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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03 2015-07-12 22:46:44 1
[징비록] 오늘 편 징비록 보니까 선조가 답이 없네요. [새창]
2015/07/12 22:29:11
앞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만 사건이 터지자 주변에 그를 변호해 주는 사람이 없었고, 본디 성정이 다소 폭급한데다 지나치게 완벽을 추구하는 등 문제가 있어 주변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데다, 그 타고난 용력으로 높은 기대는 받았으나 정작 전쟁은 강화 시즌?이라 활약을 펼칠 일이 없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점 등을 생각해본다면 뭐 답이 없기는 합니다.;
4602 2015-07-12 22:41:32 1
[징비록] 오늘 편 징비록 보니까 선조가 답이 없네요. [새창]
2015/07/12 22:29:11
정상적인 정치와 태세의 문제가 아니라 애시당초 김덕령이 반란군에 참가 했다는 죄목에 대하여 그 것이 사실임을 밝히는 증언이나 정황만 가득하지 정작 그를 비호하거나 사실이 아님을 밝히는 정황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당장 고언백, 홍계남,곽재우, 최담령, 최강 등 같은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불문에 부쳐지거나 무죄 방면에 처해진 의병장 들을 보면 아시겠지만 이 문제를 선조의 독단이라고 단언하기는 여러모로 어렵지요.
4601 2015-07-12 21:58:51 0
울나라 역사상 희대의 막장 고려 충혜왕이 유배로 끝난이유 [새창]
2015/07/12 16:24:09
두서없이나마 간략하게 첨언해 보자면 카사르, 카치운, 옷치긴으로 부터 시작된 동방 3 왕가와 고려는 혈연적으로 관련이 없습니다, 물론 이 들 3왕가에 있어 후계자의 문제로 인한 혼란스러운 공백 또한 없었지요.

그리고 몽골의 처형 방식은 딱히 선호되는게 없습니다, 피를 흘리는 것을 터부로 여기는 것은 사실이나 구태여 허리를 접는 방식을 고집하지는 않습니다, 옷치긴이 쿠케추 텝 텡그리의 허리를 접어버린건 전통적인 처형 방식이 아니라 씨름판이라는 장소에 맞춘 암살 방식에 불과하지요.

끝으로 고려 풍습의 유행 문제는 사실상 고려 왕족으로 부터가 아닌 공녀로 부터 시작된 것이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기황후라는 어찌보면 시류를 타고 정말 운좋게 최고의 출세를 이뤄낸 여성을 바탕으로 시작된 것으로 사실상 정치를 포기하고 장막 뒤로 숨어버린 혜종을 대신하여 권력을 휘두르는 그녀 덕분에 기철을 비릇한 고려의 왕실에서 벌어지는 패악질이 용인된 것도 없지 않은 데다 그 녀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물론 그 녀보다 못하지만 출세를 하거나 혹은 여러 방면에 진출한 공녀들로 인하여 어느 정도 저변이 깔린 것도 감안해야 하겠습니다만 그러한 까닭에 유행한 점도 있겠지요.

어떻게 본다면 고려의 왕들은 핏줄만 고려 왕실이지 그 문화권은 고려라는 한반도의 그 것과는 다른 환경에서 자라고 또 교육받아왔으니 말입니다.
4600 2015-07-11 23:56:25 0
원균과 이순신의 짬밥(...?) 차이가 어느 정도 인가요? [새창]
2015/07/11 22:01:03
1번은 원균의 경우 선조가 즉위한 해에 열린 무과에 합격했고, 이순신은 선조 9년에 열린 무과에 합격했으니 9년 정도 차이가 납니다만 실상 짬밥보다 중요한 것은 이순신은 선조에게 굉장히 큰 기대를 받으며 주변의 반대고 뭐고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으나 그 것과 별개로 이순신과 원균은 동등한 가치를 지녔다 라고 즉 이순신의 대체제 아니 원균의 대체제로 이순신을 생각할수 있었던게 사실이고 또 조정에서 거는 기대나 지원이 달랐던 것도 사실이라는 점이지요, 뭐 이건 초능력이 없는 이상 미래를 알수 없으니 어쩔수 없었던게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2번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입니다, 사람이라는게 십인십색이라는 말 그대로 모두 다르지요.
4599 2015-07-11 15:44:25 0
대몽항쟁 3부 - 7. 마침내 그들이 나섰다 [새창]
2015/07/11 15:43:21

사진이 누구인지 잘 모르실것 같아 더하자면 이 사람입니다.
4598 2015-07-07 21:13:54 3
임진왜란의 원인? [새창]
2015/07/07 20:43:58
실제로 정유재란을 앞두고 내려진 주인장에 공공연하게 조선의 전진기지 화를 목적으로 하는 정책들이 언급되는 것을 보면 정유 재란을 통해 앞서 벌어진 일련의 전술적 실패를 극복하고 대륙으로의 진출을 고려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산들바람93님이 언급하신 일은 사실 무근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20세기 초엽에 대륙을 일통하고 세계를 정복하며 결국 지옥까지 정복한다는 가년 위업 도요토미 재흥기 라던가, 나폴레옹, 워싱턴과 더불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세계적 영웅의 반열에 올린 소학암송십사 같은 책들이 일본 내에서 잠깐 인기를 끌었습니다만 이게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다거나 딱히 서구에 홍보가 이루어진건 아닙니다, 말 그대로 내수시장에 흥미 거리가 된 셈이지요.
4597 2015-07-05 08:39:29 1
[단편 역사] 가마쿠라 막부 창설 (1) [새창]
2015/07/05 01:26:20
그러고 보니 하나 재밌는 사실이 저렇게 반 체제, 반 사회적 인사?들을 단속해야 할 지방관들이 뒤에 가서는 이 들을 보호해주고 세력에 규합시키면서 왜구의 동란을 유발 시키는 한편, 일본 내의 대규모 약탈을 벌인 전적이 있지요.
4596 2015-07-04 22:47:55 0
[새창]
덧붙이자면 융복을 입을때 품계에 따라 갓의 종류와 갓 끝에 다는 장식이 조금씩 달라지는데, 만일 사진과 같이 당하 3품 이하의 관원들이 패용하는 흑립을 쓴다면, 깃털은 빼는 게 맞으며, 갓끝도 밀화 그러니까 호박 구슬과 밀화격자, 그리고 정영 즉 수정으로만 이루어져야 합니다,
4595 2015-07-04 22:41:14 0
[새창]
조선 시대의 군복인 융복을 입을때 쓰는 주립朱笠으로 보입니다, 이름에서 볼수 있듯 붉은 견사로 겉을 덧씌운 갓이라 고증을 따르자면 붉은 색이 되어야 하겠지요.
4594 2015-07-03 23:49:11 2
메이지 유신이 근대화 운동 성공한 사례아닌가여??? [새창]
2015/07/03 21:19:27
첨언을 해보자면 일본 제국군의 규모와 전력을 결정짓는 것은 정부가 아닌 천황에 그 결정권이 있다는 내용에서 볼수 있듯 일본 제국군은 다분히 문민 정부에서 벗어난 존재로 막부를 타도하고 반발을 넘어서며 새로운 일본 제국의 탄생에 큰 기여를 한데다, 12년간의 군생활이 민중 개개인에게 미치는 근대화의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서 무시할수 없는 터라, 군부를 제외한다면 일본의 근대화를 설명하기 조금 어려운 바가 있습니다.

두번째로 바로 군국주의로 넘어간 것은 아닙니다, 1차 세계 대전이라는 전쟁 특수를 통해 경제적 호황을 누리게 되어 문민 정부의 힘이 강대해 진 터라 국제 연맹이라 하는 집단 안전 보장 체제에 들어가게 되면서 군부의 예산을 삭감하고 전쟁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켈로그 브리앙 조약에 서명하는 한편 워싱턴 해군 조약에 사인을 하게 되는 등 다분히 유화적이고 문호 개방의 원칙을 지키는 상식적인 국가였습니다.

문제는 이제 1920년대 극심해 져 가는 경제 불황을 타고 극우들이 들고 일어서는 한편 이러한 혼란스러운 사회를 두고 그 간 억눌려 있던 군부가 고개를 들고 폭주하게 된 것으로 관동군의 만주 사변, 실패한 쿠데타 라고 하나 황도파의 몰락과 다수의 정부 요인의 피살을 불러온 2.26 정변을 기점으로 군국주의가 문민정부를 관짝에 밀어넣고 못질하게 됩니다.
4593 2015-07-01 22:28:35 0
고대 로마군의 급여 (2) 공화정 시기 [새창]
2015/07/01 22:04:26
그래서 조선이나 여타 국가들이 상비군을 대폭 늘리기 어렵기도 했지요, 상비군이라는게 참 만들기는 쉽습니다만 그 것을 장기간 유지하기가 이만 저만 어려운게 아니니 말입니다.;
4592 2015-07-01 22:27:22 3
고대 로마군의 급여 (1) [새창]
2015/07/01 22:00:32
제가 알기로는 여러 이견이 있어 쉽게 단정할수 없는 원인이나 단순한 은 함유량 문제가 아닌 통화 가치의 전반적인 하락에 따른 문제로 3세기 즈음에 로마에 인플레이션이 직격하여, 4세기 초 무렵부터부터 사실상 로마 경제의 근간인 금 본위제가 파탄나고 물물 교환이 공식화 되는 상상할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4591 2015-07-01 22:21:03 2
1860년 일본 최초의 방미 사절단의 반응 [새창]
2015/07/01 22:13:32
일본의 정부 관료들이 서양에 간 최초의 사건? 은 1613년의 하세쿠라 쓰네나가 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간략히 적어보자면 그는 유럽 파견 사절로서 루이스 소테로 수도사를 따라 일본에서 건조된 최초의 갈레온 산후안 바우티스타 호를 타고 1613년 부터 1620년까지 총 7년여의 항해를 거쳐 누에바 에스파냐 즉 멕시코를 넘어 에스파냐, 로마를 직고 돌아오는 세계 일주를 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3세와 로마 교황 바오로 5세를 접견하고 돌아왔습니다만 마침 때가 좋지 않아, 즉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쇄국 정책이 한창인 상황이라 빛을 보지 못하고 묻히게 되었지요.
4590 2015-07-01 21:54:49 7
이순신 장군이 없었더라면... [새창]
2015/06/28 16:49:22
1. 해당 체제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니 참 이걸 뭐라고 해야할지, 어디서 부터 설명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진관 체제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하여 도입한 이래 성공적으로 국가 방위의 근간을 이룬 것이 왜 중요하지 않습니까?

또한 전쟁 초기에 중앙군을 내려보냈으면 괜찮을 것이라는 것은 사건의 전말을 아는 현재의 시각에서나 나올법한 일입니다, 당시 조선군은 왜란에 대하여 충분히 당시의 시각에 따르자면 매우 합리적이고 적절한 행동을 취했으나 사실상 단순한 왜구의 변란이 아니라 국가 대 국가라는 상정하지 못한 상정할수 없는 사건이 발생하여 순식간에 밀려난 것 뿐입니다.

그리고 오군영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하시는데, 오군영에도 집중한 것 뿐입니다, 그나마도 조선의 재정 문제로 큰 효용성을 거두지도 못했지만 아무튼 포기한건 아니지요, 포기하면 대체 해당 지역은 누가 지킵니까? 각 지역에 배비되어 배비를 하고 있는 현대의 상비군을 생각하지 않으셨다면 전혀 이루어질수 없는 가정아닙니까?

2. 주인장이 전혀 무엇인지도 모르시는 것 같은데 히데요시 앞으로 조선 봉행 이시다 미쓰나리가 언급한 11개 조의 보고장이 다루는 전략적 실패는 이순신이 아니라 평양 전투입니다, 그리고 병량미 분담 계획은 한성 점령 이후의 계획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조선의 전진 기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육로 보급의 불가능이 아니라 말이지요.

그리고 노량 해전을 수군 단독으로 치루는게 왜 이상하지요? 이게 무슨 태평양 전쟁 말 일본 제국군도 아니고 왜 육군이 해전을 치뤄야 합니까? 또한 전쟁에 여파를 미쳤을 만한 전투를 이야기 하시는데, 이게 뭔가 야전에서 엄청난 승리를 거둬야만 가능하다 라고 착각하시는건가요? 조명 연합군의 전략적 성공을 부정하시려면 우선적으로 그 들의 전략적 목표와 그 것이 실패한 원인 부터 이야기 하셔야겠지요. 이순신 만 물고 빨고 핧으실게 아니라 말입니다.

당시 일본의 시각까지 이야기 해드렸는데 이렇게 논거도 없이 자기 주장만 반복하시면 참 이야기가 진행될수 없습니다.;

3. 지금 우리가 말하는게 이순신의 대체제 입니까? 직산 전투 이후에 명군을 유인해 처리하면서 수군의 보급을 받아 한양을 점령하고 진격한다는 논지의 방침으로 전환된건 대체 뭐라고 보십니까? 조명 연합군은 충분한 전략적 성공을 거둔게 사실입니다.

4. 그러니까 지금 계속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건 어찌보면 순망치한의 관계라고 말입니다, 조명 연합군과 이순신 장군 그리고 조선 수군은 별개의 존재가 아닙니다, 서로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여 전략적 목적을 달성해 나갔기에 승리할수 있었지요.

육지에서 승리를 거두어 봤자, 해전에서 거두지 못하면 말짱 꽝이듯 해전에서 아무리 좋은 성과를 거둔다 한들 육지에서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전쟁은 끝나지 못할뿐더러 수군은 고사할뿐입니다.

5. 지금 이순신 장군의 수군만으로 해안가를 지킬수 있다면서요, 그럼 일본군은 그냥 놀고만 있습니까? 그걸 바라만 볼까요? 이해가 안되는데 왜 일본군이 그냥 수동적으로 움직일거라 생각하시는 것인지요? 보급, 지원 그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될것 같습니까? 해군의 화포 지원이 아무런 훈련도 생각도 없이 할수 있는 겁니까? 당장 배가 접안할수 있는 지역은 어디고 사거리는 얼마이며 적의 화력부터 경로 등 그 모든 것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겁니까?

정리 해보자면 수군의 진영은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그 영역은 누가 지키고 있나요? 수군이 육군과 완전히 독립된 군사 작전을 할수나 있을거라고 보십니까? 진짜요? 이건 지금의 발달된 군사사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상황인데요?

그리고 정유 재란은 이순신의 부재로 일어난게 아닙니다, 가서 다시 한번 레퍼런스를 뒤져보세요, 명이 조선을 배제한 채 강행하던 강화 회담이 실패한 이후에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경상남도 가덕도의 성을 보수하고 군량을 축적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것을 시작으로 앞서 벌어진 평양 전투를 비릇한 일련의 전략적 실패에 대한 극복을 지시하면서 시작된게 정유 재란입니다.

이순신은 그 공이 굉장했던 것은 사실이나 조명 연합군의 한 사람일뿐 별개의 어떤 존재가 아니지요.
4589 2015-06-30 21:34:21 6
이순신 장군이 없었더라면... [새창]
2015/06/28 16:49:22
두서 없는 답글이지만 덧붙이자면 정유 재란 자체가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의 후반, 명의 참전과 반격으로 전쟁이 교착 상태가 되자 명은 조선을 배제한 채 일본과의 강화회담을 진행시켰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가게 된 이후의 일입니다, 조명 연합군의 무능을 넘은 조선 수군의 위협이 아니라 말이지요.

여기에서 이제 재 침략을 결심하면서 내린 각 군의 구성, 군감의 보고 및 숙영에 관한 지시, 공략 목표와 명군 참전시 대응방법 등 상세한 대응 체계와 메뉴얼을 짜 넣은 주인장朱印狀을 통해 당시 일본의 생각을 엿볼수 있는바 이는 지금 말씀하시는 내용과 정 반대의 상황입니다.

보급의 주는 어디까지나 육로를 통한 보급과 해당 지역의 징발 등이고, 조명 연합군 에 대한 전반적인 경계와 전략적 실패의 극복 등을 이야기 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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