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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8 21:5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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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를 가져오시니 위키로 답변드리겠습니다, 언급하신 위키의 레퍼런스에 대한 반론도 포함되어 있으니 따로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또한 제주 4.3 사건의 전투 사령관이나 그게 이 현리 전투의 소문이 사실이라는 논증은 되지 못하지요, 오히려 그 논지를 빌자면 영천 탈환이나 군우리 등에서의 공적을 생각하면 현리 전투가 아니라는 논리도 성립하는데요?
https://namu.wiki/w/%ED%98%84%EB%A6%AC%20%EC%A0%84%ED%88%AC
5.2. 유재흥 장군은 정말로 도망갔는가?[편집]
당시 생존자들 사이에서 유재흥 장군이 도망쳤다는 소문이 돈 것은 사실이다. 애초에 3군단 본부 및 전술지휘소는 당시 포위망 바깥인 하진부리에 있었으나, 유재흥 장군이 예하 사단장들과 오마치 고개 돌파 작전회의를 마친후 군단전술지휘소로 복귀하는 게 그것도 장병들이 다 볼수있는 경비행기로 포위망 내의 장병들에게는 군단장이 도망치는 것으로 인식되었으며, 이후 군단전체가 붕괴하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일단 한국 인터넷 상에서는 유재흥 장군이 도망간 게 정설인 것처럼 널리 퍼졌다. 이 설이 널리 퍼지게 된 이유는 네이버 부흥 카페의 지금은 삭제된 한 게시글이었는데, 정작 저 글도 밀리터리, 군사무기 카페 쪽에서 올라온 글을 인용한 것이라고 면피. 한국어 위키백과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유재흥 장군 도주설이 시작된 곳은 디시인사이드 밀리터리 갤러리와 이글루스가 유력하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논란 당시 군 원로들이 공동성명을 내어 이를 반대한 일이 있었는데, 이후 당시 좌익 성향이 강했던 이글루스 유저들 및 디시인사이드 유저들에게 '찍혀' 버린 것. 비단 유재흥뿐 아니라 백선엽 장군 등 6.25 참전 장성들에 대한 악의적인 사실왜곡 비방글들이 이때 양산되었다. 덕분에 지금 인터넷에는 아직도 6.25에 대한 왜곡된 사실들이 떠돌아다닌다
아직도 남아있는 도주설 유포 글들을 보면 현리 전투를 '전작권을 넘겨 주게 된 계기'로 표현하며, 유재흥 장군을 '전작권을 넘겨 주는 빌미가 되었는데 도리어 전작권 환수를 반대하는 똥별'로 표현하는 등 전작권 이양에 대해 지나친 사실왜곡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5]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논란에 대해 유리한 프레임을 만들기 위해 사실왜곡으로 점철된 글들이 양산된 것. 아직 밀리터리 갤러리에 남아있는 당시의 글 일부 이후 이글루스, 디시인사이드의 글들이 네이버, 다음 등의 카페 블로그에 퍼날라지면서 인터넷에 크게 퍼져 버린 데다가 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명력을 갖고 있다.
그밖에도 '백선엽 장군의 저서에 유재흥이 도망쳤다고 적혀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와는 다르다. 밴 플리트 장군과 한국군의 136페이지를 참조하면 백선엽 장군이 유재흥 장군이 작전회의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기술한 것은 21일, 유재흥 장군이 현리에 (비행기를 통해) 들려 지시를 내리고 다시 사령부로 돌아간 시점은 17일이다. 도망설의 근거는 당시 참전자들의 인터뷰와 소문 등으로 적전 도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백선엽 장군의 저서에는 군단장이 21일 작전회의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지 '도망쳤다'고 한 건 아니다.
유재흥 장군이 작전회의에 주재하려고 현리에 갔다가 복귀했다/21일에 작전회의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두가지 기록을 억지로 시점을 동치시켜 날조한 글이 인터넷에 유포되는 바람에 도주설은 큰 설득력을 얻었는데, 유재흥 장군이 사령부로 돌아간 시점은 17일이며 작전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날짜는 21일이라 도주설은 전혀 근거없는 주장이다.
여담이지만 당연한 이야기로 당시 북한의 기록이나 선전물들을 보면 국군 장교의 대부분이 "친일 반역모리배" 내지는 "어떤 어떤 전투에서 꼬리를 내리고 도주했다"라고 적고 있는데 위의 인터넷 글들은 당시 소문과 이걸 참고했는지도 모른다.
https://www.youtube.com/watch?v=5rQlWQLQdl0
박한진 예비역 육군 대령은 인터뷰에서 "상부가 비행기를 타고 도망갔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박한진 예비역 대령은 한국전쟁 발발 후 8월에 부산에서 이등병으로 자원입대했으며, 현리 전투 당시에는 상병이었다.[6] 따라서 당시 군단 배치 사정을 제대로 알 리 없었던 그의 증언은 "군단장이 비행기 타고 적전도주했다."는 '소문의 신뢰성을 확고히 해줄수 없으나, 아무튼 각종 증언을 볼 때 저런 '소문이 돈 것'만은 명백하다고 추정된다.
휘하부대 통제에 실패했으며 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것이 유재흥 장군의 책임이란 말도 있으며, 이 부분은 일리가 있지만 감안할 부분도 있다. 7사단 방어선이 붕괴되고 오마치 고개가 적에게 점령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국군 7사단과 미 10군단은 상황 전파를 제대로 하지 않았고, 유재흥이 제대로 전황 파악을 못한 건 저런 점들도 있기 때문. 무전기가 있는 시대에 부대 장악에 실패했다는 점을 비판하는 의견도 있지만, 앞서 적었듯이 현리 지역은 좁은 곳에 다수 병력이 몰려들면서 주파수 간섭으로 각 제대간의 무선에 혼란이 오는 상황이었다.
오마치 고개 돌파작전에 있어 지휘 체계를 명확하게 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 비판받을 부분. 허나 두 개 사단이 멀쩡히 있는데 설마 고개 하나를 돌파 못 하랴 생각했을 부분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회고록에서 유재흥 장군 자신은 포위망 내에서의 사주방어도 생각해 보았으나 휘하 사단장들을 믿는게 좋다고 판단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