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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23 2016-06-28 00:44:11 30
백정(白丁)의 진실 [새창]
2016/06/27 23:04:03
제목이 맞다면 아마 백정의 딸이라는 이 드라마에서 사실 제가 가장 기억하는 장면은 그거였습니다, 무슨 유태인 사냥도 아니고 스스로 백정임을 나타내는 표식 검은 천을 가슴에 다는걸 잊었다는 이유로 관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겪는 주인공의 아버지였지요, 진짜 어린 마음이나마 이러한 사회 근간에 자리잡은 병폐는 말씀처럼 뭔가 사회적으로 엄청난 단절이 있어야 근절되는 것이라는 생각밖에 안들더군요, 우리가 부라쿠민과 같은 사건을 마냥 비웃고 조롱하고 넘어갈게 아니라는 생각도 설핏 들기도 하고 말이지요,
7122 2016-06-28 00:39:55 33
백정(白丁)의 진실 [새창]
2016/06/27 23:04:03
제가 기억하는게 맞다면 내용이 어렵게나마 학교에 보낸 딸이 운동회에 참여한다고 해서 큰맘먹고 찾아갔는데, 하필 거기에서 백정 각시 놀음으로 말미암아 벌거벗겨진채 개처럼 기어다니며 성희롱...을 빙자한 성폭행을 당하는걸 딸이 목격하는 바람에 그 충격으로 어머니는 자살한다는 내용이었는데 문제는 이게 순수한 드라마의 창작은 아니라는거죠; 나름 고증이 철저히 잘된 작품이었습니다.
7121 2016-06-27 23:28:01 12/109
아일랜드 대기근 [새창]
2016/06/27 20:32:38
사실 저 시대에 영국 아니 유럽에서 아일랜드 대기근을 바라보는 시각은 아무것도 없는 빈손으로도 얼마든지 풍요롭게 살수 있는 아일랜드라는 땅에서 그 들의 게으름이 낳은 참상이었지요, 그러하기에 이제 계몽적 시각에서 벌어진 일련의 구호 운동은 사실상 이름만 올라와 있는 수준이었고 언 발에 오줌 누기에 불과하였지요,
7120 2016-06-27 23:26:06 51
백정(白丁)의 진실 [새창]
2016/06/27 23:04:03
이러한 백정들에 대한 신분차별에 대한 본격적인 철폐요구는 1894년 동학농민군이 전주화약에서 정부측에 제기한 폐정개혁안 12조 가운데 처음 모습을 드러냅니다,

-노비문서는 소각할 것.
-칠반천인七班賤人 註4)의 대우는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평양립平壤笠은 벗게 할 것.

이들 조항은 노비의 경우 문서에 의해 신분이 확실히 드러났으며, 백정의 경우는 “옛 풍속에 영호남지방의 도한屠漢은 삿갓을 쓰지 못하며 다만 평량자平凉子, 패랭이를 쓸 뿐이다”라고 한 것처럼 평량자를 써서 신분을 표시해야 했던 당시 사회상황에서 볼 때 사실상의 차별철폐, 신분해방을 요구한 것이라 할수 있겠지요.

일반인과 같이 머리에 갓을 쓰게 된 것에 대해, 당시 북장로교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와서 활동하였던 선교사 무어 Samuel F. Moore, 牟三悅 목사는 “그동안 백정들은 머리에 갓을 쓰는 것이 허락되지 않아 외출할 때 패랭이를 쓰고 다녀야 했기 때문에 한눈에 백정신분이 드러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갓을 쓸 수 있게 되자 그들의 기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그 기쁨은 미국의 링컨 대통령의 노예 해방령으로 기뻐했던 흑인들의 것보다 더 컸다고 한다. 그래서 백정 중에는 너무 좋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갓을 쓴 이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후 김홍집내각은 폐정개혁안 12조를 반영한 갑오개혁에서

-문벌·반상의 등급을 혁파하고 귀천에 관계없이 인재를 뽑아 쓴다.
-공사노비의 전典을 일체 혁파하며 인구人口의 매매를 금한다.
-역인·창우·피공에게 면천을 허한다.

라는 개혁안을 선포함으로써 조선시대의 신분제도는 법제적으로 철폐되었고, 백정을 포함한 천민의 신분해방이 적어도 제도적으로는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의안은 단지 “역인·창우·피공에게 면천을 허한다”라고만 되어 있을 뿐 이들이 당시 받고 있었던 사회적 제약이나 차별대우 등에 관해 구체적인 해결방법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892년 무어 박사가 백정 박성춘朴成春과 고종의 어의였던 애비슨O. R. Avison 박사 등과 함께 1895년에서 1896년 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조정에 탄원서를 내어 법률상으로 완전한 자유를 얻은 뒤에도 백정의 여식 내지는 집단에 속한 여성이 대로변에 나오면 양민들이 너나 할것 없이 해당 여성의 옷을 찢어 발기고 말을 타는 등 원하는 만큼의 고기를 제공하거나 혹은 성에 찰때까지 지리하게 성폭행을 벌이는 백정 각시 놀음과 같은 지독하리만치 철저한 차별과 린치, 괴롭힘에 시달려야 했고 우리가 인식할수 있는 진정한 신분 철폐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한국 전쟁 이후에나 나오지요.
7119 2016-06-27 23:23:22 60
백정(白丁)의 진실 [새창]
2016/06/27 23:04:03
일전에 같은 글에 달았던 답글을 빌어 첨언을 하나 하자면 달단은 칭기스칸의 원정에 따라 유입된 이들로 이미 고려 시대에 북계 너머 시베리아 일대까지 넒은 범위에서 살고 있던 이 들입니다, 이러한 화척과 재인은 이미 나말여초부터 한반도에 살고 있었던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는데 그들은 농경사회인 한반도에 들어와 생활하면서도 영농법을 배우지 못하고, 무리를 지어 살면서 자신들의 전통적인 생활양식인 목축 수렵에 종사하거나, 일부는 가무를 연주하면서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니는 유랑생활을 계속하였습니다.

농경사회로 이동해 온 유목민들이 일반적으로 그러하듯이 이들도 뛰어난 무력과 기민한 행동력으로 농경사회를 유린하여 사회적 혼란을 일으키기도 하였였고 이러한 문제를 간과할수 없던 조선 정부는 이들을 제재하는 한편 적극적으로 농경사회에 동화시키려 하였습니다, 가령 1392년에 농우를 재인, 화척에게 파는 자는 재살율宰殺律로 논한다고 하였는데, 1419년에 와서는 재인·화척을 한곳에 두고 평민과 서로 혼인하면서 편안하게 살도록 한다는 판지判旨가 의정부에 내려졌습니다, 더 나아가 1423년 10월에는 더욱 적극적인 조치로서 이들도 본래 신분적으로 양인이란 것을 강조하여 ‘백정’이란 명칭을 부여하고 평민과 서로 통혼하면서 섞여 살도록 재차 언명하게됩니다, 즉 “재인·화척은 본시 양인으로서, 업이 천하고 칭호가 특수하여, 백성이 다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보고 그들과 혼인하기를 부끄러워하니, 진실로 불쌍하고 민망합니다. 비옵건대 칭호를 백정이라고 고쳐서 부르도록 하자”고 제의한 병조의 안을 왕이 수락한 것입니다.

이러한 적극적인 동화정책에도 원래 농경민이 아니었던 이들을 완전히 영농민으로 정착시키기는 어려웠습니다, 백정은 그러한 정책 가운데에서도 결속을 강화하여 특수거주지를 형성하였으며 도살·유기제조 등 전통적 생활양식을 이어나가게됩니다. 유목민 출신 가운데 육류를 주식으로 하였던 백정은 수렵만으로는 먹을 것을 조달할 수 없어 자연히 가축을 사육하여 도살하였고 점차 전문적인 도살업자로 발전해 나간 것이지요.

도살업은 영농방법을 모르는 유목민 출신 백정에게 적합한 직종이었고 또 높은 이윤이 보장되는 독점적 직업으로 대다수가 종사하게 되었으며 그들의 대표적인 직업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유목민적인 생활의 연장으로 초원지대를 따라 전전하던 그들은 소택지대에 자생하는 초목을 이용하여 유기柳器를 제조 판매하였고, 이는 도살업, 수육상과 함께 그들의 대표적 직종이 되었습니다.
7118 2016-06-26 23:32:53 2
조선총독 - 아베 노부유키 [새창]
2016/06/26 20:55:13
혹시 몰라 덧붙이자면 O.N.I 프로젝트라는 말에서 엿볼수 있겠습니다만 순수한 웹툰의 창작입니다, 실제 아베 노부유키의 발언은 아니지요,
7117 2016-06-24 16:00:41 0
자코바이트의 시대가 다시 돌아오는가.. [새창]
2016/06/24 14:12:02

만약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분리 독립이 진지하게 논의되고 현실화되어진다면 역대 최고의 정권이 되겠군요
7116 2016-06-23 23:03:50 0
만일 일본이 포르투칼에게 배를 구입해서 임진왜란을 일으켰다면.. [새창]
2016/06/23 16:26:56
덧붙이자면 vs는 별 의미가 없는게 사실입니다, 두서없이나마 요약하자면 당장 대 왜구전에 특화 발전된 양상을 보이는 조선 수군이라 하지만 정작 환경적 영향에서 비릇된 문제로 소나무와 같은 재질의 목재를 사용하여 그 내구성은 비교적 낮은 편이지요, 화력을 놓고 보자면 역시나 어떻게 보자면 백중지세이고 당시의 선상 전투가 중심이 되었던 상황을 놓고 보자면 의도적으로 평저선을 운용하였던 조선 수군이 또 일견 불리한게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숫자의 폭력과 전장에 특화된 함선을 무시할수도 없는 노릇이고 예컨데 단정 짓기가 애매하지요,
7115 2016-06-23 22:55:51 1
만일 일본이 포르투칼에게 배를 구입해서 임진왜란을 일으켰다면.. [새창]
2016/06/23 16:26:56
사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일단 운용부터 문제입니다, 보통 서구에서 8~9살 어린 나이에 구빈원을 거쳐 해사 협회를 통하여 훈련받고 유입되어 평균 수명 30대를 찍게 되는 선원의 숙련도는 당장 배를 구입하여 일 이년을 구른다고 해서 금방 이룰수 있는게 아니고 그러한 생활을 과연 용납할수 있을지도 의문이지요, 말 그대로 저 쪽에서는 갈 곳없는 사회 최하층이나 억울하게 납치당하고 끌려온 이들이니 그러한 막장 같은 처우가 당연하겠습니다만 글쎄요,
7114 2016-06-22 08:35:23 0
(약스압) 흔히 잘못 알고 있는 사소한 역사적 오류들 Ⅱ [새창]
2016/06/21 03:22:30
물론 노예 무역선들에 사람을 '적재'하는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겠습니다만 당시의 열악했던 선박 내 거주 환경 및 위생 상태에서 보다 더 나아간 아주 참담한 상황이라 갤리선과 같은 구조의 최소한 육지에 자주 들릴수 밖에 없는데다 끊임없이 일단은 관리 및 유지가 이루어지는 선박과는 차원이 달랐지요,
7113 2016-06-22 08:29:36 0
(약스압) 흔히 잘못 알고 있는 사소한 역사적 오류들 Ⅱ [새창]
2016/06/21 03:22:30
갤리선에서는 그 특유의 동력 구조상 비단 노예노잡이 뿐만 아니라 노잡이라면 누구나 앉은 자리 인근에서 적당히 볼일을 해결해야 했습니다만 이게 함선 내부가 아닌 외부에 영향을 줄 정도로 심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마 윗분이 말씀하신 것은 아프리카 노예 무역선과 어느 정도 혼동을 하신 것 같은데 장거리 대양 항해와 더불어 특유의 적재 구조, 좀 껄끄러운 이야기이겠습니다만 화물 팔레트 위에 사람을 눕히고 다시 화물 팔레트를 얹고 사람을 눕히는 식으로 층층히 밀폐된 선창에 사람을 '적재'를 했던 아프리카 노예 무역선들은 그 냄새만으로도 알수 있었다고 하지요.
7112 2016-06-21 23:29:54 4
(약스압) 흔히 잘못 알고 있는 사소한 역사적 오류들 Ⅱ [새창]
2016/06/21 03:22:30
첨언을 하나 해보자면 갤리선의 노잡이는 꼭 노예만을 쓰는 건 아닙니다, 가령 베네치아의 경우 자국내에서는 각 구역에서 제비뽑기로 선발된 인원이나 채무자 등을 섭외하여 충원하였으며 그 외에 달마티아, 스위스, 알바니아 등 각국에서 섭외되거나 자원한 일용직 노동자들을 이용했습니다, 이와 같이 노잡이를 충원하는 방식은 사회 최하층의 참정권조차 주어지지 않은 사실상의 무적자들이 주축이 되었던 고대 그리스부터 스스로 잡종이라는 자조를 들었던 갤리어스가 횡횡하던 지중해는 물론이거니와 신대륙 저편을 내달리던 시대에 이르기까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7111 2016-06-21 09:06:10 7
(약스압) 흔히 잘못 알고 있는 사소한 역사적 오류들 Ⅱ [새창]
2016/06/21 03:22:30
물론 이후에 숙련된 노잡이를 줄여도 괜찮아 지는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절대 다수를 일용직 노동자와 노예로 땜빵을 하면서 케이스 바이 케이스이겠습니다만 처우가 좀 더 안좋아졌을수는 있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이전의 그리스 시절이 보다 좋았는가 하면 아닙니다, 오히려 노동의 강도나 선박 건조 기술, 항해 기술의 문제 등으로 인하여 보다 육체적으로 고단함이 필히 더한 상황에서 비단 이후의 항해사史와 다를바 없는 처우를 겪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7110 2016-06-21 09:02:08 6
(약스압) 흔히 잘못 알고 있는 사소한 역사적 오류들 Ⅱ [새창]
2016/06/21 03:22:30
첨언을 해보자면 노잡이의 처우가 갈수록 나빠진 건 아닙니다, 일단 노동 환경 자체는 늘 변함이 없었고 도리어 더 안 좋았다고 볼수가 있습니다, 가령 기록을 본다면 본디 노잡이의 봉급은 1드라크마 정도입니다, 거기에 이제 3단노선을 기준으로 가장 위에서 자신의 노를 보면서 노를 젓는 30여명은 추가로 더 받습니다만 일단 답글이 길어지니 넘어가고 문제는 이 봉급이 고스란히 지급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정확히는 3오볼 즉 반 드라크마 만이 지급되었는데 그 이유에 대하여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제대로 봉급을 받을 경우 무분별한 낭비로 탕진을 하며 타락하기에 이를 막아야 했고 또 봉급을 줄 경우 도망을 가는 경우가 빈번하여 이를 막기 위하여 안전 장치로 비 정기적으로 반 드라크마씩 지급하는 것을 정당화 하고 있습니다,
7109 2016-06-21 08:47:14 6
미국의 총력전 [새창]
2016/06/15 10:58:30
음...간략히 써보자면 사실 무근입니다, 더 정확히는 작금에 이르러 예산을 더 타내기 위하여 노력하시는 군 관계자 분들의 말씀과 다를바 없는 사실로 이 이야기의 근원은 미 해군 총 사령관 이었던 어니스트 킹 제독이 전쟁에 투입된 연합군의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통틀어 계산을 해보았더니 인도, 버마, 중국 일대를 모두 넣고 계산을 해보더라도 전체의 자원 투입량의 15%에 지나지 않으며 나머지 85%가 유럽과 북아프리카, 대서양 일대에 투입되었다 라는 보고서에 따릅니다,

네 10%가 아니라 15%였고 미국 단독이 아닌 모든 연합군의 자원을 통틀어 추산한 계산이었고 더 나아가 승리가 아닌 전선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인데 문제는 이 보고서에서 어떻게 이러한 공식이 성립되어 결론이 산출되는가 즉 레퍼런스가 전무하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킹 제독의 계급 + 성질머리 로 주위의 우려와 궁금증을 일거에 짓밟은 이 보고서는 어떠한 반론, 제지 그 무엇하나 없이 2주후 쯤에 카사블랑카 회담장까지 가게 되었는데 그 사유를 보자면 그 이유를 본다면 카사블랑카 회담에서의 연합군 간의 이해관계때문입니다, 미 육군 참모 총장이던 마셜 장군은 이른바 독일 우선 정책을 대통령에게 인가 받은 전적이 있습니다, 예컨데 프랑스를 거쳐 독일을 격파하고 이 전쟁을 끝내자는 생각이었는데 문제는 공대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이 공존하고 있다는겁니다.

미국의 가장 큰 동맹국이자 연합군에서 두 번째로 비중이 높던 영국은 미국을 지중해의 자국의 이권 다툼에 끌어들이기를 원했고 여기에 마셜 제독은 처칠에 맞설 위치, 정치력 그 무엇하나 갖추지 못했으나 그를 대신해 미국의 이권을 지켜야 할 루즈벨트 대통령은 처칠을 위시한 영국에 대하여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여기에 던져진 것이 바로 킹 제독의 보고서입니다, 사실 이 보고서는 미국이 이렇게 열라 짱 센 투명 드래곤이에요, 하는게 아니라 절박한 상황을 토로하는 보고서입니다, 킹 제독은 사실 마셜 제독과는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입니다, 전쟁 초기 일본의 예상외의 격전에 큰 고초를 겪어가며 악전고투를 해나가 결국은 과달카날과 파푸아라는 성과를 거두었는데 이제 좀 숨통이 트이자 마자 독일을 처리할때까지 현재 상황을 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니 말입니다.

당연히 그렇게 된다면 일본에게는 시간이라는 커다란 축복이 내려지는 셈이고 태평양 전선은 더욱 알수 없는 수렁속으로 빠져들것이 분명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보고서를 바탕으로 절박한 태평양의 상황을 토로하여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이권을 좀 줏어먹고자 했던 것인데, 이 것이 마셜 장군의 입맛에 딱 들어맞은 것입니다.

즉 태평양이 이렇게 어려운데 무슨 지중해이고 무슨 대서양이냐 라는 것으로 일종의 공갈로 휘둘러진 것이지요, 이로서 영국과 미국 등 연합군의 전략이 대폭 수정되어 1944년에는 어쨌든 프랑스에 상륙을 하며 그 이전에는 일단 북 아프리카와 지중해 일대에 집중을 하자는 절충안이 제시가 됩니다, 더불어 태평양 일대의 전략도 수정되어 적절한 압력과 반격을 허가 받게 되었고 지중해에서 필요하지 않다 라고 판단되는 함선은 태평양 전선에 돌릴수 있게 됩니다, 즉 더이상 태평양 일대의 전력이 누수를 겪지 않게 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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