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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9 11:5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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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갱님 그리고 계속 취사선택하고 불리한건 배제하실것 같아서 해당 블로그 원문을 더 긁어 왔어요 호갱님
(중략)
이렇게 해서 낙랑군은 한반도에서 축출된 것입니다. 그것이 낙랑군의 끝이 아니라는 게 후대의 바보 재야사가를 혼란케 하는 것입니다. (제발 사서 좀 읽으십시오.) [자치통감]의 뒷 구절을 마저 읽겠습니다.
모용외가 이들을 위하여 낙랑군을 두고 장통을 낙랑군 태수에, 왕준을 낙랑군참군사로 삼았다.
모용외가 낙랑군을 두었답니다. 그럼 어디에 두었을까요? 불행히도 이 당시 기록에서 낙랑군의 위치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그것이 어디에 있었든지 고구려에 의해 축출된 곳에 있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럼 낙랑군의 위치는 두 개가 되는 것입니다. 위만조선이 멸망한 후에 있었던 위치와 모용외가 설치한 위치의 두 개지요.
하지만 모용외가 그냥 명목 상의 이름만 가진 군을 만든 것이 아닐까요? 아닙니다. 모용외의 막료 중에도 낙랑 태수를 역임한 자가 있었으며, 모용외의 세자 모용황도 “평북장군 조선공”으로 낙랑과 관련한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조선은 낙랑군의 한 현입니다.) 또한 현도군도 이동해 오기 때문에, 낙랑군이 실제 설치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여기에 참고할만한 것은 [위서] 세조기(世祖紀)입니다. [위서]는 북위의 역사를 기술한 책입니다. 모용외의 손자 모용준이 세운 것이 “전연”입니다. 전연은 370년에 망했고, 북위는 386년에 세워진 오호십육국 중 하나입니다. 그럼 [위서] 세조기를 읽어보겠습니다.
연화 원년(432년), 영구, 성조, 요동, 낙랑, 대방, 현도 6군의 백성 3만 가구를 유주로 옮겼다.
없는 군현의 백성을 옮길 수는 없습니다. 이를 보면 분명히 낙랑, 대방 등의 군현이 모용외에 의해 옮겨져서 유지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위서 지형지에는 이런 재미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樂良郡前漢武帝置,二漢、晉曰樂浪,後改,罷。正光末復。治連城。領縣二。戶二百一十九 口一千八。永洛正光末置。有鳥山。帶方二漢屬,晉屬帶方,後罷。正光末復屬。
낙양군은 전한 무제가 두었다. 양한과 진에서 낙랑이라 불렀는데 후에 고쳤다가 파하였다. 정광(520-525) 말년에 복구했다. 치소는 연성이다. 현을 둘 가지고 있다. 호는 219, 인구는 1천 8이다. 영락현은 정광말에 두었으며 조산(鳥山)이 있다. 대방현은 양한과 진에 속했는데, 후에 파하였다. 정광말에 다시 속하게 했다.
[위서] 지형지에 따르면 요동군의 호는 131, 인구는 855에 불과하니 낙랑군이 그보다 더 큰 군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분명히 알겠지만 낙랑군은 고구려에 의해 축출된 후 모용외에 의해 어딘가에 설치된 것입니다. 그럼 이 낙랑군은 모용외의 통치가 미치는 곳 어딘가에 있었겠죠? 그곳이 어디일까요?
모용씨는 선비족의 하나입니다. 본래 시라무렌 강 상류에 살던 모용씨는 285년에 요동에서 모용외를 수장으로 추대합니다. 289년 대능하 방면을 차지하고 307년에는 선비대선우의 지위에 오릅니다. 중심 근거지는 요서의 창려군(昌黎郡)이었습니다. 동진 원제는 모용외를 평주 자사로 임명했습니다. 이때 고구려는 앞에 본 것처럼 미천왕 때로 모용외와 요동의 지배권을 놓고 티격태격하고 있었습니다.
모용외의 본거지는 창려군이었으므로 옮겨간 낙랑군도 그 부근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무튼 요서 일대에 낙랑군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중략)
호갱님 보시다시피 모용외가 따로 설치한 낙랑군에서의 사민을 말하고 있지 가져오신 글에서 처럼 한반도 사민설을 부르짖지 않으세요 호갱님
호갱님 반박이라고 가져오신 글이 저따위니까 비웃음 당하시는것이세요 호갱님, 링크에서 반박하고 있는 내용을 다시 들고오시면서 무슨 재반론이세요 호갱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