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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88 2016-01-23 00:14:4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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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본 해군과 육군간의 참 지독하리만치 어찌보면 굉장했던 대립을 부정하는게 아닙니다, 뭔가 핀트가 엇나가는 것 같은데 그러한 대립 속에 남방 작전에 따른 피해 누적과 전력 분산으로 인한 지원 미비와 자체적인 능력으로 유지할수 없었던 제공권의 문제에 따라 수송용 잠수함과 상륙함을 만들려고 했던 일본 육군의 절박했던 상황만으로 당시에 일본 육,해군이 갖추었던 기본적인 전술적 공조 체제를 무시할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6087 2016-01-23 00:09:5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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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가 있다고 하시는데, 당장 상해 공략만 보더라도 해군의 엄호와 해군 육전대의 투입을 비릇하여 중일 전쟁에 있어 해군의 보급이나 해군 항공대를 빼놓고 육군 단독으로 이야기 하기는 좀 무리가 있지요, 이후의 상황을 보더라도 당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상륙 전력을 갖추고 있던 일본 해군이 단독으로 남방 작전을 펼친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군 항공대가 육군과 따로 논 것도 아닙니다, 본디 상륙 전술 자체에서 가령 항공 전력만 놓고 본다면 해군 항공대가 제공권을 획득한 뒤 육군 전력이 상륙하면 육군 항공대가 지원하는 공조 체제가 돌아가고 있었지요, 언급하신 오키나와에서 해군 측이 육군 6 항공군의 지휘를 맡은건 지휘를 맡았다는게 특이할뿐이지 기존의 공조 체제와 전혀 색다른 무언가라는게 아닙니다,
6086 2016-01-23 00:00:3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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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를 보다 보니 이런 말도 나오네요,

'전쟁은 피할 수 있었다' 라고, 호시나 젠시로 元 중장은 주장했다.

호시나 젠시로 : "군령부는 내란이 일어난다고 하지만, 내란이 일어나도 해군이 반대하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만큼의 사람을 죽여가면서 전쟁을 하는 것보다,
(육군에게) 약간 양보를 하는 것이. 그런 것이 부족했던 것은 반성해야 될 점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그러니까 다큐멘터리만 보자면 전근대적인 경쟁이라기 보다는 해군은 육군이 내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혹은 뒤에 나오는 예산 문제로 행동했다 라고 봐야 한다는 말이겠네요, 즉 위에서 작전 계획을 변동한 것은 다큐멘터리 내용을 보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 나오네요.
6085 2016-01-22 23:58:3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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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출처를 알수 없다라고 하면 좀 그렇겠군요, 아무튼 언급하신 다큐멘터리에서 군령부 총장 나가노 오사미 대장은 미요 카즈나리 중좌와의 대화에서 해군이 전쟁을 할 수 없다며 반대한다면 우익과 육군이 내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언급하신 블로그에서 보자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군령부 작전과의 미요 카즈나리 중령은 훗날 군령부, 나가노 총장으로부터 이러한 개전의 진의에 대해 듣게 되었다.

미요 카즈나리 : "어째서 당신(=나가노 총장)은 전쟁에 찬성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느냐라고 물으니,
만약 해군이 전쟁은 불가능하다고 반대했다면, 우익과 육군이 이에 대해 내란을 일으킬거라고 말하더라고."

네 단순한 군공의 경쟁 심리가 아니라 육군과 우익이 내란과 쿠데타를 일으켜 문제를 일으킬 것에 대한 우려인데요? 다큐멘터리를 더 듣다보면 예산을 더 타내기 위한 술책이었다는 증언도 나오고요.
6084 2016-01-22 23:52:2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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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을 작성하는 사이에 답글을 달아주셨는데, 앞서 답글에서 하신 말씀을 돌려드려야 겠네요, 작성자 님의 추정과 당사자들의 증언 및 기록중 어느쪽이 더 신빙성이 있을까요? 공조따위는 집어치웠던 상태에서 시작했다 하시지만 중일 전쟁 당시 양측의 공조는 긴밀한 편이었고 이후의 작전 계획들에서도 생각보다는 상당히 상식전인 측면에서 가령 상륙전이라던가 하는 부분을 들수 있겠지요, 아무튼 작성자 님의 추정보다는 일단 잘 돌아갔습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작전 계획도 변동 된 것이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작전 계획를 작성자님의 추정과 출처를 알수 없는 다큐멘터리로 부정할수가 있을까요?
6083 2016-01-22 23:49:4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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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해군반성회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데, 내용이 조금 다른데요? 육군에 대한 경쟁 심리로 전쟁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는 안나옵니다만 음 어떤 걸 보셨는지 잘 모르겠네요, 오히려 나오는 증언은 일본 육군에 따른 내란과 쿠데타에 대한 우려인데요;
6082 2016-01-22 23:40:1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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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거짓일지 정도는 설명 드리지 않았습니까, 언급하신 전 근대적 경쟁심리라면 애시당초 왜 남방작전이 작전의 고려 대상이 되겠습니까? 그냥 기존의 전략 대로 수세적 점감 요격에 이은 함대 결전으로 나아가면 되지요, 그에 따른 전력의 분산 및 약화는 고려 대상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단순한 추정이라고 하십니다만 실제 전략이 그렇게 변동된걸 어떻게 할까요?
6081 2016-01-22 23:35:2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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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을 다시는 사이에 답글을 달아주셨는데 경쟁심리로 개전을 밀어붙였다 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애시당초 상기 작성한 답글에서 처럼 남방 작전에 대한 전력 분산이 원인으로 전략이 수정된 바 경쟁 심리가 원인이라 한다면 남방 작전에 전력을 분산할 이유가 없겟지요.
6080 2016-01-22 23:34:0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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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이라 이가 빠지고 탈고가 어렵습니다만 대강 이어보자면 39년 이전의 기존의 해군 전략은 마셜제도와 캐롤라인제도에서 발진한 항공기와 함께 잠수함이 적의 전력을 최대한 깎아낸뒤 필리핀, 팔라우, 오가사와라, 마리아나 등에 다다른 미 해군을 단기 결전으로 격파, 섬멸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39년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 취임한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그러한 전략에 대하여 남방 작전에 따라 수송, 보급, 호위를 위하여 전력을 할애해야 하는 현실에 맞지 않는다 하여 개전과 동시에 치명적 타격을 입혀 최소 6개월의 시간을 번뒤 남방 작전에 집중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바꾸었고, 당시 참모장을 역임했던 후쿠도메 시게루 제독의 증언에 따르자면 매년 시도는 하나 불가능한 임무로 오로지 잠수함에 의한 타격만을 가정했던 진주만에 대한 항공 공습을 40년 4월 경에 처음 꺼냈다고 합니다.
6079 2016-01-22 23:28:5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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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러한 사실은 해군도 다를게 없는게 태평양 함대 해군 사령관 킴블 제독은 27일 받은 스타크 해군참모총장의 전쟁 경고 메시지를 이틀전쯤 받은 메시지와 비슷한 내용 탓인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습니다, 물론 그도 할수 있는게 별반 없던게 사실이지요, 태평양 함대의 임무이던 가장 신속한 전투의 투입을 위해 신형 카탈리나는 승무원의 훈련에 더 중점적으로 배비되었고 늘 그랬듯이 초계는 우선순위 밖이었습니다, 물론 메시지가 명확하지 못했던 것도 문제이나 독단적으로 메시지를 폐기한 점 등을 무시할수는 없는 노릇으로 비단 진주만 공습의 피해를 모두 일본에게 전가 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반증이 되겠습니다.

덧붙이자면 태평양 전쟁은 일본 해군과 육군의 갈등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이 전쟁은 말 그대로 대본영이 천황의 뜻 아래 비단 얼굴 마담이든 아니든 그의 뜻 아래에 모여 모두가 시작한 전쟁입니다, 대륙 침략을 하고 있는 육군과의 전근대적 갈등과는 거리가 멀지요, 무엇보다 일본 해군의 작전은 남방 작전을 펼치고 있는 일본 육군과의 공조가 필수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해군만 전쟁을 벌여서는 계획 자체가 이루어질수 없는 것이 전제라는 겁니다,
6078 2016-01-22 23:22:2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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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적질이나 학살 범죄와는 좀 다르지요, 말 그대로 공습이고 기습입니다, 전쟁은 전쟁일뿐 학살이고 범죄라고 보기는 어렵지요, 아 물론 포로와 민간인 대상으로 벌이는 일들을 빼고 말입니다, 아무튼 그 내역을 보면 피해에 있어 일방적인 일본의 문제만을 묻기가 뭐한게 그 들의 작전 계획 그대로 제 1 항공함대의 전력을 동원하여 모든 항공모함 과 전함 4척 이상, 최대한 많은 수의 오아후의 적 항공기를 격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이 작전에 있어 그러한 항공 전력의 공습에 대하여 아무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방비 태세를 갖출 수 없게 처들어 간게 문제가 아니라 원래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방비 조차 소홀히 했습니다, 그러니까 11월 27일이죠, 미드웨이와 웨이크의 방어 강화를 위해 해군과 육군이 회의를 했을때 허즈번드 킴멜 대장이 미드웨이와 웨이크의 항공 전력 추가 배치를 논할때 오아후의 전력 공백을 걱정한 것은 하와이 육군 항공대 작전 참모인 몰리슨 중령 외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태평양 함대 전쟁 계획 장교 맥모리슨 대령은 절대로 항공 공격 가능성은 없다고 부정까지 했지요,

그렇다고 다른 부분은 어떠한가 하면 더 심각합니다, 하와이 육군 사령관 윌터 쇼트 중장에게 내려진 전쟁성 전문 472호는 일본과의 물리적 충돌을 경고하고 있었으나 그 외의 다른 조치는 주민들을 자극하는 것에 대한 경고나 일본이 먼저 공격을 해야 한다는 정도외에 다른 언급이 전혀 없었고 그렇다고 장거리 초계를 돌리자니 B-17 폭격기는 고작 6대에 불과하여 의미가 없었으니 그의 조치는 파괴 공작에 대한 대비로 돌아갔고 그러한 대비로 전투기를 한군데 몰아넣는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아 물론 레이더도 있기는 했습니다, 훈련을 위하여 가동하는 이 레이더 시설의 가동 시간을 대폭 증가시킨 결과 일본기를 발견하기는 했습니다만 요격 사령부를 거쳐 대공 시설과 항공기에 전파하는 어떠한 명령체계도 없었습니다, 즉 포고와는 무관하게 갖춰져야 할 최소한의 방비도 없었고, 그러한 사실을 고민하고 우려했던 사람도 극히 적었던게 사실입니다.
6077 2016-01-22 23:07:0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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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문제인 제 2전선의 발생을 생각해보면 그리 큰 사건은 아닐지도 모르지요.
6076 2016-01-22 23:06:3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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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다소 좀 문제가 있는 이야기가 맞습니다, 왜냐하면 실제 개전 직전까지 히틀러를 비릇한 군부 전체가 예상 했던 전쟁은 장기전이었고, 그간 이어오던 인프라 증설들도 군수 산업 보다는 그에 관련되는 산업 시설 구축에 힘을 쏟고 있었지요, 즉 폴란드 침공 이후 히틀러의 예상대로 외교전이 성공적으로 수행된다면 충분히 Z 계획을 비릇한 전력 확충에 힘을 쏟을수 있었겠습니다만 현실은 좀 뭐 같았지요; 아 물론 그렇다고 해군력이 보충된다 해서 영국 해군과 단기 결전을 벌일만한 능력은 되지 못하는게 사실입니다, 해군 설계국의 총체적 난국을 떠나 계획 자체가 통상 파괴전에 더 가까우니 말이지요.
6075 2016-01-22 22:55:1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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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언하나를 더하자면 사실 그 진주만 기습도 알고 보면 눈물 없이는 볼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원래 대로라면 헐 노트를 거부한다는 답변을 선전 포고와 함께 작전 개시 1시간 반에 전달하기로 했는데, 해군이 적극적으로 항의하여 20분 전 그러니까 진주만 시각으로 7시 20분, 워싱턴 시각으로 오후 1시로 앞당겨 졌지요,

그런데 문제는 주미 대사관에서 13개의 전문을 겨우 해독을 하고 보고를 하러 서기관 실에 가보니 담당자들은 주말이라고 전원 칼퇴근 해버리는 바람에 타이핑도 못하고 그대로 책상위에 던져졌습니다,

결국 다음 날인 일요일 아침 주재 무관의 보좌관이 우연히 출근길에 우편함에서 14번째 전문이 실린 전보를 발견하여 전파해 준 덕분에 모든 대사관 직원들이 달려들어 마지막 14번째 전문을 해독하기 시작했습니다만 원칙상 이걸 타자 칠수 있는건 외교관 뿐인데, 타자를 칠줄 아는 건 오쿠무라 1등 서기관 한명뿐이라 당연히 14개의 전문을 혼자 치려니 오타는 기본이요, 시간은 늦어지고 있었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전문에서는 시간 엄수 잘 하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노무라 대사는 왜 1시인지 정말 순수하게 이해를 하지 못해서, 2시로 약속을 미뤘습니다.

그렇다고 미국이 이걸 몰랐나 하면 일본이 14번째 전문을 받아들기 전에 이미 통신을 가로채어 모든걸 알고 있었고 당일인 일요일 오전 6시 반 무렵에 출근한 마셜 대장에 의하여 극동 지역 육군 사령부, 카리브 해 육군 사령부, 하와이 육군 사령부, 제 4군 사령부, 아시아 함대, 태평양 함대 등에 경계 태세 강화를 지시하는 통신을 보냈습니다만 문제는 하필 이때 이 순간 워싱턴 상공에서 강력한 정전기 현상이 발생, 장거리 통신이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 때문에 민간 통신 회사를 경유하여 암호화된 전문을 발송했는데, 문제는 이 걸 지급 표시 없이 보내서 다른 일반 전보들과 섞여 버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한참을 빙글빙글 돌다가 군 기지에서 수 없는 엄격하고 까다로운 검문을 거쳐 도착한 시각이 하와이 육군 사령부에서는 진주만 기습으로부터 6시간이 지난 후였고, 태평양 함대는 8시간 후였습니다. 참 이 것도 어찌보면 천운이고 또 안타까운 일이지요.;
6074 2016-01-22 22:52:45 1
[새창]
비단 히틀러의 능력을 배제하더라도 문제가 큽니다, 7월 한달 내내 공습을 벌이고도 타격 목표에 대한 우선 순위 정리도 실패 했고, 5공군의 공습 작전과 같은 현장을 고려하지 않는 무모한 계획을 남발했으며 무엇보다 작전 기간이 너무나 짧습니다, 그러다 계획 막바지인 9월에 가서야 겨우 타격 목표에 대한 정리도 마무리 되었고, 공습 계획도 가닥이 잡히는데 베를린에 폭탄이 날아든다고 히틀러가 날뛰고 괴링이 마지못해 맞장구 처주고 케슬링이 런던 폭격을 주장하며 승기를 발로 걷어 찾지요, 영국측 파악으로는 길어야 한달이면 제공권을 상실한다고 하는데 뭐 교환비를 떠나 생각해보면 지대한 공헌이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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