불가능해진 상황 등이 핵심인데 이걸 왜 육군의 탓으로 돌려야 할까요?

3. 만소 국경 분쟁 처리요강은 장고봉/하산 전투 이후에 만들어 진 것으로 관동군이 전투를 벌이는 그 자체는 문제가 없습니다, 당장 여지껏 수 없는 전투를 벌여온 것은 물론이거니와 관동군이 전력 증강 요청을 할때 왜 별말 없이 38년에 창설된 신규 사단을 배비 시켜줄까요? 그 이전에 37년에 5개 밖에 없던 사단이 왜 같은 해 10여개로 늘어날까요? 점차 가용 전력을 늘려나갔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관동군의 임무는 단순하게 방어에 치우친게 아니라는 것이고 결국 대본영이 생각하는 바도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당장 우에다 겐기치가 예비역으로 편입된 것을 말씀하시는데, 이건 패전의 책임이지 전투를 발생 시킨 문제의 책임이 아닙니다.; 대본영에서 연락 장교를 보낸 것도 전투의 뒷 마무리를 위하여 외교 회담이 진행중이라 전투를 멈추게 한 것에 불과하고 말이지요.

4. 일단 중국이라는 것은 좀 애매한게 당시의 중국은 통일된 국가가 아닙니다, 말 그대로 각지의 군벌이 알아서 자생하는 상황이고, 장개석이나 모택동은 그러한 군벌들 중 하나에 불과했고 가장 큰 세력을 다투는 이들 일뿐입니다, 즉 이 들이 전체를 말하는건 좀 아닌 것 같네요.

그리고 일본이 전장 정리에 실패했다는 것 중 대표적인게 난징 대학살입니다, 뭐 이 것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서도 세력을 일소한다는 명분하에 무분별한 참극을 일삼아 대다수의 공분을 샀고 결과적으로 항일 세력에 큰 힘을 실어주게 만들었지요.

5. 러일 전쟁을 이야기 하시는데, 지금 말하는건 러시아가 지고 일본이 이긴다는 말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알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으로 내륙으로 끌고 들어가봐야 어디로 가겠습니까? 전투에서는 이길지 모르겠습니다만 제해권과 제공권이 무너진 상황에서 보급선 마저 위태로운 현실속에 무엇을 어떻게 할수 있을런지요, 아 물론 이렇게 전쟁을 지연시킨 덕분에 결국 큰 피해 없이라고 하기는 뭐하고 어느 한쪽이 승자로 남지 않고 끝난 것도 맞습니다만 영국의 지원이 있었다고는 하나 제대로 보급도 못받는 상황속에 이 이상 적 들을 내륙으로 끌고 들어갈 전력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6. 일본 제국의 입장에서 합리적인 선택지는 아닙니다, 생각해보지요, 십 수년을 걸쳐 국력을 파탄의 지경까지 몰고 가며 얻어낸 귀중한 자원들을 모두 포기하라는게 합리적인 선택지 입니까? 당장 끊어놓은 자원 재 수급은 이야기도 하지 않는데 무엇을 믿고 사인을 해야할까요? 당장 손발 끊어놓고 우리 말을 들으라는 것과 다를바 없는 조항은 어떻습니까? 압류된 자산의 해제는 어디에 있는지요?

이건 말씀하신대로 대화가 통하지 않고 요구조건을 아예 맞추지 못하는 상황 그 자체입니다; 또한 헐 노트나 외교적 마찰에 미국의 일방적인 문제가 있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분명 일본의 문제도 존재하나 이건 뭐 생각해보면 답이 없는 상황이 맞지요, 물론 엄밀하게 말하여 앞서 언급드린바 대로 교적, 국익적인 시각차와 동시에 넘을수 없는 타협을 가로막는 벽이 문제이기는 했습니다.

또한 진주만 공습에 대하여 선전 포고를 했습니다, 안한건 아닙니다,

그 내역을 본다면 원래 대로라면 헐 노트를 거부한다는 답변을 선전 포고와 함께 작전 개시 1시간 반에 전달하기로 했는데, 해군이 적극적으로 항의하여 20분 전 그러니까 진주만 시각으로 7시 20분, 워싱턴 시각으로 오후 1시로 앞당겨 졌지요,

그런데 문제는 주미 대사관에서 13개의 전문을 겨우 해독을 하고 보고를 하러 서기관 실에 가보니 담당자들은 주말이라고 전원 칼퇴근 해버리는 바람에 타이핑도 못하고 그대로 책상위에 던져졌습니다,

결국 다음 날인 일요일 아침 주재 무관의 보좌관이 우연히 출근길에 우편함에서 14번째 전문이 실린 전보를 발견하여 전파해 준 덕분에 모든 대사관 직원들이 달려들어 마지막 14번째 전문을 해독하기 시작했습니다만 원칙상 이걸 타자 칠수 있는건 외교관 뿐인데, 타자를 칠줄 아는 건 오쿠무라 1등 서기관 한명뿐이라 당연히 14개의 전문을 혼자 치려니 오타는 기본이요, 시간은 늦어지고 있었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전문에서는 시간 엄수 잘 하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노무라 대사는 왜 1시인지 정말 순수하게 이해를 하지 못해서, 2시로 약속을 미뤘습니다.

그렇다고 미국이 이걸 몰랐나 하면 일본이 14번째 전문을 받아들기 전에 이미 통신을 가로채어 모든걸 알고 있었고 당일인 일요일 오전 6시 반 무렵에 출근한 마셜 대장에 의하여 극동 지역 육군 사령부, 카리브 해 육군 사령부, 하와이 육군 사령부, 제 4군 사령부, 아시아 함대, 태평양 함대 등에 경계 태세 강화를 지시하는 통신을 보냈습니다만 문제는 하필 이때 이 순간 워싱턴 상공에서 강력한 정전기 현상이 발생, 장거리 통신이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 때문에 민간 통신 회사를 경유하여 암호화된 전문을 발송했는데, 문제는 이 걸 지급 표시 없이 보내서 다른 일반 전보들과 섞여 버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한참을 빙글빙글 돌다가 군 기지에서 수 없는 엄격하고 까다로운 검문을 거쳐 도착한 시각이 하와이 육군 사령부에서는 진주만 기습으로부터 6시간이 지난 후였고, 태평양 함대는 8시간 후였습니다.

7. 자꾸 감정적인 측면에서 이야기를 끌어내시는 부분이 존재합니다, 아 물론 공감하지 못하거나 안하는건 아닙니다만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일본군이 막장이 아니라는게 아닙니다, 일본군이 전쟁 범죄와 무관하다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요,

그러한 부분을 떠나 일본군이 내재한 문제를 할힌골, 노몬한을 들어 이야기 하는 것에 가깝지요.
4118 2015-04-24 13:58:19 1
아래 노몬한 관련 이야기를 보고 글을 적습니다, [새창]
2015/04/23 22:49:45
기동의 핵심이 보병과 전차 라는 것은 제병 합동 전술이 주요한 전술로서 교리에 상정되었을때 해당되는 것이지 소부대 중심의 그 것도 보병이 근간이 되는 일본 제국군에는 별반 해당 사항이 되지 못합니다, 물론 지원 화력을 경시한 것은 아닙니다만 끊임없는 정신력 강조에서 볼수 있듯 물질적 결핍은 상당한 수준이라 전차나 지원 화력의 발전이 지체되었고 기술력과 자원의 부족이 질적인 문제를 야기 한바 있습니다,

전력 집중이라는게 뭔가 대단한게 아닙니다, 육군과 해군의 갈등은 사실이나 이 것을 계기로 전선에 대한 전력 집중이 그 들의 가용 전력 내에서 이루어지지 못한 것도 아니고 합리적 판단의 부재가 상시적인 것도 아닙니다, 그 들의 현실에 따른 합리적인 판단 아래에 교리를 상정했고, 이상적인 결론에 비하여 여러 현실적인 문제로 뒷받침 되지 못하여 참담한 결과를 낳은 것 뿐이지요.

그리고 관동군의 임무는 소련군의 적대 행동으로부터 만주국을 보호하고 주 병력을 중국 전선에 투입시키지 않는 것이었고 노몬한 전투는 이 범주안에 들어가는 행동이었습니다, 대본영의 뜻을 위반한건 엄밀하게 아니라고 말할수 있겠지요.

다음으로 중일전쟁을 이야기 하자면 장개석의 역량이 뛰어나다기 보다는 방법이 없던게 사실이지요, 중일전쟁의 결과물은 장개석의 예상 외로 강력했던 통제력과 모택동의 민중 장악력, 도저히 통제 되지 않았던 하위 제대의 국지전에 대한 집착으로 말미암아 앞당겨진 공세 종말점, 여기에 여러 노력과 기타 지원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손을 잡고 일어선 군벌이 없었다 정도가 혼합된 거라 볼수 있겠습니다.

러일전쟁을 이야기 하신바 있는데 누가 이길지는 장담하기 어려운게 사실입니다, 당장 시베리아 일대의 배비된 러시아 군은 전면전을 벌일 상황도 아니었고, 수송 능력의 미비로 보급이나 지원 전력의 도착은 상정하기 어려우기까지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단 일본의 열악함 만을 강조할 필요성은 없어보이네요;

끝으로 언급하신 합리적인 선택지 라는 것은 역사의 결과와 과정을 파악한 작금의 시각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당시의 상황에서는 어떠한 것이 합리적이고 또한 일본 제국의 시각으로 국익을 대변할지는 답변하기 어려운게 사실이 아닐까 합니다, 헐노트에 관하여 협의는 더이상 불가능했던게 사실이고, 배경이야 어떻든 미국이 대화를 뒤엎은게 사실입니다,

9개월 간의 외교전 결과 얻어낸 공감대나 기초 원칙, 심지어는 20여년 간의 모든 변화 그 모든걸 뒤엎는 내용을 두고 어떤 것을 이야기 해야할까요? 물론 일본측의 요구도 난폭하기 그지 없던 것은 사실이나 일본이 요구해 왔던 석유 수출입의 재개나 필리핀으로의 지원 중단등 어떠한 요구도 이야기 되지 못하였습니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말 그대로 미국의 국익과 시각을 강요한게 헐 노트였지요.
4117 2015-04-24 09:16:4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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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3 22:49:45
므겡만세님 사실 동인도 제도를 비릇한 자원의 수급은 일본의 자립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였습니다, 실제로 주인없는 땅이나 다를바 없었고 말이지요, 문제는 이 당시 외교적 마찰로 분위기가 심각하게 안좋았고 또한 시각차가 달랐던게 미국이라는 거였지만 말입니다.

역둔토 님.. 일단 이 당시 소련과의 국경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전담한 이 들이나 아니 에드워드 J. 드레어의 연구 결과만 놓고 보더라도 관동군의 단독 작전이라고 봐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4116 2015-04-24 09:14:1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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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3 22:49:45
일본을 그저 미쳤다 라고 보기는 어려운게 미국과 일본 양국이 바라보는 외교적, 국익적인 시각차와 동시에 넘을수 없는 타협을 가로막는 벽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었던게 사실이며 영국은 아프리카에서 발이 묶여 있고, 네덜란드는 사라진지 오래라 동인도 제도 일대는 주인없는 땅이나 다를바 없었으며, 소련과의 조약으로 만주 일대의 후방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기에 일견 적기로 보일수 있었던게 사실입니다.

그러하기에 전쟁을 벌인 것이지, 독일이 잘나가니까 따라가자는게 아닙니다, 그 들로서는 어쨌든 이러한 상황에서 전쟁을 피할수 없는 현실에서 얼마나 전쟁 지속능력을 갖출수 있는가를 파악하고자 한 것이지, 일본과 미국의 전쟁은 무리라는 것을 알고자 한게 아니라고 봐야할 문제이겠지요,.
4115 2015-04-24 09:10:3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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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3 22:49:45
jpmc3 님.. 일단 언급드렸습니다만 보급이나 기동이라는 측면에서 특히나 그 들이 중시한 소부대라는 부분에 있어 일본군은 크게 부족하다 보기는 좀 어렵습니다, 당장 할힌골에서 이러한 전술은 큰 성과를 거둔바 문제는 포병의 엄호를 받는 소련군 진지에 대한 돌파력이 부족했다는 것으로, 앞서 벌어진 일련의 대대급 화력 투사의 양적 우위에서 크게 밀린 것에서 볼수 있듯이, 문제는 사실상 지원 화력들과 그 들이 상정한 잘못된 정보에 기반을 둔 상황들이었습니다.

예컨데 부대의 기동성, 주도권, 전력 집중, 야습, 야간 행군, 보병과 포병의 밀접한 공조가 조화롭게 이루어 져야 하는 상황에서 주도권과 포병과의 공조 가 어긋나고 전력 집중이라는 측면에서 크게 밀릴수 밖에 없게된 것이 문제라고 할수 있겠지요.

중일 전쟁의 경우 제가 아는 바와 다른데 미국은 만주국을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일련의 국익을 포기하는 내용에 있어 만주를 포함했다 판단시킬 여지가 존재하는 구문을 넣었었지요.

그리고 중국의 군벌들과의 전투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그 들이 지연전이나 유격전을 선호했다는 것이 아니라 전방의 지휘관들이 임의로 전선을 넒혀나가 전선 정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덕분에 공세 종말점에 도달하도록 여전히 내부 청소를 끝마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사실 중국의 군벌들 국민당을 비릇한 반 일에 몰려있던 이 들이 할수 있는게 소모전, 지연전밖에 없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 들이 무엇을 가지고 전면전을 벌이겠습니까;

또한 헐 노트를 잘못 이해하신 것 같은데, 헐 국무장관은 만주국을 승인한바 없습니다, 헐노트의 3,4,5번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어디에도 만주를 제외시킨다는 말이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4114 2015-04-24 00:35:1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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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3 22:49:45
그리고 일본군이 가장 중시한 것중 하나가 교리의 핵심인 야간전에서 볼수 있듯이 기동성입니다, 당연히 보급도 마찬가지 이나 보급을 비릇한 그 모든 작업이 지휘관에게 일임되었고 교리를 본다면 소부대 중심인 상황에서 이러한 군수 지원을 담당할 인력의 보충보다 지휘관의 지도력이 우선시 된건 현실직인 측면을 떠나 좀 문제가 있지요.

이러니 저러니 해도 유형적 가치를 무형적 가치로 치환한다는건 말도 안되는 일인건 사실이고 요구 된 바에 미달되는 상황에 있어 문제를 야기할 뿐이지요.

아 물론 언급하신 이오지마와 같이 요구 된 바중 하나인 지휘관의 판단 존중과 같은 부분이 긍정적인 경우도 종종 있기는하지만 말입니다.
4113 2015-04-24 00:27:2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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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3 22:49:45
다음으로 미국 과의 전쟁은 말 그대로 국가의 미래를 걸고 벌인 전쟁입니다, 아 물론 언제나 그랬듯 부족한 정보가 빚어낸 오판과 이해 할수 없는 아집이 동반된건 사실입니다만 거의 모든 자원이 차단당한채 그 것을 무기 삼아 십 수년을 모진 고생 끝에 얻어낸 국력의 근간이자 미래의 발판이 될 모든 것을 포기할 것을 강요당한다면 물론 일본의 시각입니다만 그 것을 수긍할 수는 참 힘든 노릇이기는 합니다.
4112 2015-04-24 00:23:4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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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3 22:49:45
두서 없이 나마 답글을 달아드리자면 일단은 현실적인 측면에서 나름 합리적인 측면이 존재합니다, 문제는 그러한 합리성과 별개로 불리하게 돌아가는 현실인데 기술력과 자원, 인력 등의 측면에서 더 나아가 이미 판을 벌여놓은 상황인터라 시간적으로 사각 편제 등 편성의 개편이나 여타 장비의 개선은 상당히 무리한 측면이 존재하고 무엇보다 당대의 일본으로서는 어찌되었든 랜드리스를 등에 업은 버틸 여력이 부족한게 사실입니다.

이와 부차적으로 중일 전쟁은 대본영과 현장 지휘관의 시각차나 공세 종말점등의 문제가 존재합니다만 따지고 본다면 일단은 당시 분열된 중국이라는 상황 하에서의 전력차는 언급하신 자살 돌격이 권장되는 측면 마저 존재할정도로 매우 일본군에게 유리했던 것도 사실이지요;

또한 일본군이 무턱대고 자살 돌격을 권장한것은 아닙니다, 노몬한 전투만 보더라도 절대 다수의 대전차 전과는 대전차 포 등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에서 볼수 있듯이 지원화력은 그 질을 떠나 필수적으로 배비될것이 요구 되었고 또 쓰였습니다.

그 외의 조건이라면 최후의 선택으로 대전차 총검술이나 육탄 돌격이 쓰였지요, 비단 이 친구이 독립유공자가 지휘관으로 들어앉는 군대라고는 하나 비 상식적인 측면만 존재하는ㅌ건 아닙니다.
4111 2015-04-23 23:28:4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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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3 22:49:45
한량011님.. 방어전 와중에도 끊임없이 야간전을 포함한 기습을 감행하였던 것을 포함하여, 일본군의 교리에 있어 방어라는 것은 조금 의미가 다르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 당시의 일본 제국군, 관동군은 아직까지 소련에 대한 랜드리스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으로 본문의 말미에 수정하기는 했습니다만 관동군 사령부에서는 소모전을 포함한 접촉을 통하여 동아시아에 대한 소련의 확장 기세를 꺽을수 있다고 판단했었지요,

물론 그 이면에는 러일 전쟁을 포함한 교전으로 얻어진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만 현실은 조금 달랐지요, 아 물론 소련군도 아직까지 이 당시에는 미숙하기는 했었습니다만 최소한 일본 제국군이 알던 그 이전의 혹은 숙청이라는 이미지 아래의 소련군은 아니었지요.

무엇보다 소모전같은 문제를 떠나 제병 합동이 제대로 돌아가는 상대에 대한 부족한 지원 화력과 기갑 전력을 바탕으로 하는 보병 중심의 작전은 문제가 크지만 말입니다.;
4110 2015-04-23 23:13:4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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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3 22:49:45
한량011 님.. 일단 공세적 입장으로의 방어라는게 무슨 말 인가하면 이 노몬한, 할힌골을 사례로 보자면 참호를 파고 버틴 것은 차후에 있을 반격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생각하고 판단을 내릴수 있었던 상황 하에서 가장 최적의 행동이기는 했습니다만...문제는 역시 현실은 랜드리스라는 갑질과 숙청의 텃밭에서 무르 익은 소련군이었지요.

피터제길슨 님.. 아이러니 한것이 포병과 전차의 부족은 재원과 자원등의 문제였습니다만 정작 공군은 꾸준히 투자를 했었다는 것이지요, 나름 그 것을 이해를 못할 것은 아니지만서도 참 얼마나 더 댓가를 치뤄야 생각을 고치려나 싶기도 합니다.
4109 2015-04-23 23:04:5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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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3 22:49:45
사실 츠지 마사노부가 창시자인 것은 아닙니다,; 앞서 중일 전선에서는 중국의 공산당, 국민당 여타 수 없는 이 들이 옥상에서 골목에서 평야와 숲, 산악 거의 모든 전역에서 일본 제국군의 전차와 장갑차량등에 육탄 돌격을 감행해야 했었지요, 뭐 생각해보면 확실히 일본 제국군이 임팩트가 있는데다 누가 창시자라 보기도 애매하기는 하네요;

노몬한, 그러니까 할힌골은 그나마 사정이 낫은게 최소한 여기에서는 보병 지원이 없는 전차의 투입이 존재했고, 대전차포가 그럭저럭 원활하게 돌아가기는 했었지요, 문제는 이제 언급하신데로 독립 유공자와 같은 군 지휘관과 열악한 현실, 편견이 가득한 일본 제국군이라는게 문제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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