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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88 2017-06-16 11:50:43 2
초기 고구려는 요서를 100년이상 차지했다. [새창]
2017/06/16 05:02:10
으응 아니에요, 그거 님의 망상이에요, 춘추필법으로 순화한 표현이라는거 그냥 님 생각일뿐이에요, 상식은 무슨 상식 결론을 내리고 짜맞추니 당연히 안맞는 파트가 나올수 밖에 없지요.

조작질이라는거 별거 아니에요, 지금 하는게 조작질이에요, 으응 아무리 국어를 못해도 수학은 잘해야지, 분수도 못지키고 이러면 유사역사학 아니라고 빼애액 대던거 소용없는거에요, 뭐 지금 하는 짓거리봐도 당연한 일이지만, 아무튼 논증이라도 제시하고 주장하던가 결론을 내리고 짜맞춘
망상 따위를 제시하니까 비웃음 당하는거에요,
8787 2017-06-16 09:05:01 1
낙랑연구도 그동안 많이 변함(10년전 오영찬 교수 인터뷰) [새창]
2017/06/16 01:48:54
뭐 그분들께 그 내용이 중요하겠습니까, 그 분들께서는 그저 아몰랑인데 말입니다.
8786 2017-06-16 08:31:03 4
초기 고구려는 요서를 100년이상 차지했다. [새창]
2017/06/16 05:02:10
으응 요동 태수가 화친을 애걸하고 그런거 없어요, 오히려 야만스러운 고구려 인들이 스스로 현도 태수에게 항복하는 내용이에요, 으응 입맛대로 자르고 그러는거 아니에요, 그러면서 유사역사학 나부랭이가 아니라는것은 멍멍이 짖는 소리에요.
8785 2017-06-16 08:28:58 4
초기 고구려는 요서를 100년이상 차지했다. [새창]
2017/06/16 05:02:10
是歲宮死, 子遂成立. 姚光上言欲因其喪發兵擊之, 議者皆以爲可許. 尙書陳忠曰:「宮前桀黠, 光不能討, 死而擊之, 非義也. 宜遣弔問, 因責讓前罪, 赦不加誅, 取其後善.」安帝從之. 明年, 遂成還漢生口, 詣玄菟降. 詔曰:「遂成等桀逆無狀, 當斬斷葅醢, 以示百姓, 幸會赦令, 乞罪請降. 鮮卑、濊貊連年寇鈔, 驅略小民, 動以千數, 而裁送數十百人, 非向化之心也. 自今已後, 不與縣官戰斗而自以親附送生口者, 皆與贖直, 縑人四十匹, 小口半之.」

이 해(121년)에 궁이 죽어 아들 수성이 즉위했다. 상(喪) 당한 것을 틈타 출병하여 공격할 것을 상언(上言)하자 의논하는 사람들이 모두 허락할 만하다고 여겼다. 상서 진충(陳忠)이 말했다, “이전에 궁(宮)이 사나워 요광이 토벌하지 못하다 그가 죽자 공격하려는 것은 의롭지 않습니다. 마땅히 사람을 보내 조문하고 이전의 죄를 꾸짖되 용서하여 죽이지 말고 뒷날을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안제(安帝)가 이를 따랐다.

참고) [삼국사기] 태조대왕 94년(146년) 기사 – [후한서]에 이르기를『(위에 내용 그대로)』라 했다. [해동고기海東古記]를 살펴보면 이렇게 쓰여 있다. 『고구려 국조왕(國祖王) 고궁(高宮)은 후한 건무(建武) 29년(서기 53) 계사(癸巳)에 즉위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일곱 살이어서 국모(國母)가 섭정하였다. 효환제(孝桓帝) 본초(本初) 원년 병술(丙戌)(146)에 이르러 친동생 수성에게 양위하였다. 이때 궁의 나이가 100살이었으며 재위 94년째였다.』 즉, 건광 원년(121년)은 궁이 재위한 지 69년째 되는 해이다. 그러므로 [(후)한서]에 적힌 것과 [고기]는 서로 달라 부합되지 않는다. [후]한서의 틀린 것이 어찌 이와 같은가

다음해, 수성이 한나라 포로를 돌려보내고 현도로 와서 항복했다. 조서를 내려 말했다, “수성 등은 포악하게 거스림이 형용하기 어려울 지경이라 마땅히 신체를 끊어 젓갈로 만들어 백성들에게 보여야 하나 운좋게 사면을 받아 죄를 청하고 항복하였도다. 선비와 예맥이 해마다 노략질해 백성들을 쫓아내고 약탈하는 것이 수천이요, 죽는 이가 수십, 수백 명이니 이는 왕화에 귀의하는 마음(向化之心)이 아니로다. 지금부터는 현(縣)의 관원과 싸우지 말고 친하게 지내도록 하라. 살아 있는 포로를 되돌려 보낸다면 어른 한 명에 비단 40필, 어린 아이는 그 절반을 몸값으로 주겠노라.”

遂成死, 子伯固立. 其後濊貊率服, 東垂少事. 順帝陽嘉元年, 置玄菟郡屯田六部. 質、桓之閒, 復犯遼東西安平, 殺帶方令[八], 掠得樂浪太守妻子. 建寧二年, 玄菟太守耿臨討之, 斬首數百級, 伯固降服, 乞屬玄菟云.

[八]郡國志西安平,帶方,縣, 並屬遼東郡

수성이 죽자 아들인 백고(伯固-8대 신대왕. [삼국사기]에 의하면 차대왕의 동생)가 즉위했다. 그 후 예맥이 복종하여 동쪽 변경에 사건이 적어졌다.
8784 2017-06-16 08:28:21 4
초기 고구려는 요서를 100년이상 차지했다. [새창]
2017/06/16 05:02:10
으응 보면 볼수록 재밌어요

後句驪王宮生而開目能視, 國人懷之, 及長勇壯, 數犯邊境. 和帝元興元年春, 復入遼東, 寇略六縣, 太守耿夔擊破之, 斬其渠帥. 安帝永初五年, 宮遣使貢獻, 求屬玄菟. 元初五年, 復與濊貊寇玄菟, 攻華麗城[六]. 建光元年春, 幽州刺史馮煥、玄菟太守姚光、遼東太守蔡諷等將兵出塞擊之, 捕斬濊貊渠帥, 獲兵馬財物. 宮乃遣嗣子遂成將二千餘人逆光等, 遣使詐降;光等信之, 遂成因據險阨以遮大軍, 而潛遣三千人攻玄菟、遼東, 焚城郭, 殺傷二千餘人. 於是發廣陽、漁陽、右北平、涿郡屬國三千餘騎同救之, 而貊人已去. 夏, 復與遼東鮮卑八千餘人攻遼隊[七], 殺略吏人. 蔡諷等追擊於新昌, 戰歿, 功曹耿耗、兵曹掾龍端、兵馬掾公孫酺以身扞諷, 俱沒於陳, 死者百餘人. 秋, 宮遂率馬韓、濊貊數千騎圍玄菟. 夫餘王遣子尉仇台將二萬餘人, 與州郡幷力討破之, 斬首五百餘級.

[六]華麗, 縣, 屬樂浪郡
[七]縣名, 屬遼東郡也

그 후 구려왕 궁(宮-6대 태조대왕)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볼 수 있었고 국인(國人)들이 이를 두려워했다. 장성하자 용맹하고 굳세어 여러 번 변경을 침범했다. 화제 원흥(元興) 원년(105년) 봄, 다시 요동에 들어와 6개 현을 약탈하자 태수 경기(耿夔)가 이를 격파하고 거수(渠帥-중국 고대사서에서 주변민족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범칭. 군장君長보다는 격이 낮음)를 참했다.

안제 영초(永初) 5년(111년), 궁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현도에 속할 것을 청했다.

원초(元初) 5년(118년), 다시 예맥(濊貊)과 함께 현도를 약탈하고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했다. (6)

건광(建光) 원년(121년) 봄, 유주자사 풍환,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 등이 군사를 이끌고 새(塞)를 나와 고구려를 공격해, 예맥의 거수를 포획하거나 죽이고 병마(兵馬)와 재물(財物)을 노획했다. 이에 궁이 사자(嗣子-적자,상속자)인 수성(遂成-7대 차대왕, 태조대왕의 동생)을 보내 2천 여명을 지휘해 요광 등을 맞이하게 하고 사신을 보내 거짓항복 하였다.

요광 등이 이를 믿자 수성은 험요지를 점거해 대군(大軍)을 차단하고 은밀히 군사 3천 명을 보내 현도, 요동을 공격해 성곽을 불태우고 2천여 명을 살상했다. 이때 광양, 어양, 우북평, 탁군속국(광양, 어양 등은 모두 유주 소속의 군郡)에서 3천여 기병을 뽑아 함께 구원하게 했는데 이미 맥인(貊人)은 떠난 후였다.

여름, (고구려는) 다시 요동의 선비(鮮卑)족 8천여 명과 함께 요수(遼隊)(7)를 공격해 관원과 백성을 죽이고 약탈했다. 채풍 등이 신창(新昌-요동군 신창현)에서 요격했으나 싸우다 죽었고, 공조 경모, 병조연 용단, 병마연 공손포는 몸으로 채풍을 지키다 모두 진중에서 전사했다. 사망자가 백여 명이었다.

가을, 마침내 궁이 마한, 예맥의 수천 기병을 이끌고 현도를 포위했다. 부여왕이 아들인 위구태를 보내 2만여 명을 이끌게 했는데 주군(州郡)의 병력과 힘을 합해 이를 격파하고 5백여 급의 머리를 베었다.
8783 2017-06-16 08:26:40 4
초기 고구려는 요서를 100년이상 차지했다. [새창]
2017/06/16 05:02:10
으응 취사선택하고 그러는거 아니에요, 가령

《후한서》〈동이열전〉고구려條-
二十五年春, 句驪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祭肜, 以恩信招之, 皆復款塞。
(광무제 건무) 25년 봄, 구려(句驪)가 우북평(右北平)·어양·상곡·태원을 노략질하였으나 요동태수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의로써 이를 초유하니 모두 다시 항복하였다.

라고 하는데 해석 그렇게 하는거 아니에요, 앞 뒤 문맥 자르고 취사선택하는거 아니에요.

王莽初, 發句驪兵以伐匈奴, 其人不欲行, 彊迫遣之, 皆亡出塞爲寇盜. 遼西大尹田譚追擊, 戰死. 莽令其將嚴尤擊之, 誘句驪侯騶入塞, 斬之, 傳首長安. 莽大說, 更名高句驪王爲下句驪侯, 於是貊人寇邊愈甚. 建武八年, 高句驪遣使朝貢, 光武復其王號. 二十三年冬, 句驪蠶支落大加戴升等萬餘口詣樂浪內屬. 二十五年春, 句驪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祭肜以恩信招之, 皆復款塞

왕망 초에 구려병(句驪兵)을 뽑아 흉노를 토벌하려 했다. 고구려인들이 따르지 않자 강박(彊迫)하여 파견했는데 모두 새(塞) 밖으로 달아나 도적이 되었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추격했으나 싸우다 죽었다.

왕망이 장수 엄우(嚴尤)에 명하여 이를 공격하게 했는데 구려후 추(騶)를 새(塞) 안으로 유인하여 참하고 그 수급을 장안으로 보냈다. 왕망이 크게 기뻐하였고 고구려왕(高句驪王)을 하구려후(下句驪侯)로 고쳐 불렀다. 이때부터 맥인(貊人)들이 변경을 약탈하는 일이 더욱 심해졌다.

건무(建武) 8년(서기 32년), 고구려가 사자를 보내 조공하자 광무제가 다시 그 왕호(王號)를 회복시켰다.

건무 23년(서기 47년) 겨울, 구려 잠지락부의 대가(大加) 대승(戴升) 등 만여 명이 낙랑으로 와서 내속했다.

건무 25년(서기 49년) 봄, 구려가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침략했는데 요동태수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의로 달래자 모두 돌아가 새(塞)에 머물렀다.
8782 2017-06-15 22:38: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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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갱님, 간체 번체는 한자를 간략하게 쓴 것을 의미하지 글자를 바꿔쓴게 아니에요, 호갱님, 어디가서 간체, 번체를 글자를 바꿔쓴거라고 이야기 하지마세요 호갱님, 무식이 톡톡 튀겨요 호갱님, 복잡한 글자를 간략하게 쓴 것이 글자가 없었다는 증거가 아니에요 호갱님, 그럴거면 단어를 생략해서 쓰는 우리는 글자가 없어서 남의 글자를 가져다 쓰다보니 글자를 줄이는 걸까요 호갱님?
8781 2017-06-15 22:17: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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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갱님 한자는 국어국문학자료사전의 말을 빌자면 중국어를 표기하는 중국의 문자. 한자는 한족(漢族)이, 그들의 말인 중국어를 표기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표의문자의 하나라고 해요 호갱님, 호갱님의 상상의 나래에서의 상식이 현실에서의 상식과 꼭 일치하는 건 아니에요 호갱님,

그리고 호갱님 자부심을 가지자는게 판타지 소설 나부랭이를 휘갈기자는 말과 동의어는 아니지요, 호갱님, 그따위 소설 나부랭이에 기댈수 밖에 없는 자긍심은 없느니만 못해요 호갱님,
8780 2017-06-15 21:53:4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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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운영자님이 뿌리신 방종의 씨앗이 욕나올정도로 풍년이네요,
8779 2017-06-15 19:58:23 1
[재업]쿠투넷(구이넷) 역사교과서 국정화 찬성발언 [새창]
2017/06/15 17:30:32
81년 국회 국사 청문회 당시 발언을 보면 국사 교과서는 국민 들에게 민족 의식과 민족적 자부심, 긍지를 심어주는 민족 경전과 같은 것이므로 학문적으로 입증 할수 없고 정리 될수 없는 내용이라도 구약 성경은 믿을수 없는 내용이나 이스라엘 인들은 이를 자기내 고대사 교과서로 쓰고 있는 것 처럼 국민 교육용으로 필요하다면 수록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았으니 뭐, 저 양반들이 국정화 교과서를 찬성하는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지요;
8778 2017-06-15 13:07:29 0
81년 국사교과서 공청회 [새창]
2017/06/15 12:31:46
저 사건도 그러하지만 광주 민주화 사태를 구국의 결단으로 찬양하는 한편 학계를 숙청하여 자신들의 비원을 이루어줄 것을 전두환에게 간청했을만큼 애시당초 학술적 토론에 대한 생각 자체가 없었던 이들이라 이번 도종환 후보자 논란만 보더라도 딱히 놀랍지도 않지요,
8777 2017-06-15 11:28:53 3
역사 게시판의 소수의견에 대한 생각. [새창]
2017/06/15 04:03:30
주류학계 입장과 다르다는 이유로 유사역사학이다 사이비다 환빠다 라고 색깔론과 마녀사냥은 자제해야된다고 봅니다.

학술은 자유롭게 토론이 되어야 합니다

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님께서 주장하시는게 학술적 토론의 대상이 될수나 있나요? 제대로된 논증도 안되 주장하는 소설마다 줄줄이 논파되고 그런데도 인정 못한다고 녹음기 틀고 복붙이나 반복하고, 식민사학이니 나발이니 떠들어대시니 이게 학술적 토론입니까? 그냥 아몰랑이지.
8776 2017-06-15 08:38:22 0
몇 가지 좀 질문드려보려 합니다, [새창]
2017/06/15 00:17:14
좋은 자료 감사드립니다, 말씀하신대로 실 주행을 좀 해보고 결정짓는것도 나쁘지는 않갰네요, 다만 샤워 할데가 마땅치 않은게 가장 큰 문제인데 고민을 좀 해봐야겠지요.
8775 2017-06-15 08:36:33 1
역사 게시판의 소수의견에 대한 생각. [새창]
2017/06/15 04:03:30
그리고 당장 유사 역사학 그 들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재야 사학을 논하시는 분들과 이 좁은 게시판에서만 수 년여에 걸쳐 대화를 나누어 보았던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데 과연 커뮤니티의 건강함을 유지할수 있는 공생이 성립할수 있느냐는 말씀에는 개인적으로 회의가 듭니다,

가령 그 들이 어떠한 논파의 결과를 수용하였던 적이 있었던가요?, 아니면 어떠한 논증이 합리적으로 이루어 진 바가 있었던지요, 오로지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에 분노하여 상대를 조롱, 비하, 비난하거나 게시판에 도배를 하고, 다른 게시판과 이간질을 벌이는 가 하면, 시스템을 악용하여 다중 아이디를 이용해 여론 조작을 시도하는 등 도리어 그 해악이 우선 되는 상황만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상적인 대화가 이루어진다면 좋겠습니다만 수년여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경험으로 볼때 불가능한 업적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운영팀장님께 간언드렸고 공지를 만들고 여론을 수렴하여 운영자님께 부탁드렸지요, 물론 운영팀장은 앞에서의 말과 달리 뒤로는 유사 역사학을 수긍하고 있었고 운영자님은 흐지부지 넘어가시고 어떠한 입장표명도 아니하시고 계시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그렇습니다, 뉴라이트와 같은 우익에게는 반일, 국뽕, 유사 역사학에게는 친일, 식민사학 카르텔 이제는 역사 게시판의 정체성도 모호해졌네요, 뭐 그런걸 따지기에는 이미 게시판이 무너져 내린 어찌보면 사양길위에 있어 따지기도 뭐하지만 말입니다.
8774 2017-06-15 08:26:28 1
역사 게시판의 소수의견에 대한 생각. [새창]
2017/06/15 04:03:30
좋게 좋게 생각을 해보자면 운영자님께서 말씀하신 바 처럼 부담없이 누구나 편하게 글을 쓰고 의견을 주고 받는 그런 공간이 되기를 원하셨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게 사실이나 반대로 그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수 년여에 걸쳐 공지를 만들었으며 수 없이 학술만이 논의 되는 그러한 게시판이 아닌 말씀하신 바와 같이 자신의 의견과 주장을 가지고 담론을 하고자 하였던 상황에서 더 나아가 그 들과 대화를 하고자 차단을 풀었으나 도리어 도배와 비난, 조롱으로 일색하여 재 차단 및 금지 공지까지 만드신 상황에서 어떠한 일언 반구, 입장 표명 없이 공지를 흐지부지 무시하시고, 더 나아가 게시판 내 여론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려 금지 공지까지 차단한 현실을 쉬이 납득하기 어려운 것도 어느 정도 사실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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