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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83 2016-04-29 13:51:23 0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케네디와 흐루쇼프가 지도자여서 다행 [새창]
2016/04/29 12:38:44
사실 케네디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카틴숲과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학살과 숙청에 깊게 관여한 전적이 있는 흐루쇼프는 똘기가 없다고 단언하기는 힘들죠, 단순한 업무로서 기계적으로 수행했다면 그 것도 무섭고 말입니다.
6582 2016-04-29 13:46:55 4
드라마스 프로듀서 후보들 [새창]
2016/04/29 11:18:32


6581 2016-04-29 13:45:47 7
드라마스 프로듀서 후보들 [새창]
2016/04/29 11:18:32


6580 2016-04-29 13:44:43 14
드라마스 프로듀서 후보들 [새창]
2016/04/29 11:18:32


6579 2016-04-29 13:44:26 11
드라마스 프로듀서 후보들 [새창]
2016/04/29 11:18:32


6578 2016-04-29 11:10:09 1
충격) 6.25때 중국의 인해전술로 당한거 사실 아니였어여? [새창]
2016/04/28 14:51:01
분명 3군단이 붕괴한 것은 사실이고 유재흥은 군단장으로서 책임은 있지요, 네 그런데 이 현리 전투의 패전이 오로지 유재흥 그 한 사람만의 책임이고 그가 유일한 원인 제공자인건 또 뭔가요?
6577 2016-04-29 11:08:01 1
충격) 6.25때 중국의 인해전술로 당한거 사실 아니였어여? [새창]
2016/04/28 14:51:01
20군의 60사단은 17일 03시에 후평리 오마치, 미산리, 왕성곡 일대를 점령, 적군 5백여명을 섬멸하고 현리 지역 국군 3, 9사단의 철수로를 차단하였다.

27군의 우회 임무부대인 81사단은 17일 05시에 엄달동 도로 양측 고지와 침교, 방내리 요지를 점거하여 현리의 적이 서남으로 도주하는 길을 차단하였다.
<중공군의 한국전쟁사> 세경사 p149

현리 3군단의 목줄인 오마치 고개는 5월 17일 07:30에 선두부대인 중공군 20군의 선두부대인 60사단 178연대 2대대 6중대 병력이 점령하였으나 08시경에는 2개 중대로 증강되고 오전 중으로는 대대 규모, 오후에는 연대 규모, 야간에는 60사단의 전 병력이 배치되었다.

오마치 후방 5킬로미터 지점의 침교 일대에도 5월 17일 오후까지 중공군 27군 81사단이 점령함으로써 국군3군단은 중공군의 2중 포위망에 갇히게 되었다.
<6.25전쟁의 실패 사례와 교훈> 최용호 p357-359
6576 2016-04-29 11:07:05 1
충격) 6.25때 중국의 인해전술로 당한거 사실 아니였어여? [새창]
2016/04/28 14:51:01

덕분에 두서 없게 나마 자료를 정리할수 있네요.

3대대의 목표점령상황은 무선으로 연대에 보고되었다. 이때에는 현리 일대에 2개 사단이 집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무선망의 혼선이 심하여 통화가 매우 어려웠다.

3대대의 뒤를 이어 736고지의 남서쪽에 있는 785고지를 점령할 임무를 띤 1대대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용포 교량을 건너지 않고 내린천을 따라 남하한 후 행방이 묘연해졌다. 30연대 전술지휘소에서는 어둠이 깔린 이후부터는 1대대와의 통신마저 두절된 관계로 1대대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 뒤에 확인된 일이지만 이 시각에 1대대는 방대산 중턱으로 철수하고 있었으나 그 사유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1대대가 785고지를 점령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는 30연대장 손희선 대령과 1대대장 김상의 중령의 증언이 엇갈리고 있다. 1대대장은 군단 주력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하여 방대산에 병력을 배치하였다고 증언하고 있으며 30연대장은 지금까지도 1대대장이 785고지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고 증언하고 있다.

제 18연대장 유양수 대령은 그에게 부여된 포위망 돌파임무의 중요성과 이를 수행하는데 수많은 난관이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비장한 각오 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연대는 2100에 9사단 30연대가 공격을 개시하면 이 연대를 후속하다가 오마치(오미재) 부근에서 30연대를 초월공격하여 오마치를 점령한다.
제 2대대는 도로를 기준으로 하여 오마치 우반부를 점령하라.
제 3대대는 도로를 기준하여 오마치 좌반부를 점령하라.
제 1대대는 연대 예비로 공격준비태세를 갖추고 공격제대를 후속하라.
각 부대는 야간전투에 필요한 무장만을 갖추어 작전에 임하라.

이와 같이 18연대의 작전명령은 30연대와는 달리 포위망 돌파를 위한 적극적인 것이었으며 이에는 필승을 다짐하는 연대장의 의지가 스며있었다. 연대장은 명령을 하달하고 용포 부근에 전술지휘소를 설치한 후 공격 준비 상태를 점검하면서 30연대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에 9사단장이 18연대 전술지휘소를 방문하여 연대장에게 “돌파작전에 자신이 있느냐?”고 질문하였다. 이때 18연대장은 9사단장이 돌파작전에 대하여 회의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중략)

이러던 중 3사단장은 18연대장의 보고를 받고서야 30연대가 공격을 하지 않고 방대산으로 철수하고 있는 상황을 알게 되었다. 3사단장은 군단의 주력이 혼란상태에 빠져들어 이미 통제력을 잃고 있었으며 돌파공격부대인 30연대마저 공격을 하지 않고 철수하고 있는 상황 아래서는 돌파작전이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장비와 병력을 모두 철수시키지 못할 바에는 병력이라도 살려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된 그는 18연대의 공격을 취소하고 방대산을 경유하여 창촌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하였다.

<한국전쟁 전투사 현리전투> 1988 p161-168
6574 2016-04-29 11:00:33 1
충격) 6.25때 중국의 인해전술로 당한거 사실 아니였어여? [새창]
2016/04/28 14:51:01
바닥 보인 중공군 체력

그들이 참전 이래 줄곧 보이던 패턴은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공세 시작 뒤 4~5일이 지날 경우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기만적이면서 은밀하며 다양한 전법으로 아군에게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오지만 그를 지속적으로 이끌어갈 우직한 힘이 부족했던 것이다. 거리로 따지자면 공격 동선(動線)이 보통 50㎞를 넘을 시점이었다. 이 정도의 거리를 이동하며 화려하게 공세를 펼치다가 중공군은 그 이상을 넘어설 경우 체력이 뚝 떨어지고는 했다. 보급선이 길어지면서 그를 위한 수송능력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미군의 막강한 공군기들은 그런 중공군을 집요하게 다뤘다.

전선에 선 중공군의 보급력이 미 공군의 정밀한 폭격으로 크게 떨어지면서 중공군은 공세를 이어가기 어려웠고, 그로부터는 아군의 공격 그물에 갇혀 막대한 인명의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그를 상징적으로 드러냈던 게 바로 중공군의 5단계 2차 공세 때의 이른바 현리 전투였다.

중공군은 현리에서만 한국군을 제압하는 것으로 당시의 공세를 마무리해야 했다. 미 2사단의 서쪽 견부(肩部)는 강했고, 동쪽 또한 대관령에서 한국군 1군단에 막혀 공세를 접어야 했다. 미 3사단의 신속한 기동으로 인해 운두령에서는 오히려 퇴로가 막혀 상당수의 중공군이 사상하거나 포로로 붙잡혔다. 중공군 수뇌부가 계획한 내용은 거의 현실로 이뤄진 게 없었다. 한국군 3군단을 무너뜨리고 전선을 일부 뚫었지만 현격한 체력의 차이로 오히려 아군의 포위망에 상당수의 병력이 갇히면서 피해는 아주 컸다. 한국군 3군단의 2개 사단과 미 10군단 지휘를 받았던 한국군 5, 7사단을 먼저 소멸한 뒤 미군의 역량도 크게 무너뜨리겠다는 당초의 구상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중공군은 아마 그 시점 어디에선가 ‘이 전쟁에서 우리가 승리를 거두기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일정한 패턴에 따라 다소의 우세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런 양상에 따라 전투를 이어갈 경우 더 큰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현리 전투는 분명한 분수령이었다. 앞쪽의 흐름과 뒤쪽의 전쟁 흐름이 크게 갈라지는 그런 분수령 말이다. 정확한 통계는 어떤지 잘은 모르겠으나, 중공군은 당시 5차 2단계 공세에서 피해가 매우 컸던 것으로 알고 있다. 중공군이 참전한 이래 가장 큰 피해를 당한 전투를 꼽는다면 아무래도 이 전투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 전투를 기점으로 전쟁의 양상은 크게 바뀐다. 대규모 병력이 한꺼번에 움직이며 펼치는 기동전의 패턴은 거의 사라지고, 전술적 차원에 멈추는 소모적인 고지전(高地戰)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는 점이다. 중공군은 전략적인 판단을 그 무렵에 내렸을 것이다. 그때까지의 방식으로는 더는 이어가기 힘든 전쟁이라는 판단을 내린 중공군 수뇌부는 결국 약 한 달 뒤인 1951년 6월 소련의 제안에 따라 휴전협상에 나서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전선에 불쑥 솟아있는 고지에서는 늘 싸움이 붙었다. 소모적인 진지전이 잇따라 벌어질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 백선엽의 6.25 징비록중 발췌
6573 2016-04-29 10:59:26 1
충격) 6.25때 중국의 인해전술로 당한거 사실 아니였어여? [새창]
2016/04/28 14:51:01
허현강 30포병대대 관측장교 (살아남은 자의 일기, 웅진출판,1996)

철수하다 보니까 18연대 중상사들이 적이 몰려오는데도 겁내지 않고 태연히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니까 나도 안심이 되었다. 그들은 지휘관들의 무능을 욕하며 아무리 백골연대가 강해도 상급지휘관이 써먹지 못하면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다며 그들만 앞장서서 도망쳤다고 불평하는 말을 들었다. 도중에 보니까 장군이 잠방이를 입고 나왔다. 옆에 서 있는 사람을 보니까 지도판을 든 중위였는데 전속부관 배지를 달고 있어서 장군인 줄 알았다.

유양수 18연대장

우리 18연대는 선두 공격부대를 후속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30연대의 행동을 주시하기 위해 연대 수색중대를 뒤따르게 하였다. 그런데 그 연대가 공격은 하지 않고 방태산으로 후퇴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크게 당황하였다. 이런 명령위반 사실은 지금이라도 규명되어 올바르게 전사에 기록되어야 한다.
6572 2016-04-29 10:58:21 2
충격) 6.25때 중국의 인해전술로 당한거 사실 아니였어여? [새창]
2016/04/28 14:51:01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었다

따라서 퇴로가 막혔다고 해서 무작정 뿔뿔이 흩어져 물러날 게 아니라 죽기를 각오하고 적과 싸움을 벌여야 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런 각오만이라도 있었다면 현리 전투의 기록적인 참패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오히려 미군의 강력한 공중보급을 바탕으로 오마치를 점령한 중공군을 후방에서 압박하며 전방에서 다가오는 중공군의 공세에 맞설 수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 여러 가지 가능성을 헤아리지 못한 채 중공군의 공세에 허무하게 물러서 부대전체를 급기야 거대한 혼란의 상태인 분산(分散)으로 몰고 가 참패를 맞았던 두 사단장의 책임 또한 막중하다. 그런 여러 가지 요인이 겹쳐 나타난 기록적인 참패가 바로 현리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이는 당시 전선에 섰던 한국군의 수준이 반영된 결과였다. 건국과 함께 겨우 제대로 무장하기 시작한 한국군으로서는 실전 경험이 턱없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화력과 장비 또한 보잘 것이 없었다. 아울러 부대 전체를 끈끈하게 묶는 조직력도 크게 부족한 상태였다. 그런 한국군의 약점을 전선에 마주섰던 중공군은 정확하게 간파했다. 그에 따라 중공군은 참전 이래 줄곧 한국군을 골라 공격을 펼쳤다.

- 백선엽의 6.25 징비록중 발췌
6571 2016-04-29 10:57:28 1
충격) 6.25때 중국의 인해전술로 당한거 사실 아니였어여? [새창]
2016/04/28 14:51:01
2. 박보희 28연대 작전장교(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 홍익출판사,2000)

어두운 밤이었다. 상황이 절망으로 보이자 드디어 각개 행동으로 후퇴 명령이 내려졌다......... 나는 나의 중대 병력을 이끌고 창촌 강가로 내려왔다. 안전을 확인 하며 나는 호령했다. 200명 전 중대원이 모두 강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선두는 아직 강 건너편에 도달하지 못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강의 바로 앞산에서 일제히 기관총 소리가 났다. 총알이 우박처럼 날아 왔다. 강물은 일순간에 피로 변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쪽 강변에 엎드렸다. 그러나 나는 중공군의 사정거리 속에 노출되어 있었다. 손에 잡힌 돌을 빼내 머리를 가렸다. 그게 무슨 소용이랴. 이 경우는 적탄이 내 몸 어디에 맞아도 그만이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 '하나님' 하고 불렀다. '하나님! 이번만 저를 살려 주신다면 나머지 여생을 하나님 위해 살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적탄은 계속 비 오듯 쏟아졌다. 기도 끝에 지휘관으로서의 생각을 해 보았다. '내 중대를 구하는 길이 무엇이 있을까. 그렇다. 한 가지 길이 있다. 미군 전투기가 적군을 발견하면 된다. 그런데 어떻게 미군 전투기를 부른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공중에서 폭음과 더불어 미군전투기 4대가 번개같이 나타났다. 조종사는 중공군 진지를 발견한 모양이다. 한번 선회하고 돌아오더니 로켓포를 적진에 쏘았다.

적진이 잠잠해졌다. 나를 따를 수 있는 병사는 세 사람 뿐이었다........ 나는 그 날부터 탐구의 인생길을 떠났다. 하늘의 뜻을 찾기로 했다. 종교를 찾기로 했다. 생명의 빚을 진 사람으로서 겸손히 사는 새 생활이 시작되었다.

3. 강승희 22연대 6중대 2소대장(아! 어찌 잊으랴 그 날들을, 팔복원,1995)

이런 가운데 전투력 최강을 자랑하는 18연대가 포위망을 뚫는다는 소식을 듣고 돌파작전의 성공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우리에게 들려오는 것은 적의 사격 소리 뿐, 돌파공격이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은 없었다. 적의 사격 소리가 점점 좁혀 오고 지휘계통은 무너져서 누구 하나 뚜렷한 명령을 내리지 못 하니 제 멋대로 부대를 이탈하는 병력의 뒤를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적의 실탄은 발뒤꿈치 부분에 팍팍 박혔다.

한참 가는데 뒤에서 "6번, 6번 어디 계십니까?"하자 "예, 여기 있습니다."라고 내 뒤에서 누가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뒤돌아보니 자그마한 키에 철모에는 별 하나가 표시되어 있었다. 6번은 사단장의 암호였고 우리 3사단장 김종오 준장이었다. 6번을 부른 사람은 사단 참모가 확실한데 아무데도 계급 표시가 없었다.......

하진부에서 재편성할 때 내 소대원은 연락병 포함해서 5명에 불과했다.

네 그렇지요, 생존자들 증언도 다 필요없지요, 오로지 경전을 모시는 마음으로 위키피디아만 보면 됩니다.
6570 2016-04-29 10:56:51 1
충격) 6.25때 중국의 인해전술로 당한거 사실 아니였어여? [새창]
2016/04/28 14:51:01
논증이나 해보시라니까 뭔 훈제청어를 이렇게 던지십니까? 나무위키보다 위키피디아가 낳은게 뭔데요? 정치 성향? 하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이지요, 일베는 뭐 위키와 거리가 멀다고 합니까? 수정 문제? 위키의 근간이 뭔지나 아세요? 별 논파 당하고 보니 이제는 좀 심한 말이지만 별 같잖은 훈제청어로 메우시나요?
6569 2016-04-29 10:52:28 1
충격) 6.25때 중국의 인해전술로 당한거 사실 아니였어여? [새창]
2016/04/28 14:51:01

거 훈제청어는 적당히 던지시고 입증이나 하세요, 위키피디아나 나무위키나 뭐가 다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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