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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4 18: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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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일의 기술력 문제는 후대에 각색된 바가 큽니다, 미국 역시 수없는 희생을 거친 뒤에야 전술을 패러다임을 정립할 수 있었고, 소련의 경우는 랜드리스로 일어났다고 봐야 합니다, 문제는 일본 제국군 그 들이 가지고 있던 교리 그 자체이지, 무능한 인재를 이야기 할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당장 자원도 무엇도 부족한 판국에 더욱이 언급하신 기술력 문제까지 겹친 상황에서 제병 합동 편제를 완편할수 있을리가 없지요,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만 그 들의 시쳇말로 형편을 생각한다면 그 들이 정립한 교리 그 자체는 문제가 없습니다, 타 병과와의 공조와 보다 원활한 지휘 통제를 위한 통신 수단의 구비와 지원 화력과 백병전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할수 있는 야간전의 강조, 그리고 각 지휘관들의 이를테면 임무형 지휘 체계를 기본 조건을 깔고 들어간다는게 잘못된 문제는 아니지요.
그 들도 분명하게 충분한 화력을 정신력을 뒷받침하는 요소로 삼았습니다만 현실은 달랐다는 것입니다.
2. 육군이 항공 모함과 수송선을 운용하기 시작한 것은 남방 작전 이후 하루 한척 수준으로 수송선이 격침당하여 출항을 꺼리게 된 해군 덕분에 보급을 이행할수 없게 된 배경이 존재합니다, 단순히 해군이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말이지요, 또한 야소로쿠 제독이 암살을 피해 해군 대장직에 머무른 이야기는 루머이지 확인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미드웨이 해전과 필리핀 해전 등 여러 해전에서 정보 취득이나 전파가 늦은것도 육군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늦은겁니다, 이건 뭐 누굴 탓할 문제가 아닌게 기밀 보호가 취약한 점이나 정찰이 불가능해진 상황 등이 핵심인데 이걸 왜 육군의 탓으로 돌려야 할까요?
3. 만소 국경 분쟁 처리요강은 장고봉/하산 전투 이후에 만들어 진 것으로 관동군이 전투를 벌이는 그 자체는 문제가 없습니다, 당장 여지껏 수 없는 전투를 벌여온 것은 물론이거니와 관동군이 전력 증강 요청을 할때 왜 별말 없이 38년에 창설된 신규 사단을 배비 시켜줄까요? 그 이전에 37년에 5개 밖에 없던 사단이 왜 같은 해 10여개로 늘어날까요? 점차 가용 전력을 늘려나갔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관동군의 임무는 단순하게 방어에 치우친게 아니라는 것이고 결국 대본영이 생각하는 바도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당장 우에다 겐기치가 예비역으로 편입된 것을 말씀하시는데, 이건 패전의 책임이지 전투를 발생 시킨 문제의 책임이 아닙니다.; 대본영에서 연락 장교를 보낸 것도 전투의 뒷 마무리를 위하여 외교 회담이 진행중이라 전투를 멈추게 한 것에 불과하고 말이지요.
4. 일단 중국이라는 것은 좀 애매한게 당시의 중국은 통일된 국가가 아닙니다, 말 그대로 각지의 군벌이 알아서 자생하는 상황이고, 장개석이나 모택동은 그러한 군벌들 중 하나에 불과했고 가장 큰 세력을 다투는 이들 일뿐입니다, 즉 이 들이 전체를 말하는건 좀 아닌 것 같네요.
그리고 일본이 전장 정리에 실패했다는 것 중 대표적인게 난징 대학살입니다, 뭐 이 것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서도 세력을 일소한다는 명분하에 무분별한 참극을 일삼아 대다수의 공분을 샀고 결과적으로 항일 세력에 큰 힘을 실어주게 만들었지요.
5. 러일 전쟁을 이야기 하시는데, 지금 말하는건 러시아가 지고 일본이 이긴다는 말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알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으로 내륙으로 끌고 들어가봐야 어디로 가겠습니까? 전투에서는 이길지 모르겠습니다만 제해권과 제공권이 무너진 상황에서 보급선 마저 위태로운 현실속에 무엇을 어떻게 할수 있을런지요, 아 물론 이렇게 전쟁을 지연시킨 덕분에 결국 큰 피해 없이라고 하기는 뭐하고 어느 한쪽이 승자로 남지 않고 끝난 것도 맞습니다만 영국의 지원이 있었다고는 하나 제대로 보급도 못받는 상황속에 이 이상 적 들을 내륙으로 끌고 들어갈 전력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6. 일본 제국의 입장에서 합리적인 선택지는 아닙니다, 생각해보지요, 십 수년을 걸쳐 국력을 파탄의 지경까지 몰고 가며 얻어낸 귀중한 자원들을 모두 포기하라는게 합리적인 선택지 입니까? 당장 끊어놓은 자원 재 수급은 이야기도 하지 않는데 무엇을 믿고 사인을 해야할까요? 당장 손발 끊어놓고 우리 말을 들으라는 것과 다를바 없는 조항은 어떻습니까? 압류된 자산의 해제는 어디에 있는지요?
이건 말씀하신대로 대화가 통하지 않고 요구조건을 아예 맞추지 못하는 상황 그 자체입니다; 또한 헐 노트나 외교적 마찰에 미국의 일방적인 문제가 있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분명 일본의 문제도 존재하나 이건 뭐 생각해보면 답이 없는 상황이 맞지요, 물론 엄밀하게 말하여 앞서 언급드린바 대로 교적, 국익적인 시각차와 동시에 넘을수 없는 타협을 가로막는 벽이 문제이기는 했습니다.
또한 진주만 공습에 대하여 선전 포고를 했습니다, 안한건 아닙니다,
그 내역을 본다면 원래 대로라면 헐 노트를 거부한다는 답변을 선전 포고와 함께 작전 개시 1시간 반에 전달하기로 했는데, 해군이 적극적으로 항의하여 20분 전 그러니까 진주만 시각으로 7시 20분, 워싱턴 시각으로 오후 1시로 앞당겨 졌지요,
그런데 문제는 주미 대사관에서 13개의 전문을 겨우 해독을 하고 보고를 하러 서기관 실에 가보니 담당자들은 주말이라고 전원 칼퇴근 해버리는 바람에 타이핑도 못하고 그대로 책상위에 던져졌습니다,
결국 다음 날인 일요일 아침 주재 무관의 보좌관이 우연히 출근길에 우편함에서 14번째 전문이 실린 전보를 발견하여 전파해 준 덕분에 모든 대사관 직원들이 달려들어 마지막 14번째 전문을 해독하기 시작했습니다만 원칙상 이걸 타자 칠수 있는건 외교관 뿐인데, 타자를 칠줄 아는 건 오쿠무라 1등 서기관 한명뿐이라 당연히 14개의 전문을 혼자 치려니 오타는 기본이요, 시간은 늦어지고 있었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전문에서는 시간 엄수 잘 하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노무라 대사는 왜 1시인지 정말 순수하게 이해를 하지 못해서, 2시로 약속을 미뤘습니다.
그렇다고 미국이 이걸 몰랐나 하면 일본이 14번째 전문을 받아들기 전에 이미 통신을 가로채어 모든걸 알고 있었고 당일인 일요일 오전 6시 반 무렵에 출근한 마셜 대장에 의하여 극동 지역 육군 사령부, 카리브 해 육군 사령부, 하와이 육군 사령부, 제 4군 사령부, 아시아 함대, 태평양 함대 등에 경계 태세 강화를 지시하는 통신을 보냈습니다만 문제는 하필 이때 이 순간 워싱턴 상공에서 강력한 정전기 현상이 발생, 장거리 통신이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 때문에 민간 통신 회사를 경유하여 암호화된 전문을 발송했는데, 문제는 이 걸 지급 표시 없이 보내서 다른 일반 전보들과 섞여 버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한참을 빙글빙글 돌다가 군 기지에서 수 없는 엄격하고 까다로운 검문을 거쳐 도착한 시각이 하와이 육군 사령부에서는 진주만 기습으로부터 6시간이 지난 후였고, 태평양 함대는 8시간 후였습니다.
7. 자꾸 감정적인 측면에서 이야기를 끌어내시는 부분이 존재합니다, 아 물론 공감하지 못하거나 안하는건 아닙니다만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일본군이 막장이 아니라는게 아닙니다, 일본군이 전쟁 범죄와 무관하다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요,
그러한 부분을 떠나 일본군이 내재한 문제를 할힌골, 노몬한을 들어 이야기 하는 것에 가깝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