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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03 11:3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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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혹시나 싶어서 해당 기사의 번역본을 첨부해봅니다, 출처는 하단의 동북아 역사넷 주소입니다.
http://contents.nahf.or.kr/directory/item.do?levelId=jo_014r_0070_0120_0020
수(隋)나라 [양제(煬帝)] 대업(大業: 605~617) 말에 서돌궐(西突厥) 엽호칸(葉護可汗)이 자주 그 나라를 공격해서 격파하니, 파사왕(波斯王) 고살화(庫薩和)[註 410]는 서돌궐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의 아들 시리(施利)[註 411]가 뒤를 이으니, 엽호가 자기 부락의 장수를 나누어 그 나라를 감시하고 통제했으므로, 파사는 결국 엽호에게 신하라 칭하였다. 엽호칸이 죽자, [파사국을] 감시하고 통제하라고 보낸 자들이 파사에서 독자적으로 행동했으므로 다시는 서돌궐에 지배당하지 않았다. 시리가 즉위한 지 일년 만에 죽자, 고살화(庫薩和)의 딸을[註 412] 옹립하여 왕으로 삼으니, 돌궐이 다시 그녀를 살해하였다. 시리의 아들 단갈방(單羯方)이 불름(拂菻)으로 달아나자, 그 나라 사람들이 그를 맞이하여 옹립하니 이가 이항지(伊恒支)[註 413]가 되었으며, 재위 2년 만에 죽었다.
형의 아들 이사후(伊嗣候)[註 414]가 뒤를 이었다. 21년[註 415] 이사후가 사자를 보내와 짐승 한 마리를 헌상하였는데, 활욕사(活褥虵)라고 부르는 것인데 모양은 쥐를 닮고 색깔은 청색이며 몸길이는 8~9촌(寸)으로 굴에 들어가 쥐를 잡을 수 있었다. 이사후 [의 성격은] 겁약하여 대수령에게 쫓겨나 토화라(吐火羅)로 도망을 갔다. [토화라에] 이르기도 전에 대식의 병사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의 아들 이름은 비로사(卑路斯)[註 416]인데, 또 토화라의 엽호(葉護)에게 투신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비로사는 [고종] 용삭(龍朔) 원년(661) 대식(大食)이 자주 침범하여 소요를 일으킨다고 보고하고, 병사를 보내 구원해주기를 청하였다. [고종은] 조를 내려 농주(隴州) 남유현령(南由縣令)[註 417] 왕명원(王名遠)을 사자에 충임하여 서역(西域)으로 보내어 [그 땅을] 나누어 주현(州縣)을 설치하도록 하니, 그 땅 질릉성(疾陵城)[註 418]을 분리하여 파사도독부(波斯都督府)를 만들어 비로사를 제수하여 도독(都督)으로 삼았다. 이후로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내와 공물을 바쳤다.
[고종] 함형(咸亨) 연간(670~673) 비로사가 스스로 와서 입조하니, 고종이 충분히 은사를 더하여 주고,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을 배수하였다. [고종] 의봉(儀鳳) 3년(678) 이부시랑(吏部侍郎) 배행검(裴行儉)[註 419]에게 명하여 군대를 이끌고 가 비로사를 맞이하여 책립하여 파사왕(波斯王)으로 삼도록 하였다. 행검이 그 길이 멀므로 안서(安西) 쇄엽(碎葉)에 이르렀다가 돌아오니, 비로사는 홀로 되돌아갔으나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점차 대식에게 침략을 당하니, 토화라에서 20여 년간 객으로 있게 되어, 부락 사람 천명도 점차 떠나고 흩어졌다. [중종(中宗)] 경룡(景龍) 2년(708) 다시 와서 입조하니 [그를] 배수하여 좌위위장군(左威衛將軍)으로 삼았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병들어 죽자, 그 나라는 드디어 멸망하고 부족 사람들만 존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