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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68 2016-04-29 10:51:46 1
충격) 6.25때 중국의 인해전술로 당한거 사실 아니였어여? [새창]
2016/04/28 14:51:01

위의 사진은 당시 전선의 모습입니다,
6567 2016-04-29 10:51:16 2
충격) 6.25때 중국의 인해전술로 당한거 사실 아니였어여? [새창]
2016/04/28 14:51:01
하다하다 별 이야기가 다 나오고 훈제청어가 날라다니니 그냥 제가 입증하고 말렵니다, 위에서 위키피디아 논거로 육군 대학을 가져오셨지요?

당시 육본 작전교육국은 음양리지구전투를 통한 전례분석에서 “소양강 방어진지의 조기 붕괴와 3연대의 보급로 포기가 전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고 지적하고 소양강방어선의 조기붕괴에 대해 몇 가지 원인 중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가장 크게 지적하고 있다.

1. 통신망의 두절과 야간기동에 있어서의 부대장악 불충분
2. 지휘관의 지휘능력의 결여

이 가운데 3연대가 포기하였다는 보급로는 오마치를 일컫는 것이며 전군에 미친 중대한 영향이라 함은 3군단 기동로를 차단당하게 함으로써 이른바 현리포위사태를 유발하여 동군단의 전력(중장비)를 잃게 하였다는 것을 가리킨 것이고 지휘관의 지휘능력의 결여란 5연대장의 지휘능력을 평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와 같은 육군본부의 견해도 그러하거니와 5월 28일과 29일에 걸쳐 실행되었던 7사단장과 5연대장의 경질도 이와 관련된 조치결과로 간주되고 보면 3군단의 현리 포위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7사단에 있다고 하였음이 당시의 통설인 것 같다.

그러나 상기 두 가지 원인 가운데 전자에 대한 책임이 사단장에게 있다고 한다면 후자는 연대장의 보직권을 행사한 육군본부에 1차적인 책임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한국전쟁사6권>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p 237-238
6566 2016-04-29 10:47:31 2
충격) 6.25때 중국의 인해전술로 당한거 사실 아니였어여? [새창]
2016/04/28 14:51:01

레퍼런스로서의 신뢰성에 있어 위키피디아와 나무위키가 뭐가 다른데요? 위키피디아에는 웃자고 벌이는 반달이 없을것 같아요? 하다하다 이제는 신뢰성과 정치적 성향을 들어 논점을 흐트려트리시는 것 같은데 입증이나 좀 해보시지요? 그럼 누가 뭐라고 할까요?
6565 2016-04-29 10:45:35 2
충격) 6.25때 중국의 인해전술로 당한거 사실 아니였어여? [새창]
2016/04/28 14:51:01
말도 안되는 소리 그만하세요, 지금 위키 피디아에 올라온 지식들이 모두 옳다는 겁니까? 정말로요? 나무위키는 아무런 토론도 제제도 무엇도 없는 소말리아 라고 보세요? 뭔 내로남불도 정도가 있지, 지금 하시는 주장대로라면 일본 위키에 적시된 사실과 같이 위안부 문제는 전쟁 범죄로 귀결될 일도 아니고 무조건 인권 문제로 볼 일도 아니겠네요? 종종 일어나는 반달리즘은 또 뭐라고 설명하시겠습니까? 반달리즘은 뭐 수정이 아니라 해킹이랍니까? 참..별...
6564 2016-04-29 10:39:31 2
충격) 6.25때 중국의 인해전술로 당한거 사실 아니였어여? [새창]
2016/04/28 14:51:01
작성자 성향 관련하여 반론을 제기하는 답글은 삭제하겠습니다, 사실 윗 답글과 중복되어 추가로 안 달아도 되는 부분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아무튼 내로 남불의 논지는 좀 지양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위키가 언제부터 레퍼런스로 존중받는 위키가 있고 아닌 위키가 있던가요? 성향에 따라 참 거짓이 결정되던가요?
6562 2016-04-29 10:32:58 2
충격) 6.25때 중국의 인해전술로 당한거 사실 아니였어여? [새창]
2016/04/28 14:51:01
위키피디아는 근거가 될수 있을것 같나요? 말씀 하신 그대로 위키피디아 역시 아무 자료나 올려도 어떤 재제도 없습니다. 근거를 삼고 있는 부분도 미약하고 추축에 가까운 서술만 계속되며 주관적인 입장이 마치 객관적인 사실인것 처럼 설명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친정부적 성향이 문제가 될건 또 뭔가요? 자료의 신빙성을 논하는 점에 있어 무조건 반정부적 성향이어야 옳다는 건가요? 약자 코스프레도 아니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요.
6561 2016-04-29 09:17:59 0
전작권 회수와 관련된 현리, 청천강 떡밥에 관한 글입니다. [새창]
2016/04/29 09:14:46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글을 줄입니다, 나머지는 다음글에서 잇겠습니다.
6560 2016-04-29 09:15:47 0
전작권 회수와 관련된 현리, 청천강 떡밥에 관한 글입니다. [새창]
2016/04/29 09:14:46
한번은 태평양함대 사령부에서 레이턴이 맥아더의 사진을 액자에 끼워 책상 위에 올려놓은 이유를 물어보자, 그는 잠시 경계심을 늦추고 이러게 대답했다.

"그것은 나에게 주피터 신처럼 벼락까지 쳐가며 요란하게 떠드는 멍텅구리가 되지 말라는 점을 상기시켜주거든"

- 니미츠 - 별들을 이끈 최고의 리더 중에서 발췌
6559 2016-04-28 22:08:51 57
피카츄가 홀쭉해진 이유 [새창]
2016/04/28 19:56:12


6558 2016-04-28 22:06:04 4
피카츄가 홀쭉해진 이유 [새창]
2016/04/28 19:56:12

https://www.youtube.com/watch?v=ZQfcItSMkz0

제가 제 돈 들여서라도 피카츄를 정규직으로 만들어줬어야 했어요.
6557 2016-04-28 22:01:01 15
피카츄가 홀쭉해진 이유 [새창]
2016/04/28 19:56:12

여담입니다만 우리는 피카츄를 고용했어야 했어요, 와 살다 살다 롤링 발칸 너클볼을 시구로 볼줄이야. 청보 핀토스 이후로 이런건 처음이네요.
6556 2016-04-28 21:51:32 1
충격) 6.25때 중국의 인해전술로 당한거 사실 아니였어여? [새창]
2016/04/28 14:51:01
위키를 가져오시니 위키로 답변드리겠습니다, 언급하신 위키의 레퍼런스에 대한 반론도 포함되어 있으니 따로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또한 제주 4.3 사건의 전투 사령관이나 그게 이 현리 전투의 소문이 사실이라는 논증은 되지 못하지요, 오히려 그 논지를 빌자면 영천 탈환이나 군우리 등에서의 공적을 생각하면 현리 전투가 아니라는 논리도 성립하는데요?

https://namu.wiki/w/%ED%98%84%EB%A6%AC%20%EC%A0%84%ED%88%AC

5.2. 유재흥 장군은 정말로 도망갔는가?[편집]

당시 생존자들 사이에서 유재흥 장군이 도망쳤다는 소문이 돈 것은 사실이다. 애초에 3군단 본부 및 전술지휘소는 당시 포위망 바깥인 하진부리에 있었으나, 유재흥 장군이 예하 사단장들과 오마치 고개 돌파 작전회의를 마친후 군단전술지휘소로 복귀하는 게 그것도 장병들이 다 볼수있는 경비행기로 포위망 내의 장병들에게는 군단장이 도망치는 것으로 인식되었으며, 이후 군단전체가 붕괴하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일단 한국 인터넷 상에서는 유재흥 장군이 도망간 게 정설인 것처럼 널리 퍼졌다. 이 설이 널리 퍼지게 된 이유는 네이버 부흥 카페의 지금은 삭제된 한 게시글이었는데, 정작 저 글도 밀리터리, 군사무기 카페 쪽에서 올라온 글을 인용한 것이라고 면피. 한국어 위키백과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유재흥 장군 도주설이 시작된 곳은 디시인사이드 밀리터리 갤러리와 이글루스가 유력하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논란 당시 군 원로들이 공동성명을 내어 이를 반대한 일이 있었는데, 이후 당시 좌익 성향이 강했던 이글루스 유저들 및 디시인사이드 유저들에게 '찍혀' 버린 것. 비단 유재흥뿐 아니라 백선엽 장군 등 6.25 참전 장성들에 대한 악의적인 사실왜곡 비방글들이 이때 양산되었다. 덕분에 지금 인터넷에는 아직도 6.25에 대한 왜곡된 사실들이 떠돌아다닌다

아직도 남아있는 도주설 유포 글들을 보면 현리 전투를 '전작권을 넘겨 주게 된 계기'로 표현하며, 유재흥 장군을 '전작권을 넘겨 주는 빌미가 되었는데 도리어 전작권 환수를 반대하는 똥별'로 표현하는 등 전작권 이양에 대해 지나친 사실왜곡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5]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논란에 대해 유리한 프레임을 만들기 위해 사실왜곡으로 점철된 글들이 양산된 것. 아직 밀리터리 갤러리에 남아있는 당시의 글 일부 이후 이글루스, 디시인사이드의 글들이 네이버, 다음 등의 카페 블로그에 퍼날라지면서 인터넷에 크게 퍼져 버린 데다가 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명력을 갖고 있다.

그밖에도 '백선엽 장군의 저서에 유재흥이 도망쳤다고 적혀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와는 다르다. 밴 플리트 장군과 한국군의 136페이지를 참조하면 백선엽 장군이 유재흥 장군이 작전회의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기술한 것은 21일, 유재흥 장군이 현리에 (비행기를 통해) 들려 지시를 내리고 다시 사령부로 돌아간 시점은 17일이다. 도망설의 근거는 당시 참전자들의 인터뷰와 소문 등으로 적전 도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백선엽 장군의 저서에는 군단장이 21일 작전회의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지 '도망쳤다'고 한 건 아니다.

유재흥 장군이 작전회의에 주재하려고 현리에 갔다가 복귀했다/21일에 작전회의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두가지 기록을 억지로 시점을 동치시켜 날조한 글이 인터넷에 유포되는 바람에 도주설은 큰 설득력을 얻었는데, 유재흥 장군이 사령부로 돌아간 시점은 17일이며 작전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날짜는 21일이라 도주설은 전혀 근거없는 주장이다.

여담이지만 당연한 이야기로 당시 북한의 기록이나 선전물들을 보면 국군 장교의 대부분이 "친일 반역모리배" 내지는 "어떤 어떤 전투에서 꼬리를 내리고 도주했다"라고 적고 있는데 위의 인터넷 글들은 당시 소문과 이걸 참고했는지도 모른다.

https://www.youtube.com/watch?v=5rQlWQLQdl0

박한진 예비역 육군 대령은 인터뷰에서 "상부가 비행기를 타고 도망갔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박한진 예비역 대령은 한국전쟁 발발 후 8월에 부산에서 이등병으로 자원입대했으며, 현리 전투 당시에는 상병이었다.[6] 따라서 당시 군단 배치 사정을 제대로 알 리 없었던 그의 증언은 "군단장이 비행기 타고 적전도주했다."는 '소문의 신뢰성을 확고히 해줄수 없으나, 아무튼 각종 증언을 볼 때 저런 '소문이 돈 것'만은 명백하다고 추정된다.

휘하부대 통제에 실패했으며 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것이 유재흥 장군의 책임이란 말도 있으며, 이 부분은 일리가 있지만 감안할 부분도 있다. 7사단 방어선이 붕괴되고 오마치 고개가 적에게 점령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국군 7사단과 미 10군단은 상황 전파를 제대로 하지 않았고, 유재흥이 제대로 전황 파악을 못한 건 저런 점들도 있기 때문. 무전기가 있는 시대에 부대 장악에 실패했다는 점을 비판하는 의견도 있지만, 앞서 적었듯이 현리 지역은 좁은 곳에 다수 병력이 몰려들면서 주파수 간섭으로 각 제대간의 무선에 혼란이 오는 상황이었다.

오마치 고개 돌파작전에 있어 지휘 체계를 명확하게 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 비판받을 부분. 허나 두 개 사단이 멀쩡히 있는데 설마 고개 하나를 돌파 못 하랴 생각했을 부분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회고록에서 유재흥 장군 자신은 포위망 내에서의 사주방어도 생각해 보았으나 휘하 사단장들을 믿는게 좋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6555 2016-04-28 15:49:13 3
충격) 6.25때 중국의 인해전술로 당한거 사실 아니였어여? [새창]
2016/04/28 14:51:01
사실 청천강 전투로 비판받아야 될 대상은 맥아더 장군입니다, 전선에서는 중공군 13병단 예하 6개군단 18개 사단 포병사령부 예하 3개 사단과 북한군 4개 사단의 역습 아래에 정말 시체로 벽을 쌓고 혈로를 뜷어가며 전선을 사수했는데 아직도 동경 사령부의 그의 가신이나 다를바 없는 참모진과 함께 고작해야 2만 7천여명의 북한 패잔병들과 마적떼나 다를바 없는 오합지졸로 이루어진 중공군을 가정하고 있었으며 인천 상륙 작전을 시작으로 하는 북진의 환상속에서 크리스마스 공세를 시작했고 군우리와 장진호에서 그 참상을 만들어냈으니 말입니다.
6554 2016-04-28 15:46:01 2
충격) 6.25때 중국의 인해전술로 당한거 사실 아니였어여? [새창]
2016/04/28 14:51:01
끝으로 그냥 글을 하나 새로 쓰는게 더 낫아보이기는 합니다만 아무튼 가져오신 글은 너무 생략이 심하네요, 청천강 전역에서 한국군 제 2군단의 가용 병력 2개 사단 6개 연대중 4개 연대가 분산 배치되어 악전 고투를 펼치고 있었으며 개천-비호산 전투에 이르러 2개 연대가 구장동 방면에 저지선을 펼쳐 예비대가 전무 했다는 사실을 왜 넘어가는지 중공군의 공세로 우측면의 낭림 산맥과 개마고원이 말 그대로 공백 상태였으나 전선의 붕괴를 틀어막고 버티던 사실은 무시하는지 전선을 유지하기 위하여 워커 장군이 급히 예비대이던 한국군 7사단을 2군단 휘하에 배속시킨 사실은 또 어디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7사단이 아니었다면 청천강 이북에서 유엔군은 괴멸당했을텐데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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