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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22 22:4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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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답글을 작성하시는 사이에 위에 다른 분이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일전의 글을 빌어 정리해 보자면 진주만 기습은 일본 제국 대 본영의 권력 다툼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미국과 일본 양국이 바라보는 외교적, 국익적인 시각차와 동시에 넘을수 없는 타협을 가로막는 벽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말 그대로 나라의 대동맥을 끊는 온갖 규제가 시행되는데다 영국과 네덜란드 령 동인도 제도까지 동참하게 됩니다, 말 그대로 국운을 걸수 밖에 없는 상황속에 영국은 아프리카에서 발이 묶여 있고, 네덜란드는 사라진지 오래라 동인도 제도 일대는 주인없는 땅이나 다를바 없었으며, 소련과의 조약으로 만주 일대의 후방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일부 허약한 패배론자들은 미국과의 화친을 말하고 있었지만 이는 곧 모든 원정때마다 미국의 허락을 얻어야 한다는 달리 말해 항복해야 한다는 말과 다를바 없기도 했지요, 만일 이번 기회만 잘 타고 넘어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만 얻을수 있다면 일본의 가장 큰 약점이 사라질 기회이기도 했으니 어찌 피할수 있겠습니까, 물론 물론 미국이라고 이 걸 모르는 건 아닙니다, 만일 일본의 이러한 행보를 묵인하거나 넘긴다면 그 들이 상대할 일본은 작금의 그 들과는 전혀 다른 이 들이 될 것이 분명했고, 더 이상 석유와 고철로 달래기에는 여론이 너무나 안좋기도 했습니다.
그러하기에 일본과 미국은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지요.
물론 전쟁만 준비한 건 아닙니다, 태평양 전쟁이 벌어질때 까지 수 개월간 양 국은 치열한 외교전을 거치며 어떻게 해서든 전쟁을 피하고 해결하기를 갈망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그러한 외교적인 접점을 찾기에는 양 측의 시각이 너무나 다르다는게 문제였습니다, 일본이 원하는 아시아의 평화라는건 팔굉일우 즉 일본 아래에 단결된 평화였고 미국이 원하는 아시아의 평화라는 것은 일본의 군사 활동의 중지였습니다.
본은 미국, 영국 그리고 네덜란드에 대하여 제국의 자존자위를 위하여 전쟁을 불사한다는 결의 하에 10월 하순까지 전쟁 준비를 마치되 제국의 요구 사항이 받아들여 질수 있도록 모든 외교적 노력을 강구한다는 등 꼭 전쟁만은 아니고 외교적인 노력도 보이기는 하는데, 그 요구 사항이란 여지껏 언급되어온 바와 같이 더 이상 극동에 어떠한 병력도 들여보내서는 안되고 경제 제제를 풀어야 하며 프랑스와 일본간의 관계는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둘것 등이었는데, 왜 이러한 외교적 노력의 마감 기한이 10월 하순였냐 하면 이 시점에는 더 이상 비축유도 기대하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즉 이 시기에 일본이 석유를 찾아 남진하지 않는다면 국가의 존립 그 자체를 이야기 할만큼 심각한 석유난에 처하게 된다는 것으로 고노에 수상은 이러한 미국과의 전쟁에 대하여 그 전쟁이 낳을 결과를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기에 필사적으로 외교전에 매달려 미국측에 모든게 준비되었고 언제든지 합의 사항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며 시간과 장소만 알려준다면 언제든 달려가 회담에 임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루즈벨트 대통령과의 정상 회담이 성사되기를 갈망했습니다,
다만 미국의 그리고 헐 국무장관은 고노에 수상을 그리 믿지 못하였던게 사실입니다, 비록 마감 시한에 대하여는 알지 못했으나 중일 전쟁을 일으킨 1차 고노에 내각의 실무 책임자였고,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말을 처음 썼으며 대정익찬회라 하는 사실상 민주주의의 종말을 낙인찍은 사람임을 들어 그가 서두르는 것은 분명하나 그 목적에 대하여 심각한 수준의 의심을 안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하기에 이제껏 해온 모든 공격적인 정책을 폐지하고 평화적인 정책을 펼치리라 믿을수 있는 증거 Clean cut evidence를 보여 줄 것을 요구 했는데, 그게 이 전제주의 정권하에서 갑자기 만들어질수는 없는 노릇이라 시간은 덧없이 흘러 어느 덧 10월 상순이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달리 방도를 찾을길이 없어진 고노에 수상은 도조 육상, 오이카와 해상, 도요다 외상 등을 불러 회의를 열었고, 도조 육상에게 중국에서의 철수없이는 외교적 해결이 불가능하며 현재의 일본 제국은 미국 과의 전쟁에서 이길 자신이 없다는 사실을 말했으나 그는 그 자리에서 거부 함과 동시에 약속된 기한이 지났으니 전쟁을 결의할뿐이며 천황 폐하께서 참여한 어전에서의 회의를 뒤집을 불충한 생각을 하냐고 자신이 없다면 수상의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소리치고는 나가버립니다.
그렇게 흐지부지 별 소득 없이 끝난 회의 이틀 뒤에 고노에 수상은 다시 한번 도조 육상을 찾아가 미국과의 전쟁이 낳을 위험성을 설명하고 중국에서의 철병이 필요한 이유를 들어 그를 설득했으나 자신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자신이 있고, 지금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면 다른 요구를 낳을뿐이며 일본 제국군의 철수는 일본 제국군 전체의 사기를 깍는다는 이유를 들어 거부합니다.
도조 육상의 강경한 최후 통첩이나 다를바 없는 말을 들은 뒤 고노에 수상은 이제는 정말 사임하는 것 외에는 어떻게 길이 없어진 게 사실이라 41년 10월 16일 수상의 자리에서 물러났고, 이틀 뒤에 도조 육상이 수상의 자리에 올라 이제는 도조 내각이 출범하게 됩니다.
그리고 헐노트 사건?으로 대표되는 미국과 일본간의 마지막 타협 할수 없는 양국의 입장을 재 확인한 뒤 마침내 사건이 일어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