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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3 2015-06-01 16:25:50 2
촉한 최후의 보루 검각.jpg [새창]
2015/05/31 23:09:19


4272 2015-06-01 16:25:13 2
촉한 최후의 보루 검각.jpg [새창]
2015/05/31 23:09:19


4271 2015-06-01 16:25:08 2
촉한 최후의 보루 검각.jpg [새창]
2015/05/31 23:09:19

참고로 검각 가는 길은 이렇다고 합니다.
4270 2015-06-01 16:23:44 3
촉한 최후의 보루 검각.jpg [새창]
2015/05/31 23:09:19

지금은 그래도 관광지로서 접근이 쉬워진 것이지 복원 초기는 이랬습니다; 정말 관광지가 아닌 원래의 모습을 상상하면 접근하기가 시쳇말로 토나올 것 같네요.
4269 2015-06-01 16:22:20 1
촉한 최후의 보루 검각.jpg [새창]
2015/05/31 23:09:19

복구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건지 원래 저런 것인지 좀 듬성드성한 감이 없지 않기는 합니다.
4268 2015-06-01 16:21:24 3
촉한 최후의 보루 검각.jpg [새창]
2015/05/31 23:09:19

푸른참치님이 윗 답글에서 올려주신 곳은 화산으로 본문에서 말하는 삼국지의 검각은 이 곳입니다, 사방이 절벽으로 가로 막혀 있어 길이 하나 뿐이지요.
4267 2015-06-01 16:13:08 1
대몽항쟁 1부 - 6. 이길 수 있다? [새창]
2015/05/31 19:57:11
일단 중간에 빠뜨린 부분이 있어 위에 추가했습니다, 그리고 해당 부분은 원 저작자의 블로그 와 문맥 등을 살펴본 결과 PGR21에서 잘못 표기된 것으로 확인되어 수정했습니다, 지적 감사드립니다.
4266 2015-05-31 23:48:09 4
징비록 고증실패 [새창]
2015/05/31 23:24:09
조선 시대에 왜군의 쾌속 진격을 도와준 중앙 고속 도로 아니 4로와 5로, 2개의 도로를 포함한 주요한 열 개의 도로가 존재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여기가 어디 로마도 아니고 참...그렇네요.
4265 2015-05-31 23:18:46 1
[새창]
그리고 40량 생산이 아니라 보낸 것이 40량으로 알고 있습니다, 실제 생산량은 2~3백량 정확히는 당장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일단 기록 상으로는 적지 않은 수였다고 기억합니다.
4264 2015-05-31 23:17:19 3
[새창]
첨언을 하자면 본문에 언급하신 변이중 화차는 당대에만 소량 생산되고 더 이상 생산되지 않게 되는데, 역시나 고금 진리를 통틀어 가장 큰 문제인 경제성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방호벽이 넒게 장착되는데다 총통기가 세개가 들어가니 그 물자로 화차 세대는 만들수 있습니다, 그 뿐일까요? 평시에 활용이 가능한 타 화차와 다르게 실생활에 활용이 불가능하여 유지 관리비만 까먹는 애물단지가 되버립니다, 거기에 운용인원이 증가합니다, 기존의 문종 화차의 경우 운용 인원은 2명입니다, 인력으로 운송하고 방포하고 하는 모든 것이 단 두명으로도 '일단은' 가능하다는 것인데, 변이중 화차의 경우는 내부에서 화포를 발사할 인원과 외부에서 각도를 조절하고 화포를 운송할 최소한 3~4명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즉 기존의 화차에 비하여 인원이 두배는 필요한것이지요,

거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화차는 화력 지원이 목적이지 전열에서 보병과 함께 움직이거나 단독으로 작전을 수행할 연유도 없고 능력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변이중 화차는 삼면에 화포를 두르는 등 기존의 화력 지원 체제에 있어 단적으로 부적절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연사력만 놓고 본다면 당시 화차중 가장 우월할지 모르나 문제는 화차는 혼자 움직이는게 아니지요, 때문에 활용이 가능한것은 최대 40문 1세트의 한 측면일뿐으로 화력의 낭비가 심각합니다,

이러한 경제적 또 운용에 있어 단점이 되는 부분은 이후의 모든 화차에도 적용이 됩니다, 그래서 이서, 허적, 박종경등 이후의 개량안들을 볼때 문종 화차와 같은 형태가 크게 변하지 않고 이후의 숙종때 개량된 포방패와 같은 소소한 부분만이 변해가며 조선말까지 그 형상이 유지된 것이지요.

그 외에는 페이퍼 플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4263 2015-05-31 19:58:33 4/17
시노자키 아이 노출 사진보면 솔직히 기분이 좀 많이 언짢네요. [새창]
2015/05/31 16:52:10


4262 2015-05-31 10:44:22 1
역게도 공지 건의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새창]
2015/05/30 09:29:25
전에 정립했던 자료정도면 충분할 것 같네요, 그때 내용상의 문제로 반려된 것도 아니고 운영팀장님의 문제로 묻힌거니 말입니다.
4261 2015-05-31 09:00:11 1
대몽항쟁 1부 - 2. 어긋난 시작 [새창]
2015/05/30 15:32:10
몽고의 뜻에 관하여는 이설이 많습니다만 아무래도 가장 많은 것은 비하의 의미가 존재한다는 것이겠지요, 다만 저는 본문의 글쓴이님의 생각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들의 주장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그러니까 중국어로 비하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데 가령 지금의 우리가 쓰는 몽고라는 발음이나 표기법 자체는 명나라 시기에 들어와 정립된 것으로, 조선 후기 이덕무의 저서 청장관전서를 보자면 몽고의 방언에 은을 몽고라 한다거나 나 명나라 여종옥의 언청을 보면 몽고는 그 국호가 은에서 왔다고 하던 말이 나오는 것에서 볼수 있듯이 은을 가리키는 만주어와 발음이 일치하며, 당대에는 비하의 의미로서 몽고를 쓴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즉 본디 몽골어로 은을 가르켰거나, 본디 여고족이라 가르켰던 이들이 스스로 몽골이라 하자, 이를 발음하기로는 뭉굴이라 하였는데, 은을 가르키는 뭉간과 발음이 유사하여 같은 단어 로 판단하다 명대의 정립된 발음을 따라 갔거나 둘 중 하나이겠지요.

결론적으로 몽고라는 뜻 자체는 만주어의 은, 혹은 몽고어의 은 과 같은 별다른 비하의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은 명사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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