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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98 2016-07-25 23:00:06 0
인천상륙작전 이 짤 보니 궁금한게 있는데.JPG [새창]
2016/07/25 08:51:39
문제는 꿈보다 해몽이라고 결과론적으로 매우 성공적이었다는게 전부입니다, 사전 정찰을 통하여 결과적으로 배비된 저력이 미비함을 확인하였으나 만일 일선에서의 우려가 현실이었다면 뭐 답이 없지요, 당장 9월 15일이 작전 개시일인 이유가 9월 15일 혹은 27일이 아니면 다음달 11일이나 되야 군함과 상륙정을 띄울수 있을정도로 열악한데다 작정하고 당시 인천의 좁은 수로에 기뢰와 폐선을 깔아버리면 들어올 길이 없으니 말입니다,
7197 2016-07-25 22:56:09 1
인천상륙작전 이 짤 보니 궁금한게 있는데.JPG [새창]
2016/07/25 08:51:39
도박이 맞는 것이 어떠한 정보 판단도 없었습니다, 첫 부대 상륙이후 반나절 뒤에야 후속 부대를 밀어올릴수 있었으며 항구를 둘러싼 9m의 방벽은 물론이거니와 서울까지 약 30km의 지역은 언덕이 산재해 있어 방어하기 매우 좋은 지역인데다, 영등포는 공업 단지이고 그 뒤는 너른 백사장을 자랑하는 한강이 기다리고 있으며 그 뒤는 서울에서의 시가전이었고 무엇보다 서울에서 가까운 탓에 지원이 용이한 장점이 있어 일선에서는 군산과 평택을 지목했으나 태평양 전쟁 내내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거점을 우회하여 상륙하는 법을 익혔던데다 앞서 일본군이 인천을 통하여 한반도를 장악해내었던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육군참모총장 콜린스와 해군 참모총장 포레스트 셔먼 등을 정치적으로 회유하여 작전을 강행해 냅니다,
7196 2016-07-25 09:30:47 0
고당전쟁 과정 보면 안시성은 첫번째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만... [새창]
2016/07/25 08:13:30
필수코스가 아니라기 보다는 상황이 좀 다르지요, 필수적인 각 성과의 연계는 이미 방어선이 무너지고 신성을 비릇한 요충지들이 점령당채있는터라 물건너간 상태이고 그렇다고 당나라가 후방을 걱정하기에는 이미 보급로가 해상으로 연결되는 등 안전하게 배비되어 있고 고구려의 주력이 붕괴되어 죽죽 밀려나가는 터라 안시성에 집착할 필요도 없고 말입니다.
7195 2016-07-25 09:19:32 2
인천상륙작전 이 짤 보니 궁금한게 있는데.JPG [새창]
2016/07/25 08:51:39
까놓고 말해서 맥아더의 무리한 북진과 허술한 계획만 아니더라도 악전고투를 벌여가며 한국 전쟁의 후반기를 보냈을리는 없었을텐데 2차세계대전 내내 보여주었듯이 언론 플레이와 정치 놀음을 참 잘했던데다 유엔군 최고 사령관이라는 감투덕에 본문과 같은 신격화가 끊이지 않는게 문제입니다.
7194 2016-07-25 09:14:33 2
인천상륙작전 이 짤 보니 궁금한게 있는데.JPG [새창]
2016/07/25 08:51:39
5000분의 1은 전형적인 맥아더 신격화의 산물로 어디서 나왔는지 알수 없는 낭설에 불과합니다, 사실 인천상륙작전은 껄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전형적인 맥아더 장군의 쇼맨십적 계획의 일환으로 성공하였기에 다행이지 비슷한 목적에서 시행된 평양에서의 공수 작전, 크리스마스 대공세를 비릇한 여러 측면에서 그 리스크를 유감없이 보여준바에서 알수 있듯 괜히 일선에서 반대한게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작전이 어떻게 시행될수 있었는가를 보면 간단한게 정치 놀음이지요, 에드워드 알몬트를 비릇한 자신의 라인을 일선의 지휘관들의 권한을 깎고 지휘권을 분할시키는 등 힘을 실어 배비하는 한편 동경의 사령부를 장악해 나갔습니다, 물론 그 결과물이야 이제 현리 전투, 장진호 전투 등에서 여실히 드러났지요.
7193 2016-07-24 23:45:22 0
조선 초기 경계에 관한 예종 시기의 기록입니다. [새창]
2016/07/24 00:37:55
딱히 송구하실것 까지는 없습니다, 그냥 제가 아는 한도내에서 기록을 찾아봤을때 요동도사의 관할 아래의 지역으로서 딱히 명나라가 별도의 관리를 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조선이 관리한것은 아니라는 말로서 오히려 각 역참의 관리라던가 치안의 유지, 야인 활동의 억제 등은 명나라가 했으면 했지 조선이 한 적은 없다는 것으로 다만 조선 개국시 조선의 영역으로 나눈 적이 있다는게 전부일뿐 실질적인 소유 내지는 해당 지역에 대한 관리를 한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7192 2016-07-24 11:06:30 0
조선 초기 경계에 관한 예종 시기의 기록입니다. [새창]
2016/07/24 00:37:55
글쎄요, 음 제 말씀은 그러한 것을 토대로 압록강, 두만강 이북으로 조선의 경계를 일시적이든 어쨌든 간에 높일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공지일뿐인 지역임을 말해주는 내용들일뿐 그 것을 제어하거나 혹은 관할하는 것이 조선이라는 내용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일단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모르는 어떠한 사실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조선 왕조 실록을 비릇한 사료들에 기록된 바는 조선에서 관할하지 않는 지역이라는 겁니다, 심지어 치안 활동이나 군사 활동만 놓고보더라도 압록강, 두만강 이북은 야인들의 준동에도 전혀 출병이나 관리를 고려하지 않는 상황이니 말이지요,
7191 2016-07-24 10:07:37 0
조선 초기 경계에 관한 예종 시기의 기록입니다. [새창]
2016/07/24 00:37:55
글쎄요, 앞서도 설명 드렸습니다만 제가 모르는 어떠한 사료의 기록에서 언급되는 내용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미 조선 초기의 기록부터 연산파절에 대한 압록강, 두만강 이북의 지역에 대한 어떠한 행위든 간에 조선에서는 그 것에 대하여 관리를 안하고 있었습니다, 단적으로 말씀드려서 명과 조선의 통제가 이루어졌다 라고 하나 실질적으로 어떠한 관리를 하고 있었습니까? 공지인것은 맞지요, 조선 초기부터 종종 군사를 준비하여 사신을 마중나가기도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연산파절의 동쪽 지역을 조선이 방비했다는게 과연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반복되는 말씀입니다만 제가 모르는 어떠한 기록이 있어 그에 기록된 바가 있을수도 있겠습니다만은 문종 당시 연산파절부터 청석동까지 도적이 횡횡하여 수라장이 벌어진 시기에도 오로지 압록강, 두만강 이남의 평안도와 함길도만을 방비하였고 세종때는 건주위 야인이 해서의 달달과 손을 잡고 거병을 하려하는데 정작 연산참을 경계로 보는게 아니라 역시나 압록강, 두만강 이남만을 방비하고 있습니다, 과연 조선 초기 언제 관리를 보내어 연산참 동쪽을 관할하는 한편 병력을 보내어 방비를 하엿는지 참 의구심을 감출수 없는 부분이라고 할수 있겠지요.
7190 2016-07-24 00:44:13 0
조선 초기 경계에 관한 예종 시기의 기록입니다. [새창]
2016/07/24 00:37:55
덧붙이자면 많은 분들이 착각하시고 있는 것 중 하나가 간도의 영역 문제입니다, 간도란 본디 두만강 유역의 불법 개간지를 말하는 아주 작은 범주의 영역입니다, 그 것을 가지고 일본 제국에서 프로파간다를 통하여 요동 일대에 이르는 광활한 영역으로 만든바 혼동해서는 안되겠지요,
7189 2016-07-24 00:42:51 0
조선 초기 경계에 관한 예종 시기의 기록입니다. [새창]
2016/07/24 00:37:55
일단 음 답글이 길어져 부득이 하게 글을 새로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아무쪼록 양해 바랍니다,

예컨데 그렇습니다, 조선 초기에 분명 연산을 경계로 요동 동쪽을 얻은 것은 사실이나 실상 조선에서는 어떠한 행정 구역의 편입은 커녕 관할 조차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명목상 그러한 영토가 존재한다고 할뿐이지 실질적으로는 압록강, 두만강을 경계로 조선의 영토를 나누고 있었고 도리어 그 이북으로 백성이 이주하는 것을 엄히 막는 한편 이 경계선이 흔들리는 것을 심각하게 우려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사실을 가지고 조선 초기의 경계를 제가 모르는 어떠한 기록이 존재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연산 일대로 넒히는 것은 다분히 무리한 일이라고 보여지네요,
7188 2016-07-24 00:36:29 0
역사적 관점으로 연해주를 우리민족의 영토라고 주장할 근거가있나요? [새창]
2016/07/23 18:31:09
제가 말솜씨가 부족하여 어떻게 전달이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예종시기의 해당 기록을 새로 올려보겠습니다,
7187 2016-07-24 00:34:03 0
역사적 관점으로 연해주를 우리민족의 영토라고 주장할 근거가있나요? [새창]
2016/07/23 18:31:09
더하자면 예종시기의 기록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중략)

장장(長墻)이 비록 요하(遼河)에서 압록강(鴨綠江)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염려할 만한 것이 있는데, 만약 벽동(碧潼)의 경계(境界)인 산양호(山羊湖) 사이에 이른다면, 이는 동한(東韓)의 땅이어서 저들의 봉역 가운데에 있으니, 사람에 있어서는 팔꿈치와 겨드랑이의 사이와 같고 인가(人家)가 울타리 안에 있는 것과 같아, 한쪽은 여기에 있고 한쪽은 저기에 있어서 저들의 주장에 달려 있습니다. 어찌 다만 장사(長沙)의 무수(無袖)692) 뿐이겠습니까? 이것이 그 해의 세번째입니다.

이와 같은 이해(利害)는 삼척 동자(三尺童子)라도 알지 못함이 없습니다. 건주(建州)의 사람들은 형세상 반드시 와서 싸울 것이나, 가까이 들리는 일은 항상 그 실지를 잃음이 많을 터인데, 만약 진실로 이러한 일이 있는데도 태평하게 주청(奏請)하지 않는다면, 저들은 우리를 무능(無能)하다고 여기고 더욱 능욕(凌辱)하는 일이 있을 것이므로, 모름지기 급히 달려서 상주(上奏)하여야 할 것입니다. 연산 파절(連山把截)은 고황제(高皇帝)가 정한 바이므로 양국의 봉강(封疆)은 서로 어지럽힐 수 없습니다. 벽동(碧潼) 이서와 의주(義州) 이북은 큰 강이 한계로 막혀 있어서 족히 염려할 것이 못되나, 이어 김보(金輔) 등 내사(內史) 족친(族親)을 보내어 들어가서 나라 사람들의 뜻을 아뢰어 제총(帝聰)에 이르도록 하여 요하(遼河)로부터 압록강(鴨綠江)에 이르기까지 쌓도록 할 수 있다면 어찌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청(請)에 따르지 않는다면 마땅히 자치(自治)하는 일이 더욱 엄중하게 하여 만세(萬世)토록 견고하게 할 뿐입니다.

신이 가만히 보건대, 평안도의 폐해로서 큰 것이 셋 있으니, 부방(赴防)이고 관부(館夫)이고 기재(騎載)하여 영송(迎送)·호송(護送)하는 데 지대하는 일입니다. 만약 벽동의 강 밖에다 또 장장(長墻)을 쌓는다면 북방(北方)의 수어(守禦)는 옛날에 비해서 가벼워질 것입니다. 만약 전과 같이 남쪽 경계의 군사로써 강변(江邊)의 땅을 지키게 한다면 백성들이 모두 요해(遼海)로 흘러 들어갈 것이니, 그 해로움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모름지기 강 연안의 주(州)·군(郡)을 흩어서 적유령(狄踰嶺)을 관방(關防)으로 삼아야 할 것이니, 강계(江界)·위원(渭原)은 희천(熙川)에, 이산(理山)·벽동(碧潼)은 운산(雲山)에, 창성(昌城)·삭주(朔州)는 귀성(龜城)에 옮기소서. 이렇게 하면, 강변을 부방(赴防)하는 폐단은 거의 없어질 것입니다.

(중략)

즉 조선에서 관할하는 연산파절의 범주는 압록강, 두만강 이남 지역에 국한될뿐더러 조선에서 관할하는 지역은 그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도리어 백성들이 그 이상으로 올라가는 경계하고 있는바 실질적인 경계선을 어디로 봐야 할까요?
7186 2016-07-24 00:27:51 0
역사적 관점으로 연해주를 우리민족의 영토라고 주장할 근거가있나요? [새창]
2016/07/23 18:31:09
이 간도 문제에서 중요한 것이 과연 양측의 경계일까요? 사실 이게 어찌보면 상당히 재밌는 사실이 될수도 있는 것이 일견 보자면 충분히 우리가 실효 지배를 이룬 지역으로 볼수도 있으나 실질적으로 그러한 적이 없다는게 문제입니다, 언급하신 성종 당시의 기록을 보면 이미 조선 초기 경계를 나눈 직후에 공지로 내버려 둔 사실이 기술되어 있으며 조선 전기를 통틀어 조선과 조선이 아닌 지역의 경계는 이미 초기부터 압록강, 두만강 유역으로 기술되어 있는 사실을 볼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연산파절을 경계로 조선역시 방비를 하였다 하나 기록을 보면 치안 활동을 임의로 한 관리의 처벌 문제를 두고 갑론 을박이 이루어지는 등 관리의 실효성을 의심케 하는 기록이 나오는가 하면 연산파절에 대하여 압록강, 두만강 이북에 어떠한 관리를 파견하여 실질적으로 행정권 내에 두었는가 하는 사실은 기록을 찾기 어렵습니다, 물론 제가 모르는 어떠한 기록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가 연산파절을 관할하는 지역은 압록강, 두만강 이남 지역으로 국한되어 있습니다,
7185 2016-07-23 20:35:11 0
역사적 관점으로 연해주를 우리민족의 영토라고 주장할 근거가있나요? [새창]
2016/07/23 18:31:09
조선 초기에 압록강 건너에서 지방관으로 활동하던 즉 간도 일대의 점유권을 확인해줄수 있는 인물이 누가 있는데요?
7184 2016-07-23 20:34:33 0
역사적 관점으로 연해주를 우리민족의 영토라고 주장할 근거가있나요? [새창]
2016/07/23 18:31:09
아뇨 당시에는 불법 이주자이고 간도는 청나라 영토였습니다, 말 그대로 불법 이주한 것을 두고 조선의 영향력을 논한다면 중남미 일대에서 벌어지는 불법 이주를 통하여 미국에 대한 영토 점유를 논하는 거랑 똑같은 말이에요, 그리고 철도 부설권은 조선의 영향력과 하등 상관 없어요, 애시당초 간도 점유와 만주 일대의 철도 부설권 및 기존의 철도 운영을 놓고 저울질 하던것을 청나라와의 협상을 통하여 후자를 택한것 뿐이지요, 구태여 영향력을 찾자면 참정대신 박제순이 이토 히로부미에게 간도에 있는 자국민을 보호해달라고 요청한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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