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유인페이지
개인차단 상태
Lemonade님의 개인페이지입니다
회원가입 : 12-06-21
방문횟수 : 1328회
닉네임 변경이력
일반
베스트
베오베
댓글
7108 2016-06-19 19:08:10 1
파일럿들 인성은 미공군보다 미해군이 더 낫네요 [새창]
2016/06/19 00:46:11
그러게요, 개인적인 감정을 실어서는 안되는데 쓸데없는데서 진지를 먹었네요;
7107 2016-06-19 15:46:40 6/15
파일럿들 인성은 미공군보다 미해군이 더 낫네요 [새창]
2016/06/19 00:46:11
인성이 얼마나 훌륭하냐면 저 분들은 테일후크 스캔들이라고 선후배에게 모두 맛난 엿을 먹이고 똥칠을 하며 결국 공군참모총장을 자살시킨 아주 유명한 사건을 저질렀지요, 진지는 갈비탕을 먹었습니다,
7106 2016-06-19 11:08:31 1
독일에 대한 판타지를 버리셨으면 좋겠습니다 [새창]
2016/06/19 07:52:36
사실 독일의 옛 식민지 지배에 따른 여러 문제는 비단 나미비아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토고, 카메룬 등 여러 곳에서 벌어진바 있는데 그러한 사실에 대하여 어떠한 보상이 뒤따르지 않는 것은 비단 물질적인 측면이 아닌 공식적인 측면에서의 담화나 사과 등이 뒤따르지 않는 것은 개개인의 생각차가 있겟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유감이기는 합니다, 비단 그러한 문제가 독일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도 있겠습니다만 아무튼 참 국가의 논리라는게 냉정하지요, 자국의 이익과 불필요한 문제 앞에서는 더 없이 냉정해 지니 말입니다,
7105 2016-06-19 11:02:44 0
독일에 대한 판타지를 버리셨으면 좋겠습니다 [새창]
2016/06/19 07:52:36
첨언을 하나 해보자면 일단 2차 세계 대전 이후 식민지에 대한 배상 문제에서 특기할 점은 앞선 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은 자국의 식민지를 영국, 일본 등의 승전국에게 모두 이양하거나 포기 내지는 점령 당하였기에 관할할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사실에 의거하여 배상 및 보상 등의 문제에 있어 제약이 발생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감안해야 할 사실이지요, 또한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문제는 런던 채무 협정에 따라 완전한 평화 협정 이후까지 연기되었으나 포츠담 협정에 따라 소위 말하는 동구권 국가들에 대한 배상 책임은 동독의 책임으로 넘어갔습니다만 폴란드의 경우 소련에서 담당해 주기로 하여 배상 면책 결정을 내리게 되었으며 그 외의 룩셈부르크, 그리스, 노르웨이 등 11여개의 국가는 50년대부터 60년대에 이르기 까지 1백만 부르크에서 많게는 4억 부르크까지의 보상액을 지급받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한가지 특기할 점은 이미 전후 분할 당시에 소련에서는 자국의 점령지 밑 관할지역에서 명목상 보상에 해당하는 임의의 수탈을 감행했다는 사실로 국가 배상 청구권 포기가 결코 관용이나 경제적 손실은 아니라는 점이겠습니다.

아무튼 70년대에 소련을 비릇한 관련 국가들의 국가 배상 청구권 포기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통일에 대한 지지 문제 등 여러 사정으로 말미암아 60년대부터 20여년 전을 기준으로 유고, 헝가리, 체코, 폴란드 등 여러 국가에 대하여 1천억 마르크가 넘는 배상액을 소모해 왔으며 이러한 배상에 있어 특기할 점은 손해 배상 능력이나 중복 보상 등의 문제에 있어 슐레지엔, 루르, 동 프로이센 등 자국의 영토 할양등의 문제를 들어 상계 처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7104 2016-06-18 01:44:03 1
(약스압) 흔히 잘못 알고 있는 사소한 역사적 오류들 [새창]
2016/06/16 21:11:44
첨언을 해보자면 석궁 그러니까 십자궁은 결코 장궁보다 싸지 않습니다, 중심이 되는 나무 안쪽에는 뿔을, 바깥에는 힘줄을 덧대어 가벼우면서도 강한 위력을 낳게 만드는 합성궁이 주목 한 자루를 깎아 심재와 피재를 적절히 섞어 합성궁과 유사한 효과를 낳게 만들었던 장궁보다 저렴할 리는 결코 없지요, 더욱이 장전할때 드는 힘이 이게 보통일은 아닙니다, 그냥 활을 당겨 걸거나 혹은 활을 밟고 당겨 롤러 너트 위에 거는 행위는 십 수년을 수련해야 한사람의 병사가 완성된다는 장궁보다는 그래도 쉽겠지만 나름 숙련도와 힘이 있어야 하지요, 무엇보다 당시 물가를 고려하면 결코 장궁보다 싸지 않습니다 이게 결코 저렴한게 아닌게 기본적으로 왠만한 합성궁 가격의 배 이상은 나온다고 보셔야 하고 거기에 14세기 이후에 나온 장전 장치나 체급차를 고려하면 가격은 더욱 올라갈수 있습니다, 다만 장궁보다 유리한 것은 윗분들이 말씀해주셨지만 역시 장궁과 유사한 위력과 명중률을 비교적 짧은 훈련 기간으로 커버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7103 2016-06-16 22:27:44 70
(약스압) 흔히 잘못 알고 있는 사소한 역사적 오류들 [새창]
2016/06/16 21:11:44


7102 2016-06-16 21:46:36 9
(약스압) 흔히 잘못 알고 있는 사소한 역사적 오류들 [새창]
2016/06/16 21:11:44
답글을 적고 보니 이미 석궁 우위론의 출처를 쓰셨군요, 제 불찰입니다,; 아무튼 끝으로 음 장궁병의 화살을 기사가 그냥 무시할수는 없는게 사실인게 비록 관통은 못한다 할지라도 운동 에너지는 고스란히 전달되지요, 쉬운 사례를 들자면 오토바이 헬멧이나 공사장 헬멧을 쓰고 머리를 맞을경우 헬멧이 파손되지 않는다고 해서 안 아픈게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즉 그러한 까닭에 무시할수는 없는게 사실이지요, 특히나 그러한 상황에서 적게는 십 수차례나 내려 꽂히는 화망에 밀려 낙마라도 하면 답이 없기도 하고 말입니다.
7101 2016-06-16 21:39:29 9
(약스압) 흔히 잘못 알고 있는 사소한 역사적 오류들 [새창]
2016/06/16 21:11:44
덧붙이자면 석궁의 관통 문제로 제시되는 사례중 하나가 이제 제2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나온 29번 종규, 그러니까 같은 기독교인 끼리 쓰지 말라는 말이었는데 이게 무슨말이냐면 갑옷도 쑥쑥 잘 뜷는 무기라서 금지시킨게 아니라 윌리엄 텔 흉내내는 유행에 따라 온갖 기행이 벌어지고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으니 시쳇말로 뻘짓 하지 말라는 것이었지요.

다만 석궁으로 갑옷을 뜷는 것은 무력화 시키는 것은 불가능한게 아니기는 합니다, 실제로 14세기 말엽에 그러한 위력을 낼수 있는 하프 보우급 이상의 석궁들이 실용화되고 널리 상품화 되었지요, 다만 그러한 하프 보우급 이상은 5kg~10kg 정도의 무게에 크레인 퀸 같은 외부 장전 장치가 필요하였고 그나마도 장거리가 아닌 근거리의 목책이나 성벽 뒤에서 화력을 집중해야 했습니다,
7100 2016-06-16 21:29:14 26
(약스압) 흔히 잘못 알고 있는 사소한 역사적 오류들 [새창]
2016/06/16 21:11:44

첨언을 하나 해보자면 막줄의 백년 전쟁 석궁 우위론(...)은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가 시초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석궁이 장궁에 비하여 절대적 우위에 있다거나 그 반대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일단 크레시 전투의 진형에서 볼수 있듯 장궁병은 적절한 지형적 우위와 화력의 집중을 달성할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긴 장전시간으로 말미암아 파비스라 하는 대형 방패가 필수적인 석궁병을 당시의 통상적이었던 야전을 피하고 시쳇말로 우주방어 모드로 들어간 영국군을 기다리다 지친 프랑스의 필립 6세가 닥달하여 내보낸 것이 문제였지요, 그 결과는 뭐...그렇습니다.;
7099 2016-06-16 00:20:24 0
조선이 왜란 이후 馬政이 파탄에 이른 이유가 뭘까요? [새창]
2016/06/13 21:17:45
고려 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이어진 지나친 공납은 우리나라의 말의 종류를 매우 국한 시킴과 동시에 목장의 위치를 특정 지역에 국한시키는 문제를 낳은 원인중 하나로 꼽히지요,
7098 2016-06-14 17:35:46 0
조선이 왜란 이후 馬政이 파탄에 이른 이유가 뭘까요? [새창]
2016/06/13 21:17:45
http://1392.org/bbs/board.php?board=history01&command=body&no=379

상기의 글처럼 일단 이덕일씨 등을 통하여 그러한 주장이 나오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해당 주장에는 기록 상 몇가지 문제가 따라옵니다, 가령 상기의 글에서 역시 언급된 바 있으나 실록을 볼때 언급하신 여진에 대한 말이 좀 다릅니다, 세종 8년 1월의기록을 보면 말을 바친 야인들에게 그 질에 따라 면포를 지급하는 기준을 마련하고 있는바 이는 무역으로 보기 어렵겠지요, 또한 태종 8년 제주도안무사의 기록 등에서 볼수 있듯 앞 날을 고려하지 않은 무분별하고 과도한 징발에 대하여 수없는 지적과 상소가 실록에 표기되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어승마 즉 임금이 타는 말 조차 고르기 힘든 상황에 처했다는 기록도 나오는 바 피해갔다고 보기는 어렵지요,
7097 2016-06-14 00:28:34 0
조선이 왜란 이후 馬政이 파탄에 이른 이유가 뭘까요? [새창]
2016/06/13 21:17:45
태종 9년도 기사입니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시무(時務) 두어 조목을 올렸다.

(중략)

1. 나라에 중한 것은 군사이고, 군사에 중한 것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周)나라 제도에 군사를 맡은 관원을 ‘사병(司兵)’이라 하지 않고 ‘사마(司馬)’라 하였으니, 말이 나라에 쓰임이 중한 것입니다. 우리 국가가 땅덩이가 작고 말도 또한 한도가 있는데, 고황제(高皇帝) 때부터 건문(建文)에 이르기까지 그 바친 말이 몇만 필이나 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상국(上國)에서 또 마필(馬匹)을 요구하여 그 수효가 심히 많은데, 유사(有司)가 기한을 정해 독촉하여 비록 말 한 필이 있는 자라도 모두 관(官)에 바치니, 이 같이 하면 나라에 장차 말이 없을 것이니 말을 하면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당(唐)나라 태종(太宗)과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모두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고, 거란(契丹)의 군사와 홍건적(紅巾賊)이 우리를 침구(侵寇)하다가 먼저 망하였는데, 이것은 산천(山川)이 험하고 장수가 훌륭한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말이 있었던 까닭입니다. 신 등은 생각하기를, 사대(事大)의 예(禮)로 말하면 바치지 않을 수 없고, 종사(宗社)의 계책으로 말하면 많이 바칠 수 없는 것이라 여깁니다. 또 어찌 오늘에 요구하고 명일에 요구하지 않을지 알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사대(事大)의 예(禮)와 종사(宗社)의 계책으로 참작해 시행하소서.

(중략)

세종 32년도 기사입니다.

평안도 도관찰사(都觀察使) 한확(韓確)·도절제사(都節制使) 김종서(金宗瑞)가 행성(行城)의 역사를 정지할 것을 청하니, 정부에 내려 의논하여 다만 군정(軍丁)의 수효만을 감하게 하였다. 이 해에 중국에 변란이 있어 명나라로 가는 사신의 행차가 전후(前後)로 모두 여섯 번이나 되고, 명나라 사신의 행차가 두 번이나 되었으며, 진헌마(進獻馬) 5천 필을 운(運)을 나누어 압령(押領)하여, 평안도 전체가 백성이 살 수 없게 되었다.

대강 조선초 그러니까 세종 무렵까지만 보더라도 수만 필의 말이 중국에 바쳐졌습니다, 말이 좋아 세 글자로 수만필이지 조선의 인프라 여건을 고려하면 이미 조선초에 아작난 현실을 명맥만 유지하다시피 끌고온게 후기의 재정 붕괴 및 여타 문제로 인하여 뼈대만 남았지요. 그걸 이괄이 뽑아낸겁니다, 물론 이괄만 탓할건 아니지요, 뭐 이인좌라던가 하시는 양반도 계시고 말입니다.
7096 2016-06-14 00:20:50 0
조선이 왜란 이후 馬政이 파탄에 이른 이유가 뭘까요? [새창]
2016/06/13 21:17:45
요약하자면 어려운 상황은 간단한게 말하자면 일단 조선의 재정 여건상 목장에서 군마를 생산하고 유지하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렵습니다, 가뜩이나 고려말~조선초에 비상식적인 말 무역으로 인하여 근간 자체가 아작난 상황에서 버티던 것도 임진왜란 등을 거치며 아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 기본적인 뼈대만을 유지하던 상황인 것이 조선 당시의 기병이나 이괄은 그러한 뼈대를 뜯어 부숴버렸습니다, 가뜩이나 예산 절감 및 서류 작업을 통하여 버티던 상황에서 수백명의 기병 전력을 이끌고 이탈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북방의 주요한 기병전력 그 자체를 뿌리채 뽑아 낸 셈이지요.
7095 2016-06-14 00:15:08 0
조선이 왜란 이후 馬政이 파탄에 이른 이유가 뭘까요? [새창]
2016/06/13 21:17:45
일단 개괄적이나마 두서없이 답변을 덧붙여보자면 조선 후기에는 지방 재정의 붕괴 및 정병의 입번 금지 등으로 인하여 사실상 지방군에서 기병 전력 자체가 붕괴를 넘어 소멸의 단계까지 나아가는 상황으로 그나마 제대로 유지가 되던 곳이 친기위 및 북병사, 남병사, 별무사와 번상병, 금군, 중앙 3군영, 훈련도감 등입니다만 실질적으로 전쟁에 있어 주력으로 동원되는 것이 함경도의 친기위, 북병사, 남병사 등입니다, 물론 문제는 순수하게 기병이라고 볼 일이 없다는 것으로 본디 자가 소유가 원칙이나 나라에서 지급하는 것이 암묵적인 관례였던 현실에서 보통 1/3 이상은 말이 없는 명목상의 기병으로 봐야 하며 그러한 상황은 그래도 보통 매우 긍정적인 현실로서 대개는 정번 즉 번상이 중지되어 서류상에만 존재하는 경우도 허다했습니다.; 더욱이 조선의 기본 전략은 견벽청야이며 야전에서의 전력차로 인하여 호란때는 크게 동원된바 없지요.
7094 2016-06-13 22:34:08 0
조선이 왜란 이후 馬政이 파탄에 이른 이유가 뭘까요? [새창]
2016/06/13 21:17:45
일단 호란 당시에는 이괄의 난 덕분에 사실상 조선군의 기병이 밀집한 북방 전력이 소멸되다시피 한 상황인데다 조선군의 전략은 기본적으로 견벽청야인터라 잔존한 기병들이 활약할 기회는 적었지요,
<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
< 121 122 123 124 125 >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