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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6 00: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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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자면 이 당시 코뮌의 상황은 그리 낭만적인건 아닙니다, 단순한 숫자 놀음상 치안, 방위 등을 담당할 목적으로 편성한 국민군 8만 명, 그리고 예비역 11만4천 명, 여기에 각종 이주 노동자 수천명 등 총 20여만명이 모여야 하는데 실질적으로 징병이 폐지되고 지원제로 편성한 탓에 병력 소집이 극히 어려웠으며 주먹 구구식의 편제로 인하여 5~6만여명 정도가 모이게 됩니다,
앞서 내분을 요인에서 제외했습니다만 사실 군 지휘권을 두고 잡음도 많았고 미흡했던 점도 많은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떠나 보더라도 참 그렇지요, 가령 두서 없이 쓰느라 제외된 부분이 4월 초의 일인데 이 당시는 아직 진압군이 지방군 6만 여명으로 구성된 시기인데 파리 코뮌은 포위망 분쇄를 위하여 또한 왕당파 정부에 대한 반격을 위하여 언급하신 바 대로 베르사유로 진격하나 무참히 괴멸당합니다, 거의 병력차가 없던 상황에서 절대적 승기를 놓친 셈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