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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4 22:2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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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당고 정전 협정과 하응흠 - 우메즈 협정을 통해 북평은 무주공산이었고 일본군은 북평 동북지역과 만리 장성을 잇는 지역을 점유하여 삼면에 걸쳐 북평을 포위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북평은 오로지 노구교를 통해 내륙과 연결된 섬과 같은 형태로 하북성 일대는 총 병력 8만여명의 송철원의 서북군 그러니까 제 29군이 맡고 있었으며 영정하와 완평성, 노구교 일대는 제29군 산하 풍치안의 제37사단이 날로 가열화 되어 가는 관동군의 압박에 대하여 마지노선이나 다를바 없는 일촉즉발의 태세로 틀어 막고 있었습니다, 물론 국지전은 시시때때로 발발하여 뒤에 가서는 이게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라는 태도까지 불거졌으니 할말 다한셈이지요, 증거가 있느냐고 하시면 오히려 참 당황스러운게 당시의 정황은 확인하시고 하는 말씀이신지 궁금하네요.
그리고 그러한 상황속에 발생한 이 문제를 쉽게 말해서 비유를 들자면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GDP에 누군가 총격을 가했는데 이 것을 가지고 북한의 소행이라 단정 짓는 거에요, 물론 총기 오발사고 일수도 있고 어떤 다른 문제가 있을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그러한 조사를 일절 생략하고 그냥 북한이라고 하는 겁니다,
당시 일본 제국의 입장이 그거에요, 누군가 총격을 가했는데 현재 우리의 상황을 놓고 볼때 중국군외에는 대상을 확인하기 어렵다, 이는 이후의 중국 측과의 현장 협정에서도 확인된바, 중국측의 기록에는 언급하신대로 총성을 빌미로 사건을 일으킨 일본측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만 어쨌거나 당시에 양측 모두 여지껏 벌어져온 국지전을 상정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회담을 가졌고 결과적으로 별 문제가 아니라는 입장 하에 본군에게 사과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며 노구교 일대의 중국군을 철수시키는 한편 배일운동을 자제해 달라는 일본측의 요구에 따랐습니다.
그게 이 사건의 전부입니다, 결과론적으로 볼때 일본의 자작극이거나 혹은 과잉 반응일수 있겠지요, 네 그런데 당시 일본 제국의 입장 하에서는 아군이 공격받은 사건이며 명분이 될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은 중국측도 현장에서 전정 협의를 통해 동의를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