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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88 2015-06-30 21:30:23 4
이순신 장군이 없었더라면... [새창]
2015/06/28 16:49:22
Langrisser 님..

1. 제승방략 체제가 무엇을 말하는 지 부터 생각을 해보시면 좋겠습니다, 해당 체제 내에서 이미 삼포 왜란을 비릇한 여러 왜구들의 동란에 대한 경험을 쌓아 빠른 대응을 한 조선군이 약체라고 볼 이유가 무엇입니까? 중앙 상비군을 자꾸 강조하시는데 그 당시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앙 상비군 체제가 현대의 그 것과 같이 완벽한 국가가 어디에 있으며, 조선의 중앙 상비군이 제승 방략 체제하에서 해당 지역에 미리 주둔하고 있어야 할 이유는 또 무엇입니까? 거기에 조선의 재정하에서 얼마나 더 군비를 지출해야 완벽한 군 체제라고 볼수 있습니까?

2. 이 부분은 위에서 다른 분이 반론을 해주셨습니다만 직산전투 이야기를 조금 해보자면 성공적인게 맞습니다, 당시 조선에게 가장 필요했던 시간을 벌어다 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일본군이 기존의 육로가 아닌 해로를 통한 보급에 더 매달리게 되었고 타이밍 정확하게 명량해전이 이어졌으니 말이지요.

그리고 조명 연합군에게 승패를 결정지을 힘이 없다 하시는데, 정유재란에 앞서 히데요시가 내린 주인장을 보시면 좋겠습니다, 전라도를 빠짐없이 공략하고 충청도는 가급적 공략하라고 되있는바 이는 앞서 벌어진 전략적 실패를 근간으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조선 봉행 이시다 마사요리는 군량 부족을 이유로 들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충청도와 전라도 평정을 서둘러야 한다고 한다고 보고서를 올렸고 이에 히데요시는 병력 재편과 함께 전라도를 제압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한편 강화 기간 중에도 공격 명령을 내렸지요.

이 말은 조선 수군과 별개로 앞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들의 전략적 실패와 더불어 육로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즉 조명 연합군이 전장의 승패를 결정 지을수 없다는 이야기는 틀린게 맞습니다.

3. 그러니까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누가 부정합니까? 지금 이야기 하는 것은 이순신 장군이 주가 된다는 이야기인데, 정작 앞서 설명드린바와 같이 직산 전투로 말미암아 해로로 눈을 돌린 사이에 명량 해전으로 그나마 끊기는 바람에 앞서 겪었던 전략적 실패를 반복했습니다, 이 말은 주가 이순신이라는 것이 아니고 어느 한쪽도 간과할수 없는 전력이라는 말이 되겠지요.

4. 답글에서 조선을 뛰어 넘고 바로 명나라로 갈거라고 이야기 했던가요? 아니 그 걸 떠나 왜구들의 동란으로 국가가 무너진다는 이야기는 대체 무엇을 근간으로 합니까? 그렇게 시달리고 시달려 해안가를 포기한 고려가 왜구들의 동란으로 국가가 무너졌던가요? 게릴라 전과 사략 전은 국가를 점령하고 통치하는 것과 별개의 전략입니다, 이 문제는 전혀 다른 이야기에요, 당장 임진 왜란의 경과만 보더라도 그 들이 겪어야 했던 전략적 실패는 너무나 자명한바, 그러한 실패를 중국의 명나라는 다를거라고 단언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명나라와 조선군은 약하다? 당장 직산 전투이후의 전세나 그 이전의 당시 일본의 생각은 전혀 다른데요?

5. 조선 수군 훈련 규정은 실제 사거리의 1/5~1/10을 최대 사거리로 잡고 있습니다, 달리 말해서 육군의 해안가 화력 지원은 애시당초 교리에도 없는 것이며 두번째로 그러한 화력지원이 뭔가 엄청난 효과를 가져올거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당장 해안가 일대에서 물러나 해당 지역을 봉쇄하고 이동 경로를 예측하고 정찰해 주요 지점과 보급 경로를 차단한다면 어디에서 보급을 받을 것이며 지원을 받을 것입니까?

그리고 히데요시의 재침략의 명령이 담겨있는 주인장을 본다면 이미 육로에서의 보급과 해당 지역에서의 징발 등 충분한 보급 계획과 더불어 앞서 겪었던 이러한 문제에 대한 전략적 실패를 반복하지 말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요?

일본군에 있어 수군을 통한 보급로가 문제가 된 것은 이러한 육지에서의 보급이 차단된 이후의 일이지 애시당초 수군의 보급로 하나에만 의존한게 아닙니다.
4587 2015-06-29 22:01:26 5
이순신 장군이 없었더라면... [새창]
2015/06/28 16:49:22
그리고 하단의 답글에 첨언을 해보자면 육지에서의 승전이나 전세를 배제한다면 일본군이 공세 종말점에 도달할 일이 없습니다, 간단한 논리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아무리 굉장한 승전을 거두었다 생각해봅시다, 그러한 이순신 장군의 근거지는 어디일까요? 당장 육지가 불바다가 되고 모든 조선의 영토가 침탈되는 와중에 이순신 장군의 병영만 무사할 일이 있습니까?

무엇보다 간과하시는 부분이 전라도 일대가 무사한 이유는 해로의 차단만이 아닙니다, 곽재우, 김덕령, 고경명, 권율, 김시민 등을 비릇한 민관군이 함께 들고 일어났기에 가능한 문제이지 무슨 전라도가 어디 고립된 외딴 섬과 같은 공간이기에 그러한게 아니지요, 이러한 분들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이순신 장군이 활동할 공간은 소멸한지 오래였을 겁니다,

물론 순망치한의 관계로 볼만한 터라 해로의 공백은 육지의 전력에 타격을 주었으리라는 것은 예상하기 쉬운 문제이고 말이지요.
4586 2015-06-29 21:53:01 6
이순신 장군이 없었더라면... [새창]
2015/06/28 16:49:22
1. 당시 동아시아 일대에서 병농일치가 아닌 국가가 과연 어떤 국가일까요? 또한 뭔가 착가하시는 부분이 당시에 국가 대 국가의 전면전을 상정한 바 없습니다, 삼포 왜란 당시 10여일 만에 3천 여명의 병력을 집결 시킨뒤 왜란을 종식 시킨 이래 왜란에 대한 대처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바 그러한 대처가 전력의 약화를 말한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지요.

2. 조선의 전략이 수성전이라는 것은 그 이전의 고려때도 그렇거니와 지형적 특색에 기인합니다, 귀주대첩을 사례로 드셨는데 과연 요나라 군대가 무엇때문에 약화되었고 무리한 기동을 감행했는지 생각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귀주 대첩은 단순한 야전으로 시작하여 끝난 전투가 아닙니다, 그 이면에는 청야 전술을 기반으로 하는 수성전이 존재하며 그러한 각 요충지를 피해 무리한 기동을 감행하다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압도적인 숫자로 공격한 것이지요,

즉 사례로 드신 귀주대첩은 도리어 지금 하고 계시는 주장에 반론을 던지는 셈입니다.

3. 지금 뭔가 답글을 잘 못 읽으신 것 같은데, 이순신 장군의 전과를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전과가 존재한 배후를 말하는 것으로 다소 다른 답변을 돌출 하셨는데, 맞습니다 원균이 제해권을 상실한 뒤에 이순신 장군이 다시금 그 것을 찾아올때까지 일본의 보급로는 어찌할수 없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러한 이순신 장군이 무너진 조선 수군을 다시금 일으켜 세울만한 토대는 아니 그 이전에 원균 이전에 제해권을 다지고 있을 토대는 그럼 어디에 있습니까?

뭔가 이상한 이야기 같지 않습니까? 생각해보세요, 그렇게 연전 연패에 어떻게 하질 못하는 조선군이라면 말입니다, 대체 수군 병영은 어떻게 합니까? 뭘 가지고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 나설수 있을까요?

4. 지금 하신 비유는 이라크 전쟁이나 아프가니스탄 전쟁 소련과 미국 둘 다 포함 한 것과 같습니다, 예시가 그렇기는 한데, 중일 전쟁이 어떻게 흘러가고 무너졌는지 전혀 생각을 안해보신 것 같습니다, 좀 지나친 표현일지 모르겠습니다만 면이 아닌 선과 점으로 이루어진 영역이 어떻게 고사해가고 빠르게 공세 종말점으로 치닫는지 너무나 여실하게 보여준 것이 중일 전쟁입니다,

이러한 중일 전쟁이 과연 임진왜란의 if 인 명나라 대 일본에서 일어나지 않을까요? 명나라 남부 일대는 수없는 왜구의 동란으로 인하여 조선에서 판옥선이 개발되는 등 발전을 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 들 역시 함선을 개발하고, 전략을 수정하는 등 빠른 대처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뭐 좋습니다, 그런 이들이 돌파 당한다고 생각해보지요, 그럼 그 다음은 어떻게 할까요? 보급로는 어떻할것이며 점령한 땅의 통치는 어떻게 합니까? 전혀 다른 문화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 들을 어떠한 반발도 무엇도 없이 완전한 정복을 이룰수 있을까요? 당시의 일본이? 당장 조선이라 하는 중국의 한 성보다 작은 땅에서 조차 벌어진 일들을 보면 이건 불가능한 문제일텐데 말입니다.
4585 2015-06-28 23:08:40 1
[새창]
저 같은 경우는 생각이 다른게 일단 그 이순신 장군을 무리하게 승진시키고 배비한게 선조인 것을 떠나 사실상 이순신 장군이 활약할수 있게 된 것은 전라도 일대의 전선이 고착화되고 유리하게 돌아간 까닭인바, 이러한 부분에 있어 선조의 배비나 그 치세를 무시할수 있을지는 의문이라서 말이지요.
4584 2015-06-28 22:53:40 2
[새창]
일단 임진왜란의 배비만 보면 그건 잘한건 맞습니다, 대소신료들 심지어는 백성들까지 모두가 왜? 라는 물음표를 달고 반대를 하며 납득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강행을 하였고, 인사를 승진시켰으며 전투에 대한 배비를 하였지요, 그런데 단지 그 것이 국가 대 국가라는 전면전을 상정할 이유도 무엇도 없었던 것 뿐이며, 제도의 헛점과 경험의 부재가 초기의 승패를 좌우했을뿐입니다, 이후의 경과를 보면 이러한 배비들이 결국 승리를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된바 이 것을 무능이라 볼수 있을지는 글쎄요, 저는 일단 아니라고 봅니다.
4583 2015-06-28 22:50:20 3
[새창]
이게 왜 그런가 보면 분명 영천과 청도 그리고 삼가,대구,성주,부산,동래,진주,안동 상주를 비릇하여 좌우 병영의 성곽을 수축하고 해자를 설치하였으며 이 들 지역에 군량과 물자를 비축함으로써 장기전을 대비하였습니다만 읍성이 너무 낮은데다 제대로 된 지휘를 받지 못한 상황에서 전투에 있어 숫적 열세에 처하였습니다.; 결국 어쩌지 못하고 시쳇말로 주르륵 털려나가게 된 것이지요.
4582 2015-06-28 22:47:36 3
[새창]
제승방략은 무너져 가던 조선 군에 대한 해답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간략히 적어보자면 기존의 진관에 속한 정병이 군역과 요역을 함께 지게되면서 온갖 폐단이 속출하자, 포를 내고 군역을 지지 않는 방군 수포로 진관 체제가 변질되면서 병력의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게 되었고 결국 왜구나 북방 야인들의 친입을 각 진관의 병력으로는 도저히 커버할수 없게 되어 조정에서는 전쟁이 일어날 경우 도내의 모든 병력이 모여 중앙의 장수의 지휘를 받아 적을 몰아낸다는 제승방략체제로 전환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문제는 임진왜란 초기에 경상도 일대의 읍성들이 중앙의 지휘관이 내려오기 전까지 버텨야 하는데, 하루도 못 버티고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4581 2015-06-28 22:44:20 5
이순신 장군이 없었더라면... [새창]
2015/06/28 16:49:22
두서 없는 답글이나마 답글을 달아드리자면

1. 임진왜란 초기의 패배들은 기존의 삼포 왜란과 같은 전과에 대한 학습에 기인합니다, 즉 제승방략에 따른 것인데 중앙에서 지휘관이 도착하기까지 시간을 벌어다 줘야 할 읍성들이 속절없이 무너진 까닭이지 단순하게 전력이 약하다 라고 평가할 일은 아닙니다,

2. 조선군의 전략 전술의 근간은 수성전입니다, 야전이 아니라 말이지요, 어디까지나 수성전이 주 이지 야전이 주가 아닙니다, 이러한 수성전에 치우친 전과를 이유로 조명 연합군의 전력을 평가하는 것은 다소 무리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3. 이순신 장군의 영향으로 조선이 살았다 라고 단정지을수 없는게, 분명 무시할수 없는 어찌보면 정말 굉장하다 싶은 전과이기는 합니다만 생각해보면 과연 전라도 일대의 전과가 없었다 할때 이순신 장군이 병사들을 조련하고 함선을 정비할 수군 병영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치 전투와 진주성 전투 등 전라도 일대의 전선을 고착화 시키지 못했다면, 이순신 장군의 활약이 어땠을지 상상도 하기 힘든게 사실입니다.

즉 이순신 장군 개인의 전과로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다 보기는 힘듭니다, 도리어 각 장수들과 병사들, 의병들이 각자 자리에서 그 역할을 다하고 목숨을 바쳐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었기에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봐야 하겠지요.

4. 일본 수군이 바다를 타고 명나라로 넘어가면 이거 답이 없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2차 세계 대전의 일본 제국만 보더라도 월등한 보급력과 화력 등을 견지한 그 들이 어떻게 무너졌는가를 생각해본다면 가뜩이나 조선이라는 전역 하나만 보더라도 보급로의 방비가 무색한 상황에서 어떻게 전쟁을 이끌어 나갈수 있었을지 답이 없는 것도 그러하거니와 명군이라 해서 무조건 소위 말하는 당나라 군대도 아닙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징비록만 보더라도 명나라 군의 장단점을 기술하고 있는 것에서 볼수 있듯이 그 들도 우리와 같이 왜구와의 전투에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한채 허송세월만 보낸 이들은 아니지요.
4580 2015-06-28 22:28:17 5
[새창]
판옥선의 양산 등에서 볼수 있듯 조선의 군사 개혁 및 증강에 있어 사실상 정점을 찍었던 게 선조때이고, 학문이나 문화적으로 융성했던 것도 선조때입니다, 무능이라 하나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과감한 인사 배비와 승진, 전시 대비를 감행했던 것도 선조이지요, 다만 그러한 전시 대비가 을묘 왜변이라는 이전에 경험했고 또 예상할수 있었던 최대한의 방비에 그쳤고 대다수의 신료들과 백성들의 생각 역시 국가 대 국가를 상정하지 못했기에 피해가 컸을뿐이지요.

부하 시샘이라 하나 단순히 그 것을 잘못이라 낙인찍어 볼일도 아닌 것이 신권의 증강에 대한 견제를 비릇하여,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시작된 그 시작부터 불안했던 왕권에 대한 선조의 인식을 생각해볼만합니다.
4579 2015-06-28 17:02:30 5
이순신 장군이 없었더라면... [새창]
2015/06/28 16:49:22
두서 없이 나마 첨언을 해보자면

1. 왕정 국가에서 무정부 상태랑 왕실의 공백을 의미한다 라고 단적으로 말할수 있겠습니다만 임진 왜란 당시의 조선은 엄연히 왕실이 살아 남은 상태였지요, 사족을 더하자면 그 이순신 장군을 주변의 반대를 무릅 쓰고 등용한 것이 선조입니다.
2. 장군, 장군님 어느 표현이든 틀린건 아닙니다,
3.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입니다만,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에 있어 이순신 장군 개인의 능력으로 승리할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요.
4. If는 개인의 영역이라 조심스러운 부분입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에 패한다 해서, 작금의 역사가 일본에 편입된 상태로 잔존한다 보기는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일단 특정한 국가 혹은 영역에 대한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과 이후의 해당 지역을 편입하여 운영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 봐도 좋은 영역이니 말이지요.
4577 2015-06-27 20:34:59 0
역게 가이드) 역사게시판 분들의 의견을 묻습니다. [새창]
2015/06/27 16:07:49
아 그러고 보니 투표를 안했네요, 2번에 한표를 던집니다.
4576 2015-06-27 20:34:12 5
질문이라 본삭금)대몽항쟁 전후의 고려군 장비에 관하여 [새창]
2015/06/27 19:41:46
휴대폰이라 짧게 나마 답변을 드리자면

1. 말 그대로 사용상의 편의성 추구를 위하여 길이가 짧은 편입니다, 다만 마상도가 꼭 길이가 짧은 것 만은 아닙니다, 해당 도검들이 활이라는 주 병기의 사용과 병행했을때 적합하도록 개량된 것 뿐이며 칼이 마상도를 포함하여 짧은 것만 있지는 않습니다,

2. 거란이나 여진의 경우 100% 유목 민족은 아닙니다, 가령 여진 해적은 왜구를 역으로 털어낼 만큼 악명을 떨친바 있으며, 게임과 다르게 전쟁은 단순한 경험치만으로 승부를 볼 일은 아닙니다, 자세한 건 여요 전쟁, 여진 정벌, 여몽 전쟁 등의 경과 들을 찾아보시면 좀 더 이해가 쉬우 실것 같네요.

3. 고려시대라면 미늘을 이어 만드는 찰갑, 사슬을 이어 만드는 그러니까 체인메일과 같은 쇄자갑 등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대몽항쟁 혹은 여몽 전쟁으로 생긴 병기의 변화는 특별히 없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전투의 숫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하여 화력을 추구해야 했던 대 왜구전 등과 다르게 이렇다 할 특정 병기의 효율성 내지는 잇점을 강조할만한 사건이나 환경도 없었을 뿐더러, 그러한 이유도 없던게 사실이지요,

쉽게 말씀드리자면 기존의 병기로 대처해도 충분했던게 사실입니다, 좋은 쪽이나 나쁜 쪽이나 모두 말이지요.
4575 2015-06-27 18:49:14 0
역게 가이드) 역사게시판 분들의 의견을 묻습니다. [새창]
2015/06/27 16:07:49
다른 분들의 의견과 대동 소이합니다, 역사 게시판의 가이드는 말 그대로 가이드 이지, 결코 유사 사학에 대한 대비책으로 그칠게 아니지요.
4574 2015-06-26 22:37:13 0
하켄크로이츠=욱일기 빼박캔트 한장에.jpg [새창]
2015/06/26 20:40:57

하나 덧붙이자면 이 U-511은 다른 의미로 유명합니다, 세계 최초의 탄도 미사일 발사 실험때문인데, 일단 성공은 했습니다만 생산성의 문제라던가, 기술적 장애의 해결, 거기에 날로 치밀해지고 조밀해져가는 연합군의 대잠 체계등의 문제로 실제 목적이던 미 본토 공격은 해보지 못했고 44년인가에 소련에 진주했던 독일군이 후퇴할 당시 U-24, U-9. U-19 세 잠수함이 이 시스템을 이용하여 소련의 항구와 접안 시설, 선박등에 대한 공격을 하기는 했다고 합니다, 전과가 기록되지 못한게 문제일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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